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각 방송국의 장르별 프로그램 방송시간은 마치 불문율처럼 정해져 있었다. 월화와 수목 오후 10시엔 드라마를 편성하고 11시대엔 예능이나 시사 고발프로그램이 방송되는 식이다. 물론 민영방송국인 SBS가 1991년 12월 개국과 함께 8시에 뉴스를 편성하는 파격을 보이긴 했지만 드라마와 예능의 편성시간은 지상파 3사가 거의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케이블 채널과 종편 방송국의 개국으로 채널이 다양해지면서 편성 불문률은 깨진 지 오래다. 실제로 현재 MBC는 월화 드라마와 수목드라마를 8시 <뉴스데스크>가 끝난 밤 9시대에 배치했고 tvN의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목요스페셜'이란 이름으로 일주일에 하루만 방송되고 있다. SBS와 JTBC가 '금토드라마'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시간대에 시청률 경쟁을 하는 것은 시청자들에게 더 이상 낯선 그림이 아니다.

지난 12일 종영한 <내일은 미스터트롯>의 초대박으로 개국 후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는 TV조선에서도 봄을 맞아 조금은 새로운 실험에 도전한다. MBC와 SBS에서 뉴스가 방송되고 KBS에서는 주말 드라마가 방송되는 시간에 과감하게 일요 예능 드라마 <어쩌다 가족>을 편성한 것이다. 주말 저녁 착한 웃음으로 시청자들의 월요병을 날리겠다는 TV조선의 도전은 과연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치트키' 김병욱 사단도 먹히지 않았던 TV조선의 시트콤 도전사
 
 김병욱 사단이라는 '치트키'를 쓴 <너의 등짝에 스매싱>은 엄현경의 러브라인이 유일한 재미였다.

김병욱 사단이라는 '치트키'를 쓴 <너의 등짝에 스매싱>은 엄현경의 러브라인이 유일한 재미였다. ⓒ TV조선 화면 캡처

 
한국 방송에서 시트콤은 90년대 초,중반 <LA 아리랑>을 시작으로 <오박사네 사람들>, <남자셋 여자셋>, <순풍산부인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세 친구>, <논스톱>, <하이킥> 시리즈 등이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하이킥> 시리즈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 시청률과 화제성에서 전작에 크게 미치지 못하면서 지상파에서 시트콤이라는 장르는 자연스럽게 그 힘을 잃고 말았다.

지상파에서 시트콤은 빠르게 침체됐지만 이와 별개로 케이블TV와 종편에서는 꾸준히 시트콤을 제작·편성했고 이는 TV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2011년 12월에 개국한 TV조선은 개국 6개월 만에 '골드에이지 시트콤'을 표방한 <웰컴 투 힐링타운>을 편성했다. 개국 초기 TV조선의 주 시청층이었던 장년층을 겨냥한 시트콤으로 개그맨 임하룡과 가수 송대관, 7~80년대 <얄개> 시리즈로 유명했던 이승현 등이 출연했다.

하지만 장년층을 타깃으로 만든 시트콤 <웰컴 투 힐링타운>은 방영기간 내내 0.2~0.3%대의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하다가 한 달도 채 가지 못하고 종영됐다. <웰컴 투 힐링타운>의 부진 이후 TV조선은 한 동안 시트콤을 제작·편성하지 않았다. 그리고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절치부심하던 TV조선은 2017년12월 김병욱 사단이라는 '치트키'를 꺼내 들며 명예회복을 선언했다.

TV조선이 5년 만에 선보인 두 번째 시트콤은 <순풍 산부인과>와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하이킥> 시리즈를 만들었던 김병욱PD의 제작진의 <너의 등짝에 스매싱>이었다. 비록 김병욱PD는 연출 대신 크리에이터로만 작품에 참여했지만 <하이킥>의 모든 시즌에 작가로 참여했던 이영철 작가가 대본을 쓰고 박영규, 박해미, 권오중 등 김병욱 시트콤의 주역들이 대거 출연하며 큰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결과는 과거와 달랐다. <너의 등짝에 스매싱>은 높았던 기대와 달리 방영 기간 내내 한 번도 시청률 2%의 벽을 넘지 못했고 최종회 시청률은 1%도 채 되지 못했다. 특히 김병욱 시트콤에서 볼 수 있었던 특유의 신선하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탄생하지 못하면서 시청자들의 혹평을 피하지 못했다. 결국 TV조선은 <너의 등짝에 스매싱>을 끝으로 다시 시트콤 편성을 중단했다.

