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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인식론에서 바라봤을 때 청계천·을지로 재개발의 단점을 '소수자에 대한 배려 없음, 조감도의 시선, 빈약한 거버넌스, 성찰성 없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 대안은 기계적인 중립적 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쫓겨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청계천 골목과 가든파이브의 실패

모더니스트 도시계획가들의 한계는 도시에 새 건물을 짓고 도로를 지으면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된다고 믿는 데에 있다(Rittel and Webber, 1973). 그러나 수천 만의 사람이 사는 도시의 문제는 단순히 주택과 인프라 공급만 늘려서는 해결할 수 없으며, 장소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제인 제이콥스는 <미국 대도시의 삶과 죽음>에서 도시를 활력있고 안전하게 만드는 것은 새 건물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마주치는 골목과 교차로, 그리고 그 골목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밝힌다(Jacobs, 1961).

이명박 전 시장이 2003년 청계천 복원사업 과정에서 만든 대체 상가 가든파이브가 실패한 결정적 이유는 청계천의 실생활자인 상인들의 의견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박원순 시장과 서울시 역사도심재생과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청계천 상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도시조직과 산업생태계 간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만 한다.

그런데 지난 1년 간 서울시는 대안 마련을 위해 상인들의 이야기를 듣기 보다 내부에서 대안을 만들고 있다. 당사자들의 목소리 없이 과연 산업생태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청계천·을지로 제조산업생태계가 현재 가지고 있는 생기와 활력이 어디에서 오는지 제대로 관찰하지 않는다면, 가든파이브 사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가든파이브
 가든파이브
ⓒ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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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의 중요성 : 오프쇼어링과 리쇼어링

청계천·을지로의 제조산업생태계를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제조업 자체가 가진 중요성 때문이다. 제조업은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며, 제조업 일자리 1개당 추가로 2.5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낸다(Helper et al., 2012; 정준호, 2016). 또한 대부분 R&D 투자나 신규 특허가 제조업에서 나오기 때문에 혁신의 근간이다(Helper et al., 2012; Stöllinger et al., 2013; 정준호, 2016).

지난 30년간 수많은 선진국의 제조업체들이 싼 인건비를 찾아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로 공장을 옮겼는데 이런 현상을 오프쇼어링(offshoring)이라고 한다. 오프쇼어링 현상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에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제조업이 다른 나라로 빠져나가 고용이 줄고 기술역량이 쇠퇴했기 때문이다.

미국 제조업 고용 규모는 1979년 1940만 명으로 최대였으나 2011년에는 1150만 명으로 최저를 기록했다. 30년 사이 약 750만 명의 제조업 고용이 줄어들었다(정준호, 2016). 결과적으로 오프쇼어링은 미국 중산층을 붕괴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래서 제조업을 다시 국내로 유치하려는 리쇼어링(reshoring)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제조업 고용률이 다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Helper et al., 2012). 그런데 경제학자들은 오프쇼어링으로 단순히 공장과 일자리가 사라지는 수준이 아니라 제조업 생태계를 뒷받침하던 산업 커먼즈(industry commons)도 함께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Pisano and Shih, 2009; Stöllinger et al., 2013).

즉 제조업이 사라지면 제조 혁신에 필요한 노하우, 숙련 노동자, R&D기관, 공급 사슬, 디자인 역량 등 기반시설도 함께 이전되거나 사라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Pisano and Shih, 2009).

청계천·을지로 산업생태계의 특성

청계천·을지로 제조산업단지의 특성은 제조와 유통이 결합한 구조, 수리업의 발달, 숙련 노동자 밀집, 긴밀한 협력 체계, 신속함과 저렴함, 맞춤 생산과 유연 생산, 지리적 요건으로 볼 수 있다.
 
맞춤형 제조를 하고 있는 입정동 대우목형. 입정동에 딱 하나 남은 목형 공장이다.
 맞춤형 제조를 하고 있는 입정동 대우목형. 입정동에 딱 하나 남은 목형 공장이다.
ⓒ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최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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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청계천·을지로에서는 근거리에서 부자재 및 공구 구입이 가능하고, 이와 동시에 청계천·을지로에서 만들어진 물품들을 유통할 수 있는 구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속하고 저렴한 제조가 가능하다.

