'포스트 붕준호법' 제정 서명에 국내 1325명의 영화인들이 서명하며 지지를 나타냈다. 포스트 봉준호법은 ▲대기업의 영화 배급업과 상영업 겸업 제한 ▲특정 영화의 스크린 독과점 금지 ▲독립·예술영화 및 전용관 지원 제도화 등을 골자로 한 법안을 만들어 달라는 영화인들의 요구다. (관련기사 :  "이대론 '포스트 봉준호' 없다" 단호한 영화인들, 왜?)
 
지금까지 보수 정권의 영화계 탄압이나, 블랙리스트 문제 등에 1천 명 이상 영화인들이 목소리를 낸 적은 있으나 영화산업 구조개선을 위한 법제화 요구에 1천 명 이상 영화인들이 참여한 것은 이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산업을 수직계열화하고 있는 대기업과 작업 중인 영화인들은 기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이번에는 사안이 심각한 만큼 적극 참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화산업 구조개선 법제화 준비모임'은 26일 지난 2월 17일부터 2월 25일 정오까지 영화인들의 서명을 진행한 결과를 공개하면서 "이러한 영화인들의 바람을 각 당에 전달하여 당론 채택을 요청하고, 대표들과의 면담을 진행하는 등, 21대 국회에서 영화인들의 요구사항이 반드시 법제화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또한 일부 영화인들은 "지금 당장 대기업과 계약관계가 있어 서명하기 난처하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마음을 같이 하니 양해를 부탁했다"고 덧붙였다. 비록 서명에 동참하지 않은 영화인들도 상당수가 지금과 같은 구조로는 안 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영화산업 구조개선 법제화 준비모임' 대변인을 맡고 있는 김병인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 대표는 "생각보다 많은 영화인들이 참여했다"며 매우 고무적이라는 반응을 나타냈다.
 
조진웅 "정정당당히 기회 나누는 영화 하고 싶다"
 
다수의 영화인들이 서명운동에 동참한 것은 현재의 영화산업 구조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제작, 연출, 촬영, 시나리오, 배우, 독립영화 등등 영화인들은 서명에 동참하며 남긴 글에서 건강한 영화 생태계를 원하는 강력한 바람을 전했다.
 
한 시나리오 작가는 "누구의 마구잡이 돈벌이가 다른 이들의 영혼을 죽이는 행위가 되어서 안 된다"며 "관객은 다양한 영화와 만나고 싶어하는 만큼 이제라도 국제적 위상의 한국 영화를 위해 시스템의 빠른 정비가 필요하고, 국가는 이를 위해 마땅히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밝혔다.
 
기획 분야 업무를 맡고 있는 영화인은 "영화산업이 2000년대 초반에 붕괴된 음악산업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며 "지금은 그래도 희망이 있지만, 이대로 5년만 가도 문제가 심각할 것이고 산업의 붕괴는 아티스트와 작품의 빈곤으로부터 출발하는데, 보통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있는 감독이자 제작자인 나기용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교수는 "영화의 배급과 상영의 독과점을 없애고 관객에게 다양한 영화의 볼 권리를 돌려주자"고 강조했다.
 
수입배급사의 한 관계자는 "대기업 독과점이 심해지면서 흥행 위주로 시장이 형성되어 작품성 및 연기력이 좋은 작품들의 제작과 수입이 많이 위축되어 성장을 저해하고 있다"면서 "대기업 및 독과점 비중을 줄여야 한다"고 밝혔다.
 
배우들 역시 현재의 영화산업 구조에 대한 문제 의식을 서명을 통해 드러냈다. 맹봉학 배우는 "독과점 극장의 소유를 반대한다"고 했고, 강동원 배우는 "전부에 동의하진 않지만, 한국 영화 발전을 위해 서명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중기 배우는 "다양한 영화의 세상은 스크린 독과점 금지로 다시 시작된다"며 서명에 동참했다.

