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3일 개봉하는 영화 <바람의 언덕> 포스터

오는 23일 개봉하는 영화 <바람의 언덕> 포스터 ⓒ 영화사 삼순

 
<들꽃>(2014), <스틸플라워>(2015), <재꽃>(2016)으로 불리는 '꽃 3부작'으로 2010년대 후반 한국 독립영화계에 유의미한 족적을 남겼던 박석영 감독이 <바람의 언덕>이라는 새로운 영화를 가지고 나타났다. 굳이 신작이나 새 영화가 아닌 '새로운' 영화라고 하는 이유는 이전 그가 만들었던 영화들과 전혀 다른 작품이기 때문이다. 

2014년 40세 나이에 첫 장편 <들꽃>으로 늦깎이 데뷔를 하고 지금까지 쉴 틈 없이 영화를 만든 덕에 감독 데뷔 6년 만에 장편 4편을 만든 중견 감독(?)이 되어버린 박석영. 하지만 그는 여전히 영화에 목말라 하고 있으며, 그간 수많은 독립영화들이 여건상 만날 수 없었던 지역 관객들과의 접촉을 늘리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이어나가고 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이후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로 지역 영화 공동체를 돌며 관객들과 만남을 이어오다가 오는 23일 극장 개봉을 맞이하게 된 박석영 감독과 지난 16일 서울 강남 모처에서 만났다. 

<바람의 언덕>의 스토리 라인은 단순하면서도 평범하다. 오래전 딸을 버린 영분(정은경 분)이 태백에서 필라테스 학원을 운영하는 딸 한희(장선 분)와 재회하는 이야기. 그간 어디에 정착하는 것을 온몸으로 저항하던 거리의 여성들의 투쟁을 보여준 박석영의 지난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사실 박석영 영화는 '꽃 3부작'의 마지막 <재꽃>부터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을 더 밀어붙이 는 대신 그들을 관조하는 태도를 취하며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허나 <바람의 언덕>이 좀 더 새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은 늘 도망 다니기 바빴던 주인공이 피하고 싶었던 상황과 마주하고, 절망이 아닌 희망을 노래하기 시작하는 세계관의 확장에 있었다. 

어머니도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 모녀의 재회와 대면 
 
 오는 23일 개봉하는 영화 <바람의 언덕> 박석영 감독

오는 23일 개봉하는 영화 <바람의 언덕> 박석영 감독 ⓒ 아워스 필름

 
이러한 변화에 대해 박 감독은 "아들이 영화 찍기를 어려워할 때 선뜻 2500만 원을 건네며 본인은 물론 자신의 친구들도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 만들기를 권유한 어머니 덕분"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한희에게 엄마라는 사실을 숨기며, 딸 몰래 필라테스 학원 전단지를 거리 곳곳에 붙이고 다니는 영분의 모습은 매일 서울 곳곳의 극장을 돌아다니며 아들 영화를 홍보하던 어머니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덧붙였다.

영분 역을 맡은 정은경 배우와 영분의 의붓아들인 용진을 연기한 김태희 배우는 전작 <재꽃>에서 함께한 인연을 이어갔고, 한희 역을 맡은 장선 배우는 <바람의 언덕>이 박 감독과 함께한 첫 작품이다. 

<바람의 언덕>에서 영분과 한희의 재회 못지않게 중요한 극적 장치로 등장하는 것은 '필라테스'다. 필라테스의 창시자 요제프 필라테스가 어릴 때부터 허약한 몸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시작했다는 이 운동은 오랫동안 단절되고 굽어있던 모녀 관계를 단기간에 회복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박 감독은 "영화에 필라테스가 등장한 것은 장선 배우가 과거 필라테스 강사로 활동한 이력을 극 중 역할에 녹였을 뿐, 애초 필라테스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장선 배우의 과거 직업뿐만 아니라, 영화에는 극중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 각각의 삶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고 박 감독은 설명했다.

"영분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남편 윤식이 오랫동안 누워있던 병상 앞에서 작별을 고하는 장면은, 저도 촬영을 끝내고 뒤늦게 알게된 사실인데 투병생활을 오래했던 아버지를 떠나 보내야했던 정은경 배우의 경험담에서 비롯됐어요. '사람은 그 나이대의 진실이 있어'라면서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는 영분을 위로하는 또 다른 윤식(김준배 분)의 대사는 김준배 배우가 저를 처음 만났을 때 실제 건넨 말을 대사로 활용했습니다." 

박 감독이 말하는 <바람의 언덕>의 작업 방식은 간결하면서도 유동적이었다. 배우들은 촬영 전 장소 섭외 단계부터 함께 하며 캐릭터 이해의 폭을 넓혔다.