두 번째는 수리업이다. 청계천 지역에서 유통, 제조, 수리를 겸업하는 점포가 20% 이상을 차지한다. 이들은 각종 의료기기, 화학공학 실험기기, 카메라, 인쇄기기, 미싱기기, 금속 세공 기기를 수리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만약 이들이 사라진다면 도심산업에 차질이 생길 뿐만 아니라 각종 대학과 연구소의 연구 역량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세 번째는 노동자의 숙련도이다.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가 실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상인들이 청계천에서 일한 경력이 평균 33년으로 나타났다(Park, 2019). 이런 정도의 숙련노동자가 1만 명 이상이 집적되어 있는 장소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한 서울시 관계자는 상인들이 고령화됐으니 공장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이가 든 만큼 노하우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숙련 노동을 어떻게 전수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넷째, 긴밀한 협력체계이다. 청계천·을지로 산업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특이한 부분은 바로 협력이다. 청계천·을지로에는 다양한 기술을 가진 노동자들이 있으며, 같은 기계를 써도 특화된 기술이 다르다. 노동자들은 서로 의논하면서 작업하며, 주변 상인들에게 일을 나눠주는 중간 매니저 역할도 수행한다. 이러한 수평적 협력 관계는 대기업 중심의 상하 구조로 창의력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나라 산업 구조를 극복하기 위한 사례로 집중 연구를 수행할 필요가 있다(장웅성, 2017).

다섯 번째, 다양한 기술을 보유한 공장과 부자재 유통이 한 지역에 밀집되어 있기 때문에 빠르게 생산이 가능하고 저렴하게 제조할 수 있다.

여섯 번째, 청계천과 을지로에서는 대형 공장과 다르게 단 한 개의 기계나 제품도 맞춤형으로 만들 수 있다. 점포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오히려 맞춤 생산이 가능하다. 의료기계나 각종 생화학·공학 실험기계, 예술가들의 창작품은 보통 한두 개 혹은 100개 미만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큰 공장에서는 최소 주문수량을 1만 개 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 다품종 소량 생산을 해야하는 전문업에게는 청계천·을지로의 제조업 플랫폼이 필수적이다. 또한 장인들이 권위적이지 않고 새로운 것에 열려 있어 고객의 의중대로 유연한 맞춤 제작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청계천의 도시조직과 형태이다. 청계천·을지로는 제조업 클러스터인 동시에, 조선시대 후기 골목 구조가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이다. 다양한 모양의 필지와 골목은 공업사들과 공구상들이 서로 필요한 것들을 주고 받는 커다란 하나의 제조업 플랫폼이다.

특히 청계천·을지로 골목의 기능이 가든파이브와 같은 아파트형 공장과 가장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다. 청계천·을지로에서 골목은 유통로이자, 상인들간의 만남의 장소이자 동시에 작업공간이다.

가게는 협소하지만 골목을 이용해서 가게 폭보다 넓은 크기의, 3-4m보다 길고 100kg이 넘는 물건도 만들수 있으며, 크고 무거운 부자재도 가게 바로 앞에서 하루에 몇 번이나 싣고 내릴 수 있는 유통의 혈관으로 작용한다. 서울시가 마련하는 대안에 청계천·을지로골목에 대한 이러한 특수성과 지리적 특징이 잘 반영되지 않는다면 가든파이브처럼 실패할 수밖에 없다.

 
세운3구역 및 수표지역 소상공인 주 거래업체 연관성 분석
 세운3구역 및 수표지역 소상공인 주 거래업체 연관성 분석
ⓒ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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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에서 상인들에게 가든파이브에 가지 않거나 갔다가 돌아온 이유에 대하여 조사를 했더니, 상인들은 그 이유를 "상권이 없음,  프레스, 칠, 주물같은 종목이 들어갈 수 없음, 부자재 파는 곳이 없음, 수리하는 곳이 부족함, 산업용 엘리베이터가 부족해 부자재를 싣거나 배달하려면 최소 한시간을 기다려야 함, 공간이 협소해 큰 물건을 만들 수 없음, 협업이 잘 안됨"으로 꼽았다(Park, 2019).

