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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순이'다. 잘하는 건 별로 없지만, 누가 집에 오래 있나 시합 같은 걸 한다면 지지 않을 자신은 있다. 독서모임과 도서관, 그리고 도서관 옆 단골 가게에서 장 볼 때 말고는 밖에 나가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런데 요 며칠 그마저도 못하게 됐다. 도서관도 문을 닫고, 독서모임도 모두 취소돼버리고, 단골 가게에도 남아 있는 식재료가 거의 없다.

나흘째, 하루 종일 어린 딸들과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유치원 방학도 일주일 연장됐으니 적어도 열흘은 더 이렇게 지내야 할 것이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다가 막상 나가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리니 집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마음을 다잡고 집에 있는 책이나 읽을 요량으로 책장을 살펴본다. 책등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분이 좋아진다. 그중 자그마한 몸집의 분홍색 책에 시선이 멈춘다.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내 방 여행하는 법>. 몇 해전 사 놓고 아직 읽지 않고 있던 책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이 책을 읽을 적당한 때가 된 것 같다.

42일간의 가택연금

 <내 방 여행하는 법>,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지음, 장석훈 옮김, 유유(2016)
 <내 방 여행하는 법>,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지음, 장석훈 옮김, 유유(2016)
ⓒ 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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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 여행하는 법>의 저자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는 1763년 샹베리(오늘날 이탈리아와 스위스에 인접한 프랑스 사부아 지방의 주도)에서 태어났다. 열여덟 살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해 직업 군인의 길로 들어선 그는 1792년 프랑스 혁명군이 고향 지방에 쳐들어왔을 때,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군대의 장교로서 프랑스군에 맞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 무렵 고향이 프랑스에 점령돼 귀향이 어려워진 그는 토리노에 머물다 1790년에 어떤 장교와 결투를 벌였고, 그 당시에 결투는 불법이었기에 메스트르는 42일간의 가택연금형을 받는다. 그때 그가 집 안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며 쓴 글이 바로 <내 방 여행하는 법>이다.
 
나는 42일간의 내 방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참이다. 이 여행에서 나는 흥미로운 것을 보았고 여정 내내 즐거웠으니 책으로 엮으면 어떨까 싶었다. 자신의 방을 여행하면 거기서 얻는 기쁨이 사람들의 성가신 질시에 잡칠 일도 없으며 무슨 대단한 경비가 들지도 않는다.

(…) 이 땅에 모여 사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특히 방에 죽치고 있는 이들 가운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소개하는 새로운 여행법을 거부할 이는 단 한 명도 없으리라. (11~13쪽)

42일간의 가택연금 기간에 맞춰 이 책도 총 42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첫째 날에는 집에 있는 동안 '내 방'을 여행하며 그 경험을 글로 쓰면 재미있겠다는 모종의 발견에 대해, 둘째 날에는 '내 방 여행의 좋은 점', 셋째 날에는 저자가 '내 방 여행'을 하게 만든 '법과 관습'을 쓰는 식이다.

'의자' '침대' '거울'을 비롯해 함께 살고 있는 하인 '조아네티'와 강아지 '로진',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향한 탐구, 오래된 편지 상자 속 추억을 되짚어가는 여행까지, 책 속에는 '나'의 안과 밖을 두루 관찰하며 쓴 짤막한 글들이 차곡차곡 실려 있다.

매일 보고 만지며, 이고 지고 살고 있지만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물들, 생업에 치여 오랫동안 방치해온 나의 내면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천천히 둘러보다 보면 길게만 느껴졌던 42일이 오히려 아쉽게 느껴질 지경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쓴 1790년대에 비하면 지금 내 방에는 볼거리가 넘친다. TV, 노트북, 휴대폰, 냉장고, 세탁기, 그리고 책장에 꽂힌 수백 권의 책들까지 내 방을 구석구석 '여행'하려면 42일은커녕 1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그 외에 다른 점이 있다면 내 방에는 강아지 대신 고양이가 있고, 시중을 드는 하인은 없고 내가 우리 집의 하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이다.

영혼만큼은 피폐해지지 않도록

저자가 침대와 의자 같은 익숙한 것에서 새로운 통찰을 길어내어 종이 위에 부려놓은 글들도 나의 감탄을 자아냈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저자 자신을 '영혼'과 '동물성'으로 분리해 관찰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였다.

한마디로 우리의 '영혼'은 인간의 행동에 대한 '입법권'을 가지고 있을 뿐이고, 우리의 사지를 움직이는 '집행권'을 가진 쪽은 '동물성'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곧잘 충돌하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성이 말썽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자신의 동물성을 조련' 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의 말대로 성공적으로 나의 '동물성'을 다스릴 수 있게 되면, 나는 내 영혼이 아름답고도 심오한 사유 속을 거니는 동안, 훌륭하게 저녁 식사를 준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양파를 썰면서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 손가락을 베이는 한심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지.

이렇게 가택연금 기간 동안 작가는 자신의 방 구석구석을 뜯어보며, 출근이 없는 방구석 생활을 은근히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지막 42일째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책은 작가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명령에 따라 방 안에서 꼼짝도 못 하게 된, 어쩌면 억울할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 부정적인 생각에 휩싸여 영혼이 피폐해지지 않도록 부단히 애를 쓴 흔적이라는 것을.  
 
상상력이 넘치는 매혹의 세계여, 그대는 자애로우신 그분께서 현실의 인간을 위로하기 위해 보내 준 존재였다. 이제 그대를 떠날 시간이 된 것 같다. 오늘은 내 운명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 내게 나의 자유를 돌려주는 날이다. 오늘 나는 자유다. 아니 다시 철창 안으로 들어간다. 일상의 멍에가 다시 나를 짓누를 것이다. 이제 나는 격식과 의무에 구애받지 않고는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변덕스러운 여신이 있어 내가 경험한 이 두 세계를 다시는 잊지 않도록 해 주고, 다시는 이 위험한 연금에 연루되지 않도록 해 준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184쪽)

온 나라를 뒤덮은 바이러스로 인해 나 역시 외출이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지만, 불평불만과 원망은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내 영혼, 그리고 내 가족과 이웃의 영혼이 피폐해지지 않도록 지금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발굴하고 또 나누면서 차분하게 이 시간을 살아 내야 할 것이다. 부디 이 답답한 상황이 오래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내 방 여행하는 법 - 세상에서 가장 값싸고 알찬 여행을 위하여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지음, 장석훈 옮김, 유유(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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