'예능 드라마' 표방한 <어쩌다 가족>, '착한 웃음' 가능성 보였다
 
 <닥치고 패밀리> 이후 7년 만에 드라마로 복귀한 이본은 <어쩌다 가족>에서 한결 편안한 연기를 선보였다.

<닥치고 패밀리> 이후 7년 만에 드라마로 복귀한 이본은 <어쩌다 가족>에서 한결 편안한 연기를 선보였다. ⓒ TV조선 화면 캡처

 
사실 시트콤의 부진은 비단 TV조선 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상파에서는 이미 2010년대 들어 시트콤을 거의 제작하지 않았고 종편이나 케이블TV의 시트콤들도 하나 같이 부진을 면치 못했다. 2018년 JTBC에서 방송된 <으라차차 와이키키> 정도만 낮은 시청률과 별개로 입소문이 퍼지면서 작년 시즌2가 제작됐을 뿐이다. 따라서 TV조선의 <어쩌다 가족>은 방송가에서도 꽤나 신선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9일 첫 방송된 <어쩌다 가족>은 성동일과 진희경 부부가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연을 맺은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겪는 여러 이야기를 통해 웃음을 주는 작품이다. TV조선에서는 <어쩌다 가족>의 장르를 '시트콤'이 아닌 '예능 드라마'라고 지칭했다. 실제로 <어쩌다 가족>은 2~30분의 짧은 호흡으로 에피소드를 풀어내는 기존의 시트콤과 달리 주1회 편성에 회당 1시간이라는 제법 긴 호흡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시트콤 출연 경력은 썩 많지 않지만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발군의 코믹 연기를 자랑하는 성동일을 중심으로 수다스러운 주부 연기에 도전하는 진희경, 김병욱PD와 함께 작업한 적이 있는 오현경, 김광규, 서지석, 7년 만에 안방극장으로 돌아온 이본 등이 함께 한다. 또한 젊은 시청자들을 공략하기 위해 걸그룹 CLC의 권은빈과 보이그룹 펜타곤의 여원, <학교2013>으로 얼굴을 알린 길은혜 같은 신예들도 출연한다.

29일 첫 방송에서는 유학을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 돌아온 성하늘(권은빈 분)의 사연과 성동일, 진희경이 부부가 되는 과정, 그리고 평소에는 철두철미하지만 술만 마시면 돌변하는 이본의 반전성격이 소개됐다. 특히 막장드라마였다면 극 후반부에나 공개됐을 성하늘 출생의 비밀이 1부 마지막에 공개되면서 시청자들을 신선한 혼란에 빠트렸다. 막장스토리 따위는 다룰 생각이 없다는 제작진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어쩌다 가족>은 1.9%라는 그리 높지 않은 시청률로 출발했다. 하지만 애초에 <어쩌다 가족>의 경쟁상대는 방송 2회 만에 시청률 26.3%를 찍은 KBS의 새 주말드라마 <한 번 다녀왔습니다>가 아니다. 일요일 저녁 건강하고 착한 웃음으로 가족 시청자들에게 잔잔한 웃음을 안겨줄 수 있다면 <어쩌다 가족>은 시청자들의 일요일밤을 충분히 넉넉하게 해줄 것이다.
 
 <어쩌다 가족>은 1회 말미에 외동딸 출생의 비밀이 나오면서 막장으로 가는 길을 사전에 차단했다.

<어쩌다 가족>은 1회 말미에 외동딸 출생의 비밀이 나오면서 막장으로 가는 길을 사전에 차단했다. ⓒ TV조선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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