이명박 전 서울시 시장은 가든파이브를 짓기 위해 상인들을 많이 만났다고 주장하지만, 상인들의 이야기로는 당시 서울시가 소수의 상인만 만났을 뿐 제대로 의견을 수렴하지 않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원래는 상하차가 가능한 램프 구조로 만들기로 했지만 마지막에 일반 아파트형으로 디자인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박사들이 디자인을 바꿔 버렸어.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우리말을 안들었지(윤OO)" 

청계천·을지로를 4차 산업의 혁신 기반으로

4차 신산업(전기차, 로봇, 바이오 헬스, 항공·우주, 에너지 신산업, 첨단 신소재, 차세대 디스플레이 등)의 발전과 지속가능한 기업 생태계 혁신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플랫폼'의 제공이다. 여기서 플랫폼은 생산하는 가치를 서로 보완하고 연결시켜주는 매개체이자 공통의 연결층이다(정진섭 et al., 2019).

즉 청계천·을지로의 산업생태계의 상부구조는 작은 공업사와 유통상가가 각각 자신의 물건을 판매하고 주문제작하지만, 하부구조는 개발자, 디자이너, 예술가, 메이커, 연구자, 학생들에게 부품을 제공하고 맞춤형 제조를 해주며 노하우를 공유하는 산업 공공재 역할을 한다. 

청계천·을지로는 4차 산업 혁명의 주요 덕목인 지역화(regionalization), 개인 맞춤형 생산(personalized production), 유연 생산(flexible manufacturing)을 자연 발생적으로 수행해왔다.

청계천·을지로의 산업생태계가 사라지는 것은 단순히 전통 제조업의 소멸이나 소수 숙련 기술공의 소멸이 아니다. 오프쇼어링의 사례에서 보듯 제조업체 군집이 사라지면 산업 커먼즈(industry commons) 즉, 제조 혁신에 필요한 노하우, 숙련 노동자, 부자재 유통 및 완제품 유통, 수리업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Pisano and Shih, 2009; Stöllinger et al., 2013).
세운도시재생사업에서 공간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주)메타기획컨설팅은 <거점공간을 통한 세운상가군 산업경제 활성화 방안 마련을 위한 컨설팅>을 통해 “도심창의제조산업의 혁신지”라는 산업경제적 비전, 전략, 과제를 도출했다.
 세운도시재생사업에서 공간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주)메타기획컨설팅은 <거점공간을 통한 세운상가군 산업경제 활성화 방안 마련을 위한 컨설팅>을 통해 “도심창의제조산업의 혁신지”라는 산업경제적 비전, 전략, 과제를 도출했다.
ⓒ (주)메타기획컨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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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서는 청계천에서 생산하고 있는 제조품들을 상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참고문헌

Helper, S., Krueger, T., Wial, H., 2012. Why does manufacturing matter? Which manufacturing matters? A policy framework. Metropolitan Policy Program at Brookings.
Jacobs, J., 1961. 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 Random House‎, New York.
Park, E., 2019. Feminist Grassroots Insurgent Planning for Cheonggyecheon-Euljiro Area : Urban Regeneration by Preserving the Industrial Eco-system. 서울대아시아연구소.
Pisano, G.P., Shih, W.C., 2009. Restoring american competitiveness. Harvard business review 87, 114–125.
Rittel, H.W., Webber, M.M., 1973. Dilemmas in a general theory of planning. Policy sciences 4, 155–169.
Stöllinger, R., Foster-McGregor, N., Holzner, M., Landesmann, M., Pöschl, J., Stehrer, R., Stocker-Waldhuber, C., 2013. A Manufacturing Imperative in the EU: Europe's Position in Global Manufacturing and the Role of Industrial Policy. Vienna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 Studies Vienna.
장웅성, 2017. 상생형 제조혁신 플랫폼을 통한 새로운 산업기술 발전방안. KIET 산업경제 11월호.
정준호, 2016. EU의 스마트 전문화 및 미국의 제조업 르네상스 정책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한국 지역산업정책 방향. 한국경제지리학회지 19, 782–798.
정진섭, 조연성, 최돈승, 2019. 바람직한 산업 생태계 구축을 통한 지속가능한 수출증진 전략. 경영컨설팅연구 19, 97–107.
 
은선  /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연세대학교 도시공학과 박사수료,
을지로3가에서 리슨투더시티를 동료들과 운영하고 있다. 도시를 페미니스트 인식론에서 바라볼 때 전환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태그:#세운도시재생, #청계천을지로재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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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는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수표도시환경정비사업 등의 이름으로 재개발 될 위기에 처한 청계천-을지로를 지키고자 2018년 12월 결성된 예술가, 디자이너, 메이커, 연구자, 시민들의 모임입니다. 우리는 도시재생이란 이름의 재개발로부터 이 곳의 가치를 기록하고 알리고 지킬 수 있도록 상인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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