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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녁'으로 기억된다. 그는 정겨운 남도 사투리로 항상 '이녁~'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직속 1년 선배였던 그의 자취방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동기의 하숙방이었는지 기억은 정확하지 않지만, 함께 술잔을 기울일 때면 문학을 향한 그의 뜨거운 열정은 밤새워 불타올랐다. 문학작품에 대한 열변을 토하다가도 때론 한이 서린 시조가락을 쏟아내고 때론 흥겨운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던 그가 너무 좋아서 모든 세상이야기를 안주 삼아 불타는 밤을 보내곤 했다.

그는 그의 동기들보다 대여섯 살 많은 늦깎이 대학생이었다. 그는 5년간의 기술하사관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입학한 탓에 1980년대 중후반 학번인 다른 복학생 선배들보다도 나이가 더 많았다. 1990년대 초반 짧은 시기 함께 했던 대학 생활 이후 잊고 지내던 그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건 2013년이었다.

그는 제1회 이외수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결>을 쓴 정택진이다. 당시 수상작 관련 기사를 보니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그가 대학을 졸업한 이후 20여 년이 흘렀을 무렵이니, 문학을 향한 그의 열정은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식지 않았던 셈이다.

내게는 그이 늦깎이 등단이 무척이나 감동이었다. 어찌어찌 수소문해서 알아낸 그의 휴대전화로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그와의 통화는 축하드린다는 인사말을 전한 뒤 잘 사느냐는 안부를 주고받고 마치 며칠 전 만났던 것처럼 간단하게 끝났다.

그렇게 6년여 시간이 또 흐르고, 그가 지난해 11월에 새로 펴 낸 소설 <품>을 접했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니 대학 시절에는 몰랐던, 그가 '이겨내 온' 뜨겁고 서럽고 몹시 아팠을 청춘이 떠올려졌다.
  
 작가 정택진의 <품>
 작가 정택진의 <품>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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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중반 늦깎이 대학 입학, 49세 늦깎이 소설 등단 

작가 정택진은 전남 완도 청산도 출신으로 생활고를 이겨내며 학업을 계속 하기 위해 학비와 생활비 전액이 국가 장학금으로 지원되는 경북 구미의 금오공고로 진학한다. 고교 졸업과 동시에 정해져 있던 기술하사관 5년 의무 복무로 청춘을 바쳐야 했던 그의 삶.

작가는 실제로 <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사실인지 아닌지 알 듯 모를 듯 들려준다. 그가 자전적 이야기에서 풀어놓은 초등학교 때 처음 만난 소녀와의 수채화 같은 첫사랑은 황순원의 <소나기>를 떠올리게 했고, 연인이 거닐던 섬마을 곳곳 하늘 가득 쏟아져 내리던 별들에서는 알퐁스 도데의 <별>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러나 남녀 주인공들은 각자가 처한 가난 때문에 서로의 고교 진학이 엇갈려야 했고, 오랜 군 복무로 인해 다시 이별한 뒤 운명처럼 재회하지만 끝내 인연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20대 청춘들의 모습에서는 고단한 삶의 아픔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작가는 1980년 5월 광주를 직접 묘사하지 않았지만, 첫사랑 연인이 여동생을 잃고 치유할 수 없는 부상과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개인이 극복하기에는 분명히 버거웠을 소시민의 아픔을 보여준다. 그 역시 그런 연인을 품어주지 못하고 도망치듯 등지며 또 다른 아픔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작가는 해진과 승미의 질기게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통해 소시민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삶의 아픔을 들려주고 있다. 그것은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아픔일 수도 있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혈육으로 인한 아픔일 수도 있고, 바다로 인해 고립돼 가족처럼 살아가는 섬사람들의 아픔일 수도 있고, 5월 광주처럼 개인으로서는 어쩌지 못하는 시대의 아픔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가 '온 몸으로 이겨내 온' 삶과 시대의 아픔이 느껴지는 소설 <품>


작가 정택진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고 느끼는 갖가지 아픔을 <품>을 통해서 보듬으려고 했던 것 같다. 이외수 작가의 추천사와 고명철 문학평론가의 추천사를 굳이 참고하지 않더라도,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가슴 먹먹하게 느껴지는 아픔이 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시간이 흐를수록 작가가 '온 몸으로 이겨내 온' 삶과 시대의 아픔은 더욱 더 가슴 깊숙이 파고든다. 아픔으로 아픔을 품은 탓에 한결 정화된 아픔이라고 해야 할까.

이 가슴 뭉클한 아픔이 잦아들기 전에 막걸리 한 병 사들고 작가 정택진이 아닌, 이녁으로 기억되는 택진이 형이 있는 청산도로 찾아가야겠다.

품 - 정택진 장편소설

정택진 (지은이), 컵앤캡(Cup&Cap)(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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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오래 비루한 행복에 빌붙어 사느니 피가 우는대로 살아볼 생각이다"(<혼불> 3권 중 '강태'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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