"영화의 주요 로케이션 장소와 인물의 기본 설정만 뼈대로 잡고, 이후에는 배우들과 직접 촬영 장소를 같이 다니면서 배우 스스로 캐릭터에 생동감을 구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구체적인 시나리오와 디렉팅으로 움직이는 촬영이 아니기에 스태프들에게는 힘든 작업이 될 수도 있었지만, 의외로 예정된 회차 내에 촬영을 마쳤습니다. 변화의 여지가 많은 작업이기 때문에 촬영에 필요한 최소 인력으로만 간결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필라테스 학원과 태백의 몇몇 장소만 등장하는 제한적인 로케이션 또한 8천만 원의 적은 제작비와 짧은 회차 내에 촬영을 마쳐야하는 제작 환경에 힘이 되었습니다." 

등장인물 또한 영분, 한희, 용진, 윤식, 그리고 영화 초반 기차 안에서 영분에게 귤을 건네는 배우 장해금(<재꽃>에서 해별 역으로 출연했다)과 그녀가 데리고 있던 어린 소녀, 한희의 필라테스 수강생들로 잠깐 등장하는 사람들이 전부다. 이렇게 놀라울 정도로 단출한 인물 구성을 두고 박 감독은 "자신들의 근본적인 두려움과 마주하게 된 영분, 한희, 용진에게 집중하기 위한 영화적 구성이었다"고 강조한다. 오래 전 딸을 버린 어머니가 딸을 찾는 결과만 보는 것이 아닌, 예상치 못한 상황을 피하지 않고 맞서야하는 인물의 심경과 선택을 고스란히 마주하기 위한 의도인 것이다. 

엄마와 딸 이전에 두려움을 대면하는 인간을 보여주고파
 
 오는 23일 개봉하는 영화 <바람의 언덕>

오는 23일 개봉하는 영화 <바람의 언덕> ⓒ 영화사 삼순

 
한희의 주위를 맴돌다가 정작 딸이 자신을 알아보자 매몰차게 거부하고 도망가는 영분은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엄마임을 온몸으로 부정하며 딸에게 악다구니를 쓰는 영분을 끝까지 감싸 안으려고 하는 한희 또한 주변에게 흔하게 볼 수 있는 캐릭터는 아니다. 혹자는 영분과 한희를 두고 기존의 모녀 관계가 뒤바뀐 것 같은 인상도 받을 수 있다. 

박 감독은 영분을 두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사람일 뿐"이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병수발을 들던 윤식의 죽음 이후 고향인 태백으로 도망간 영분은 한희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도 두렵고, 딸에게 당당하게 다가갈 수 없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도 두렵다. 누구를 책임지는 것은 더더욱 두렵다. 박 감독은 "만약에 영분이 생각이 많고 책임감이 많은 사람이었다면 제 명에 못 살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화기만 놓고 가면 모든 관계가 완전히 끝날 것이라고 믿는 영분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함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영분의 황당무계한 순진함이 때로는 그녀를 지금까지 살게 하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오래 전 친자식을 버리고,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의붓아들까지 버리고 도망가는 영분은 상대방이 자신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상처를 받는 것을 거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영화는 필라테스 수강생으로 한희를 만나러 갈 때와 한희 몰래 필라테스 전단지를 붙일 때만큼은 딸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영분의 순수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렇다고 어린 나이에 한희를 낳자마자 버린 죄의식으로 평생을 살아왔을 영분에게 쉽게 면죄부를 주지는 않는다. 다만 박 감독은 "영분이 어떤 사람이라고 쉽게 단정 짓고 평가하지 않을 뿐"이라고 말한다. 

"난 (엄마) 안 미워. 난 어떻게 미워하는지도 모르겠어. 엄마 나 낳을 때 나보다 어렸잖아. 나 어른이야. 잘 살았어. 나는 좋았어 엄마라서 좋았어. 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 가지마요. 지금 가면 진짜 나쁜 사람 돼. 그냥 우리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그냥 있어." 

어떠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환하게 웃으며 상대방을 다독거리는 한희 또한 그렇게 해서라도 지켜야할 것이 있었던 그녀의 삶에 집중하고자 한 감독의 의도였다.

"고아로 자랐던 한희는 자신의 삶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해야했으며, 필라테스 강사가 된 것 또한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이기도 합니다. 학원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한희는 따로 집을 가질 정도로 넉넉한 벌이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혼자 잘 살아왔다고 믿고 있구요. 때문에 한희는 영분이 자신을 찾아와준 것만으로도 기쁘고 행복합니다. 자신에게 일부로 모진 상처를 남기고 도망가는 엄마조차 인정하려는 사람. 그런 인물이 한희입니다." 

"난 니가 미워. 너 때문에 난 훨훨 훨훨 다 할 수 있었는데. 너 때문에 못했고, 평생 나쁜 사람으로 살아야 돼. 어휴 끔찍해. 갑갑해. 억울해." 

너 아니었으면 모든지 다 할 수 있었지만 평생 나쁜 사람으로 살아야한다는 죄책감과 억울함을 딸에게 모조리 토로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이해하며 붙잡으려는 딸. 그간 누군가를 지키거나 자신을 희생시켜 집안의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은 엄마들의 의무였고 그렇게 하지 않는 엄마들은 비난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바람의 언덕>은 보통의 모녀 관계에서 어머니에게만 과도하게 지워진 짐을 떼어내고, 평생을 자식을 버린 죄책감으로 살았지만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여성의 절규를 듣고자 한다. 

