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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상 도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코로나19가 급격히 확산된 2월 중순 이후로 일터에 출근하는 시간 이외에는 대부분 집에서 보내는 중이니 말이다.

거의 모든 식사를 회사 식당이나 친구들과의 약속으로 해결하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요즘엔 매끼의 식사를 직접 해먹는 중이다. 때론 귀찮은 마음에 그냥 건너뛰고 싶기도 하지만, 제대로 챙겨 먹지 않으면 혹시라도 건강에 영향이 있을까 두려워 꼼꼼하게 챙기려 애를 쓴다.

코로나19가 발병하기 이전만 해도 집에서 먹는 식사라고는 아침에 데워먹는 두부 반 모에 곁들인 삶은 달걀 한 개가 전부였다. 출근 준비를 하며 전자레인지에 두부를 데우는 3분이면 식사 준비는 간단하게 끝이 났다.

그런데 요즘엔 점심에 먹을 도시락을 준비해야 하고, 퇴근 후에는 저녁 식사를 챙기는 데 1시간 정도를 쓰고 있다. 게다가 주말에는 주중의 점심 도시락을 위한 밑반찬까지 만드느라 서너 시간을 주방에서 보내야 한다.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집을 떠나 살았으니 그동안 내게 식사는 '사 먹는 것'이었는데, 꽤나 오랜만에 요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사회적 거리두기' 덕분에 생긴 큰 변화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퇴근길 장 보기가 필수다. 냉장고엔 엄마가 보내주신 김치가 넉넉하지만, 매번 김치만 먹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집에 있는 재료를 고려해 근처 시장에서 신선한 채소나 고기, 해물 등을 신중하게 고르는 시간이 점점 즐거워진다. 그도 그럴 것이, 퇴근 후의 짧은 장 보기가 아니면 외출이라고 할 시간이 전혀 없으니 이 시간을 충분히 즐겨야 한다는 부담까지 느껴진다. 

하루는 장 보기를 하던 중 동네의 단골 책방에도 잠깐 들렀다. 신간 중에 끌리는 책이 있는지 찾아보고 싶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음식 전문 작가이자 역사가인 비 윌슨의 <식사에 대한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당근이며 양배추를 가득 챙겨들고 있던 참이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우리의 식탁은 왜 점점 가난해질까
 
엄마가 보내주신 봄 부추와 오징어 한 마리를 넣어서, 부추전을 부쳤습니다. 부추 한 단을 다듬고 오징어를 데쳐서 썰어 넣는 과정들을 거쳤더니, 토요일 하루가 훌쩍 지나갔네요.
▲ <식사에 대한 생각>을 읽으면서, 부추전을 부쳤습니다.  엄마가 보내주신 봄 부추와 오징어 한 마리를 넣어서, 부추전을 부쳤습니다. 부추 한 단을 다듬고 오징어를 데쳐서 썰어 넣는 과정들을 거쳤더니, 토요일 하루가 훌쩍 지나갔네요.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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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문제의식은 명확했다. 책의 표지에도 쓰인 것처럼 '세계는 점점 더 부유해지는데, 우리의 식탁이 갈수록 가난해지는' 이유를 찾아가는 고민의 기록이다.

코로나19가 의도치 않게 선물해준 시간 덕분에 요리를 할 수 있는 여유와 필요를 갖게 된 지금, 이런 고민을 나누게 되어 다행이다. 만약 지금이 아니었다면, 내가 직접 내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요즘이 아니었다면, '좋은 얘기지만, 난 바빠서' 하며 그냥 넘겨버렸을 테니 말이다.
 
물과 공기가 그렇듯 식품도 5분마다 새롭게 바뀔 필요가 없다. 어쩌면 오늘날 식품 트렌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쁜 현대의 생활 속에서 어떻게 즐거움과 건강을 모두 챙기며 규칙적인 식사를 할 수 있는가 같은 더 근본적인 문제에서 눈을 돌리게 만든다는 것일 수 있다. 기초적인 사실을 무시하면서 식단 관련 질환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것에만 매달리는 데에는 다소 불안정하고 정신없는 면이 있다. 이는 식의 변화를 너무 많이 경험해서 가끔은 무엇이 음식인지조차 잊은 것처럼 보이는 세대의 행동이다. (291~292쪽)

저자에 의하면, 인류의 식생활은 크게 다섯 단계의 큰 변화를 겪어왔다. 첫 번째 단계는 원시의 수렵·채집이었고, 두 번째 단계가 정착지에서 농업 생산에 기반을 둔 식생활이었다. 인류가 농업에 의존해 식량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영양 결핍성 질환이 발생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농업 생산성을 늘리고 육류 생산을 다양한 방식으로 산업화하면서 세 번째 단계로 접어들었다.

