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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 멜버른에서 온라인 원격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세상의 풍경을 바꾸어 놓았듯, 원격 수업은 호주 가정의 풍경을 완전히 새롭게 리셋했다.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는 화상 수업 시간을 학년별로 20분씩 분산해서 배정했다. 3명 이상의 자녀를 둔 가정이 흔하니 현명한 처사다.

3학년 아이에게 배정된 시간은 10시 10분. 난생처음 접하는 수업이라 아침부터 초조했다. 방학인지 개학인지 구분 못 하는 아이를 깨워 굳이 교복까지 입혀 10시부터 대기를 했다. 담임이 보내준 웹엑스(Webex) 화상 수업 주소를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학급 아이들이 하나 둘 화면에 등장했다. 첫날이라 몇 아이들의 입장은 늦어졌고, 담임은 출석 체크를 하며 아이들의 안부를 물었다. 화면에는 진귀한 풍경이 연출됐다. 주인공인 학생 뒤에 엑스트라 학부모들의 분주한 몸놀림이 포착됐다. 엑스트라들의 임무는 기기 점검(오디오, 스피커, 음소거 기능 등)이다. 실로 인류사에 기록될 역사적인 날이다.

아이의 학교는 웹엑스(Webex)를 통한 화상 수업을 제외하고 모든 교육 활동을 구글 플랫폼인 구글 드라이브, 구글 클래스룸, 지메일로 한다.
 
원격수업 중 소홀해지기 쉬운 체력관리도 빼놓을 수 없다.
▲ 체육시간(강아지와 줄다리기 한 판) 원격수업 중 소홀해지기 쉬운 체력관리도 빼놓을 수 없다.
ⓒ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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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정신이 없었다. 초등 저학년인 아이를 위해 함께 지시사항을 읽고, 프린트하고, 과제를 수행하고, 오리고, 붙였다. 중간에 배가 고프다는 아이에게 간식도 제공하고, 과제 두 개를 겨우 끝내니 점심시간이다. 막간을 이용해 점심을 차리고, 체육수업을 위해 강아지와 줄다리기 몇 판도 시켰다.

오후가 되자 마침내 아이는 '버티기 기술'에 들어갔다. '왜 이렇게 공부를 많이 시키냐',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공부하고 싶다'로 짜증을 내더니 벌러덩 누워버렸다. 겨우겨우 달래고 어르고 협박 반 읍소 반을 해서 오후 내내 과제 1개를 끝냈다.

3시쯤 되자 두통이 밀려오고, 뒷목이 당기고, 혈압이 상승한다. 아이에게 화를 내고 잔소리를 할 각이다. 마친 과제는 사진을 찍어 구글 클래스룸에 올리고 '제출하기' 버튼을 눌러야 한다. 이미 셀프 태업에 들어간 아이를 보며 '부모가 대리해 주는 과제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그나마 완성된 과제도 제출하지 않았다.

'나는 교사가 아닌 엄마잖아.'

자각이 들자 바로 담임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최선을 다해 학습을 돕겠지만, 가정에서의 학습은 학교처럼 효율적으로 하기 어렵다는 점과 아이의 학문적 성취 못지않게 부모와의 관계 또한 소홀히 할 수 없으니 양해를 바란다는 요지의 글이었다.

"차라리 방학이 그리울 지경이야."

오후 4시쯤 되자 지인에게서 카톡이 왔다. 초등 저학년 아이 둘을 키우는 그녀의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눈앞이 선하다. 방학이 오면 개학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그녀는 이제 방학이 오기를 기다린다. 방학엔 차라리 캠핑을 떠나거나 친구들을 붙여 놀게라도 할 텐데, 이제는 두 아이 돌봄에 학습까지 더해져 부모의 부담은 측정 불가한 영역이 되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초등 저학년 자녀를 둔 가정의 온라인 원격 수업은 '엄마 개학'이란 별칭을 얻었다. 이보다 더 어울리는 별명이 또 있을까 싶다.

뭉클하게 만든 교사의 편지
   
온라인 수업 2일 차, 교사의 편지에 잘 해야 한다는 욕심을 비워냈다.
 온라인 수업 2일 차, 교사의 편지에 잘 해야 한다는 욕심을 비워냈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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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 원격 수업 2일차가 되자 아이들도 교사도 안정적이고 편안해 보인다.

