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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서울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1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열렸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와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이번 회의는 '동아시아 역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제로, 임시정부 연구의 권위자들이 주요 패널로 참석하여 그동안의 학술적 성과를 발표했다.
 
기조 발제를 맡은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기조 발제를 맡은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 강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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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의 '20세기 초 동아시아 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표를 시작으로, 한상도 건국대 사학과 교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 근현대사',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일본 근현대사', 윤대영 서강대 책임연구원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베트남 근현대사' 등의 순서로 발표가 이뤄졌다.

특히 이번 학술회의는 그동안 한국사의 범주 안에서만 다뤄졌던 임시정부사(史)를 중국·일본·베트남 등 주변 국가와의 관계에 주목, 폭 넓은 시각으로 조망했다.

중국 정부, 한국의 독립에 호의적이지 않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과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3년 11월 27일 열린 카이로회담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의 거듭된 요청을 받은 장제스가 '한국의 독립'을 지속적으로 건의하여 관철시켰다는 사실 역시 임시정부의 중요한 역사적 성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중국 국민당이 임시정부에 매우 호의적이었으며, 크고 작은 도움을 베푼 '은인'이라는 점은 역사적 통념이다.
 
발제를 하고 있는 한상도 교수
 발제를 하고 있는 한상도 교수
ⓒ 강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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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날 발제를 맡은 건국대 사학과 한상도 교수는 "백범 김구는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정부의 홀대와 경시에 대해 서운함과 분노를 느꼈다"며 중국 정부가 한국 임시정부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였음을 밝혀냈다.

한 교수는 그 첫 번째 근거로 김구의 생전 발언 등을 기록한 <백범김구선생언론집>에 수록된 구절을 지목했다.

"중국 정부에 소속되어 있는 각 기관들은 시종 임시정부의 명의를 쓰지 않으며, 공개적으로 왕래하지 아니하는데 7•7항전(중일전쟁) 이전에는 왜국(일본)과의 교섭에서 분쟁이 우려될 수 있지만, 항전이 시작된 후에도 의식관계라 하여, 정부의 명의를 쓰지 않고 있다. …(하략) …"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공식 명칭을 쓰지 않는 것에 대해 임시정부 측에서는 상당히 불쾌해했다는 기록이다. 개인 차원의 동정이나 지원과는 별개로, 국익 및 전략적 관점에서 접근할 때 중국 당국과 임시정부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면서 한 교수는 "중국 언론은 임시정부를 한인을 대표하는 정부로 간주•평가했고 중국 정부는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음에도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중국 국민당, 공산당 토벌에 광복군 동원 계획 세워"

1939년 8월 당시 국민당 정부는 중국 쓰촨성(四川省)에서 소집된 '한국독립운동통일7단체회의'를 주관•지원했는데, 국민당 조직부장이었던 주자화(朱家驊)는 이런 회고를 남겼다.

"(상략) 나머지 5개 단체가 진정으로 단결하여 공산당의 음모에 저항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아울러 좌경적인 성향을 지닌 한인들을 감화시켜 더 이상 공산당에 이용되지 않도록 함으로써 비로소 한인독립운동진영 내부가 안정될 수 있었다."

한 교수는 1944년 10월 8일, 쑨커(孫科) 이사장이 중한문화협회 성립 2주년 기념식에서 한 발언도 꼬집었다.

"이번 세계대전이 동맹국의 승리로 마감됨으로써, 한국은 반드시 독립국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각국은 속히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여 대일작전 역량을 강화시키도록 하고, 무장한 한국 인민이 중국의 반공에 동참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한국광복군
 한국광복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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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민당 정부는 호시탐탐 공산당 토벌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 교수는 "여기서 '한국 인민'은 한국광복군을 염두에 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며 "항일전쟁 종료 후 중국 공산당 토벌전에 광복군을 비롯한 한인무장역량을 동원하는 방안을 구상했던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 정부 목표, 한반도 영향력 행사하면서 소련 배제하는 것"

국민당 정부는 끝끝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광복군 창설과 카이로선언에서의 '한국 독립 약속' 등 직·간접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 교수는 이러한 배경에 대해서도 '전략적 이익'을 고려한 중국 정부의 복잡한 속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중국 정부의 목표는 어떤 형태로든지 한반도를 중국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 두면서, 특히 소련의 팽창적 영향력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 교수는 "(중국은) 한인독립운동진영을 중국 항일전쟁의 파트너로 설정한 다음, 그 구심점으로서 임시정부의 위상을 강화시키고자 했다"며 "이와 같은 임시정부 중심의 단결과 통합 시도는 종전 후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위한 구상과도 연계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즉, 임시정부를 장차 친중(親中)세력으로 양성함으로써 종전 후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꾀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산은 냉전체제를 배경으로 한반도에 미·소 군정체제가 수립되고, 설상가상으로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내전이 시작되면서, 신기루가 되고 말았다.

한 교수의 발표는 그동안 임시정부와 한국독립운동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중국 국민당의 이면을 보여줬다. 한편으로 당시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의 냉대와 멸시 속에서 얼마나 힘겹게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청중없이 진행되는 학술회의 준비 현장
 코로나로 인해 청중없이 진행되는 학술회의 준비 현장
ⓒ 강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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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술회의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청중 없이 패널만 참석한 채, 유튜브 생중계로 진행됐다. 유튜브로 행사를 지켜본 대학원생 김경준 씨는 "중국 정부가 한국 독립을 후원한 이면에는 당연히 자신들의 전략적 이익을 고려한 속셈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광복군을 국공내전에 활용할 생각이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며 "하마터면 남의 나라 전쟁에 한인 청년들이 또다시 동원되는 비극을 겪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마저 돋는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이런 가운데서도 끝끝내 중국 정부를 달래고 설득해가며 카이로선언을 이끌어 낸 임시정부의 성과가 더욱 빛이 나는 것 같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번 회의에서 축사를 맡은 김거성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역시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우리 선열들은 지금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 민족의 활로를 열어나갔다"며 "이번 계기를 통해 동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의 역사를 아름답게 열어갈 수 있는 지혜를 선열들로부터 배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학술회의 생중계 영상은 기념사업회 공식 유튜브(https://youtu.be/MdvQkaF8Guo)를 통해 다시 볼 수 있다.

태그:#대한민국임시정부, #장제스, #중국, #국민당, #한국광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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