조진웅 배우는 "정정당당히 기회를 나누는 영화를 할 수 있었으면 한다"며 "관객들이 큰(예산) 영화다, 작은 영화다 하는 선입견을 갖고 그로인해 큰 영화가 작은 영화보다 관객을 더 모으는 것을 당연한 결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화이든 공정한 관객의 심판에 따라 올바른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개선이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다른 배우들 역시 "고질적인 시장논리에서 벗어나 더 다양하고 도전적인 한국영화가 되길 희망한다"는 뜻을 나타냈다. 서명에 참여한 배우들은 안성기, 문소리, 박성웅, 설경구, 김의성, 이범수, 정우성 배우 등으로 국내 영화계 여러 배우들이 다수 참여했다.
 
임권택, 정지영, 이장호, 방은진, 김태균, 민병훈, 양익준 감독 등이 참여한 연출 분야 영화인들 역시 스크린독과점 타파와 영화 다양성을 요구하며 법제화의 절박성을 강조했다. <사울의 비밀>을 연출한 이영미 감독은 "지금 구조에선 '제2의 봉준호'는 나올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카트> 부지영 감독은 "한국영화 독과점구조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고 했고, 한국영화감독협회 대표인 양윤호 감독은 "한국영화 101년부터 제대로 된 길을 가야 한다"며 독과점 구조를 제한하는 법제화 지지 의사를 밝혔다.
   
상영관 점유율은 최대 20% 아래로 낮춰야
 
이번 영화인들의 서명은 빈익빈 부익부로 자본력이 좋은 대기업의 비중이 강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영화산업의 미래가 어둡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에서 수상은 했지만 현실적으로 더 이상 봉준호 감독과 같은 사례가 나오기 어렵다는 것에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봉준호 감독의 첫 상업영화로 흥행에 참패했던 <플란다스의 개>와 같은 영화가 지금 같은 구조에서는 투자를 받아 촬영에 들어가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이미경 CJ 부회장이 인사말을 한 것에 대해 일부 영화인들이 불편한 심경을 나타낸 것도 거대자본 중심으로 형성돼 편중이 심화되고 있는 영화산업의 문제를 희석시키고 있다는 인식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영화산업 반독과점 운동을 펼치고 있는 영화계의 방향 전환도 호응을 이끌어 낸 것으로 보인다. 기존에는 대기업의 상영-배급 겸업 금지 요구로 상영관이나 배급사 중 하나를 택할 것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여러 토론회를 거쳐 상영과 배급의 겸업 비율을 제한하는 것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하고 있다.
 
상영과 배급 등을 동시에 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요구는 다른 산업과의 형평성 문제와 기존 법과의 충돌로 인해 국회에서 난색을 보이고 있어 통과가 어려웠다. 지금처럼 겸업을 인정하면서 대신 점유율을 줄이기만 해도, 산업적으로 효과가 나올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생기면서 우회로를 만든 것이다.
 
현재 CJ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3사가 전체 상영관의 97%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배급사도 운영하고 있지만, 상영관의 이익이 상대적으로 크다 보니 완성된 영화를 공급하는 배급사의 손해는 알면서도 감수하고 있는 실정. CJ나 롯데, 메가박스의 배급시장 점유율은 각각 20% 안팎 정도다. 합해도 절반을 조금 넘어서는 수치다.
 
만일 겸업 제한이 가해질경우 한 회사가 차지하고 있는 상영관의 비율을 일정 수준 낮춰야하고, 현재 상영관이 우위에 있는 구조가 배급사와 대등한 구조로 바뀔 수 있게 된다. 서명운동을 주도한 영화계 인사들은 상영관 점유율이 배급사의 점유율 이하로 내려가야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병인 한국영화시나리오작가조합 대표는 개인적인 생각을 전제로 "대기업이 배급에 집중할 것이냐 상영에 집중할 것이냐를 선택해야 할 것으로 본다"며 상영관을 선택할 경우 전체 상영관 비율의 20%를 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