담임에게서 답장이 왔다. 아이의 적응 속도에 맞춰 과제량을 조금씩 늘려보자는 제안, 부모나 아이가 원한다면 교장과 상의해서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빈 교실에서 온라인 학습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줄 수 있다는 안내, 글로 된 긴 과제 설명보다는 구두로 간단하게 제시되는 과제 유형을 선호하는 아이를 위해 영상을 통한 과제 설명을 늘리겠다는 배려의 내용이었다.

'가정에서 겪는 고충을 얘기해줘서 고맙다'는 공감의 말로 시작해서 '가정과 학교의 지속적인 피드백을 통해 지원하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란 격려의 말로 끝을 맺는 교사의 편지는 뭉클했다.
  
구글 클래스룸을 확인하니 총 4개의 과제가 올라와 있다. 욕심을 비워내고 목표를 반으로 잡았다.

언제 종료될지 모를 원격 수업의 장기전에 대비해 아이에게 하나씩 가르치기로 했다. 구글 클래스룸을 열어 아침마다 출석 인사 남기기, 혼자서 프린트하기, 완성된 과제 사진 찍어 올리기, 제출하기 버튼 누르기를 조목조목 설명하며 실행해 보도록 했다. 배워가는 재미가 붙은 것인지 어제보다는 덜 짜증을 낸다.

계획한 2개의 과제를 완성해 '제출하기' 버튼까지 누른 아이가 이제는 양손 타이핑 연습을 하겠다며 의지를 불태우니 어리둥절하다.
  
"요즘 내게 가장 소중한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야."

저녁에 호주 친구인 엘레노어에게 사진과 함께 문자가 왔다. 사진 속의 그녀는 울워스(Woolworths, 호주의 대형슈퍼마켓)의 유니폼을 입고 활짝 웃고 있었다. 초등 저학년 아들 두 명과 유치원생 아들 한 명을 키우는 그녀에게 학교 봉쇄의 여파는 쓰나미와 같다. 온종일 아이 셋을 데리고 돌봄과 가정 학습을 겸하는 그녀에게 저녁 몇 시간의 파트타임 근무는 오히려 지친 그녀를 구원한다. '코로나19에 걸리는 것보다 아이 셋과 집에 격리되는 게 더 무섭다'는 그녀의 말이 전혀 엄살처럼 들리지 않는 요즘이다.

여유가 생기다

4월 17일, 3일째가 되자 화상수업에서 엑스트라들은 모두 빠졌다. 엄마가 필요 없으니 나가서 볼일 보라는 아이의 말에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오늘의 과제는 총 5개다. 어제보다 아이는 더 잘 따라온다. 처음으로 부여된 과제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아이의 컴퓨터 활용 능력이 향상되니 엄마의 손이 덜 바빠졌다. '제출하기' 버튼 밑의 교사에게 보내는 프라이빗 코멘트(private comment) 란에 짧은 문장까지 곁들이는 센스까지 생겼다. 다음 주에는 온라인상에서 과제를 해결하고 바로 제출하는 방법을 교육해 볼 요량이다. 
 
원격 수업 3일째가 되자 아이는 부여된 과제를 마칠 수 있게 되었다.
▲ 목표 달성의 기쁨 원격 수업 3일째가 되자 아이는 부여된 과제를 마칠 수 있게 되었다.
ⓒ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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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원격수업은 첫날 혼란과 고충을 야기했다. 그런데 3일쯤 지나 정신을 차려보니 꼭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와 밀착해 교사의 수업도 들어보고, 과제 수행도 도와주다 보니 호주 교육과정을 자세히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늘 궁금했던 교사들의 수업 설계와 전개, 교수학습 방식 등의 내밀한 활동이 보이기 시작했다. 호주에서 공부해보지 않은 이민자로서 막연했던 평소 학교 수업의 운영과 흐름을 또렷하게 알 기회가 되고 있다. 더불어 원격 수업으로 학부모의 컴퓨터 활용 능력까지 향상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종말을 고한 후의 학교 교육이 궁금해진다. 머지않아 아이는 엄마의 감 떨어지는 컴퓨터 활용 능력에 잔소리를 해 댈 것이다. 그래, 그 순간 대환영이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와 블로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코로나19 판데믹, #호주, #멜버른, #원격수업, #온라인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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