저자는 이 시기를 '기근 감퇴'의 시기라고 명명했다. 다채롭고 풍요로운 식재료가 공급되기 시작했으나 다양한 '나쁜 음식' 또한 공급되기 시작한 시기라는 것이다. 기근을 다스리고 풍부한 식재료를 공급하기 위해 산업화된 농업이나 축산업은, 지금까지도 다양한 가축 전염병이나 유전자 조작식품 등의 논란을 가져왔다. 몇 년 전 구제역이나 조류독감으로 수많은 생명을 생매장해야 했던 기억이 겹쳐졌다.

그렇게 인류는 '세계의 음식이 동질화'되는 네 번째 단계로 이동했다. 다섯 번째 단계는 식생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행동의 변화' 단계라고 구분한다.

지구상의 국가들은 국가의 발전 수준에 따라 서로 다른 단계의 식문화를 수용하고 있는데, 소득 수준이 낮고 개발이 뒤처진 나라일수록 세 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게 되며 나쁜 식생활에 의한 다양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설명한다. 식생활 문화에서도 불평등이 심화되고, 약자들은 계속 더 약해져야 하는 악순환이 씁쓸하다. 
 
가끔은 뒤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105쪽)

저자는 1920년대 독일 북서부의 베스트팔렌 지역 직조공들에게 허용됐던 90분의 점심시간을 부러워하고, 할머니 시대부터 전해내려오던 전통적인 식생활을 그리워한다. 맛 좋고 당도도 높았던 '그로미쉘' 바나나가 파나마병으로 멸종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필요한 열량만 채워주는 정제 설탕이나 '맛없는' 대두유의 사용량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가난한 가정에서 아이들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영양 고려 없이 튀겨진 과자를 쥐여주는 것을 슬퍼한다. 돌려서 말할 것도 없이, 인류의 소득은 높아졌으나 우리의 식생활은 점점 더 '형편없는' 것들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가난한 나라일수록 좋은 것보다는 '값싸고 배부른 것'을 찾는 단계에 머물러 있기 쉬우니, 안타까울 뿐이다.

일 년의 시간이 통째로 오르는 엄마의 밥상
 
지난 2월 15일 고향에 갔을 때, 챙겨주신 아침상입니다. 고향의 산과 땅이 겪어내었을 모든 시간과 엄마의 정성이 가득 담겨있는 고마운 밥상이네요. 얼른 지금의 상황이 해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엄마의 충만한 밥상이 그립네요.  지난 2월 15일 고향에 갔을 때, 챙겨주신 아침상입니다. 고향의 산과 땅이 겪어내었을 모든 시간과 엄마의 정성이 가득 담겨있는 고마운 밥상이네요. 얼른 지금의 상황이 해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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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갈 수 없지만, 매달 고향집을 찾았다. 엄마는 나를 위한 밥상과 함께 항상 거기에 계셨고, 엄마의 상차림은 나쁜 음식으로 가득 채워진 나의 허기를 포근하게 달래주곤 했다. 정성을 가득 담아 매년 가을에 담근 김장 김치가 있고, 가끔 운이 좋으면 좋은 제철 채소로 만든 겉절이를 만날 수도 있다. 여기에 제철에 밭에서 수확한 채소나 나물을 곁들이고, 가을 동안 부지런하게 짧은 햇살에 말린 무말랭이나 봄에 산에서 힘들게 수확한 고사리나물이 함께 오르기도 한다.
     
냉동실엔 항상 갈치나 고등어, 아니면 염장된 조기가 보관돼 있으니, 엄마가 상을 차릴 때면 항상 생선의 바다 냄새가 식욕을 끌어올린다. 우리가 집에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엄마는 읍내 농협에서 사 온 국거리용 양지로 밤새 끓여낸 미역국이나 무, 감자 등을 넣은 고깃국을 준비해 놓으신다.

그러니 엄마의 상에는 항상 한 해의 시간이 통째로 들어 있고, 고향의 자연과 햇살이 그대로 담긴다. 무엇인가를 게걸스럽게 밀어 넣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던 허기는 이곳에서 따뜻하게 보상받았다.