좋은 엄마가 될 수 없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영분과 엄마가 떠날까봐 두려운 한희. 그러면서도 서로 간 입장을 인정하며 각자 나름의 선택에 도달하게 되는 대면의 여정. 촬영 전 리허설 없이 정은경, 장선 배우에 대한 믿음만으로 진행된 이 시퀀스는 그간 영화에서 리버스 샷(앞 장면과 정반대인 180도 앵글에서 촬영한 장면)을 잘 활용하지 않았던 박 감독이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사용한 장면이다.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영분과 어떻게든 영분을 놓치고 싶지 않은 한희의 클로즈업을 통해 그녀들의 얼굴 안에 드러나는 모든 것을 포착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대면'입니다. 또다시 누군가에게 버림받을까봐 혹은 같이 살고 싶어도 서로 잘못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운 감정과의 대면. 어쩌면 영분이 한희에게 모진 상처를 주며 떠나려고 하는 것도 버림받을까봐 잘못될까봐 하는 두려움에 대한 도망이구요."

박 감독의 고백에 따르면 <바람의 언덕>은 박석영 영화 속 인물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두려움을 털어놓는 영화다.

"<스틸플라워> 하담, <재꽃>의 하담과 해별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무섭다, 두렵다'는 말이 <바람의 언덕>에서야 비로소 영분과 한희를 통해 나오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만들고 관객을 만나는 것 여전히 어렵고 두렵고 무섭습니다. 그러나 저도 이 영화를 통해서 제가 영화를 만들고 상영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마주하며 드러낼 수 있는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오는 23일 개봉하는 영화 <바람의 언덕>

오는 23일 개봉하는 영화 <바람의 언덕> ⓒ 영화사 삼순


관객과의 더 깊은 만남을 꿈꾸다 

<바람의 언덕>을 통해 두려움과 대면하는 용기를 조금이나마 얻게 되었다는 박 감독은 조금 더 관객과 가까이 대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커뮤니티 시네마(공동체 상영)를 선택했다. 박 감독이 공동체 상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커뮤니티비프의 '리퀘스트 시네마: 신청하는 영화관(관객이 투표로 상영작을 선정)' 섹션에서 <재꽃>을 사랑하는 관객들과 함께했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후 지역 영화 커뮤니티들과 영화를 함께 이야기 하고 나눌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감독은 지난해 12월부터 매주 한번 '바람의 언덕-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를 시작하기에 이른다. 

그간 독립·예술영화를 상영하는 방식으로 공동체 상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바람의 언덕>처럼 공동체 상영에 지역 순회 개념을 더한 배급 방식은 사실상 처음이기에 잘 될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도 컸을 것이다. 하지만 박 감독은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의 외형적인 성공보다 그 과정에서 대면하고 나누는 관객들과의 다양한 이야기와 질문에 더 큰 의의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 커뮤니티 상영에서 오갔던 각양각색 이야기는 오마이뉴스 '<바람의 언덕>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 연재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관련기사: 영화 본 모든 관객에게 직접 찾아가는 감독... 그의 편지).

"그간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를 진행해보니 지역 영화 커뮤니티에 관객을 모을 수 있는 열정과 저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자본이 부족하죠. 대다수 독립영화들은 운 좋게 개봉 기회를 얻더라도 일부 상영관,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시간대를 전전하다가 겨우 2주 만에 내려지는 게 현실입니다. 반면에 영화 커뮤니티를 찾는 관객들은 지역에서 보기 어려운 영화 관람과 감독·배우와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경험을 원하고 있습니다.

커뮤니티 로드쇼는 영화 상영 주체, 감독, 관객의 바람을 어느 정도 함께할 수 있는 여정입니다.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가 독립영화의 열악한 상영 현실을 해결할 수 있는 일반적인 시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개봉을 겪은 독립영화 감독들이 느끼게 되는 '패배자'라는 감정이 조금은 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극장 개봉 전 공동체 상영을 통해 지역 관객들을 만나게 되면 독립영화는 적어도 두 달 동안의 상영 기간을 보장 받고 관객들과 더 깊게 영화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는 23일 개봉하는 영화 <바람의 언덕>

오는 23일 개봉하는 영화 <바람의 언덕> ⓒ 영화사 삼순

 
이전의 영화들보다 확장된 세계관, 그간 독립영화들이 거의 시도하지 않았던 공동체 상영 배급까지.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하지 않았던 새로움과 대면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박 감독을 보니 문득 그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서 물어보니 제주도에 관한 영화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차기작보다 오는 23일 개봉을 앞둔 <바람의 언덕>을 통해 관객들과 나누게 될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고 선을 그었다. 극장 개봉 후에도 코로나19로 잠정 연기되었던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 상영회도 재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관객과 좀 더 가까이, 깊게 대면하고 싶어 그들 곁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바람의 언덕>의 힘찬 도전은 계속된다. 
바람의 언덕 박석영 감독 정은경 장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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