"아침에 시장 갔다 왔어!"
"왜? 어디 돌아다니지 말라니까!"
"주꾸미 1킬로 부쳤어. 요즘이 주꾸미 철이잖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제철 주꾸미를 혼자 드시기 아쉬우셨는지, 잊지 않고 택배를 보내셨단다. 매년 이맘때면 엄마랑 같이 먹었던 주꾸미를 혼자 먹어야 하니 아쉽긴 했지만, 감태랑 오징어, 봄의 부추까지 꼼꼼하게 챙겨주신 택배는 '코로나 블루'로 우울해진 마음까지 환하게 만들었다. 급해진 마음으로 가스불 위에 물을 올려놓으며 바로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싱싱한 주꾸미는 끓는 물에 데쳐서 먹는 게 제일 좋다. 다리는 조금 일찍 잘라내어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고, 머리는 좀 더 익혀서 꽉 들어찬 알까지 맛있게 챙겨 먹으면 된다. 제철의 재료만이 갖는 생기까지 가득 채워지니, 다른 반찬은 준비하지도 못했는데 든든하다. 코로나19가 빼앗아간 일상이지만,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가 주는 온기는 한결 더 간절하고 애틋하다. 나는 매일의 밥상에서 엄마가 그립다.
 
엄마가 보내주신 택배에 제철 주꾸미가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끓는 물에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만 먹었을 뿐인데, 기운이 생생하게 들어오네요.
▲ 봄철 주꾸미로 차린 저녁상 엄마가 보내주신 택배에 제철 주꾸미가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끓는 물에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만 먹었을 뿐인데, 기운이 생생하게 들어오네요.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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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하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 장 앙텔므 브리앙 샤바렝 (프랑스의 미식가, 법률가이자 <미식 예찬>의 저자)

먹는 것은 중요하다. 동물은 먹는 것을 통해 에너지를 얻고, 생존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의식동원'이라는 개념으로 먹는 것과 의약을 동일시했던 우리의 전통적인 식문화에 의하면, 좋은 것을 잘 챙겨 먹는 것으로 병을 다스리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시간의 효율성이 중요해지면서 식사는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한 행위로만 여겨졌고,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은 다른 행위들에 우선순위를 빼앗겼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코로나19의 혼돈이 의도치 않게 허용한 시간은, 그동안 우리가 미뤄놓았던 가치를 하나하나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라고 말하는 듯하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만남, 소중한 친구들과의 대화, 그리고 내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 여유 같은 것들 말이다. 재앙과도 같은 힘든 시기를 견디고 있지만, 벼락같은 깨달음엔 감사할 수밖에 없다.
 
우리 식생활은 너무 단기간에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하지만 음식은 늘 그렇듯 여전히 우리 삶의 중심이다. 요리는 그 사실 존중하는 방법이자, 오늘날의 식문화가 가진 과도함과 모순에서 벗어날 방법이다. 매일 매 끼니를 만들어 먹지는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요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현대적 삶에 내재된 광기의 해독제가 된다. 이메일에 답장을 못할 수도 있다. 스피닝 수업을 까먹을 수도 있다. 메신저 알람이 저 멀리서 울릴 수도 있다. 그냥 두자. 식사 준비가 끝났으니까. (418쪽)

내가 먹고 싶은 건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능력

마지막으로 저자는 에필로그를 통해 '현명하고 건강한 식사를 위한 13가지 전략'을 소개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여유가 생겼다면, 한 번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소개한 전략들 중 손쉽게 시도할 수 있는 것들을 몇 개 옮기면서 글을 마친다.

1. 새로운 음식을 오래된 접시에 담아 먹자 : 일회용 그릇에 아무렇게나 담지 말고, 예쁜 그릇에 잘 차려서 드시는 것은 어떨까요?

2. 물이 아닌 것을 물처럼 마시지 말자 : 가공 주스나 탄산음료 대신에 물을 마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요즘엔 따뜻한 차를 마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3. 간식보다는 식사에 집중하자 :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나면, 오후 3시쯤 '당 충전'이 필요하다는 신호가 오던데 참아봐야겠습니다.

4. 음식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자 : 이 이야기가 가장 매력적이었어요. 음식을 요리하거나, 잘 차려놓은 식탁에서 식사를 음미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우리는 (1920년대의 직조공처럼) 90분 동안 점심을 먹을 수는 없겠지만, 먹는 것에만 집중하는 시간은 가져도 되니까요.

5.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요리하는 법을 배우자 : 요리는 직접 해보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좋아하는 요리 몇 개라도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든든한지 아시죠? 어디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함께요. 

식사에 대한 생각 - 세계는 점점 더 부유해지는데 우리의 식탁은 왜 갈수록 가난해지는가

비 윌슨 (지은이), 김하현 (옮긴이), 어크로스(2020)


태그:#오늘날의 책읽기, #식사에 대한 생각, #요리, #음식, #오래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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