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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하이서울유스호스텔 대강당에서 열린 안철수신당(가칭) 중앙당 창당발기인대회 사전행사에서 "무너진 정의와 공정의 회복"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하이서울유스호스텔 대강당에서 열린 안철수신당(가칭) 중앙당 창당발기인대회 사전행사에서 "무너진 정의와 공정의 회복"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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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씨 안녕하세요. 당신의 글과 말을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최근에는 당신의 SNS를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중요한 사안마다 자신의 날카로운 관점으로 비판의 화살을 날리는 모습을 보면서, 한창 트위터에서 날아다니던 '모두까기 인형'이 다시 돌아왔구나 싶습니다.

특히 문재인 정부를 견제하는 세력이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기에, 당신의 존재는 귀합니다. 하지만 최근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 사건에 대해 쓴 글은 굉장히 당혹스러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진중권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문재인 지지선언 했다는 여성단체의 그 인사. 오거돈이 통합당 소속이었더라도 폭로를 총선 후로 미루었을까' (4월 28일),
'(오거돈 전 시장의 성추행은) 친문인사가 낳은 비극' (4월 23일) 


'2차 가해' 안 하는게 그렇게 어렵나요

성폭력 가해 사실이 폭로되었을 때, 정치적 유불리를 따져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넘겨짚는 것. 그것은 정치공학도 뭣도 아니고 진영논리이자 2차 가해에 불과합니다. 미투 운동이 한창일 때, 피해 사실을 증언한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해 이런 수법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잘 아실겁니다. 진보진영에 정치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 폭로를 한 것이라는 둥, 실은 저 사람 뒤에 어떤 정치세력이 있다는 둥.

지난 23일에 당신이 페이스북에 남겼던 글은 이러한 2차 가해의 전조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 전 시장이 친문이라서 성추행 범죄를 저지른 것인가요? 이런 진영논리가 옳지 않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28일에 남긴 글은 가히 음모론의 세계로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혹시 피해자 분의 입장문을 읽어보셨나요? 그는 "정치권의 어떠한 외압과 회유도 없었으며, 정치적 계산과도 전혀 무관"하다고 했습니다. 성폭력 문제를 성폭력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정치적으로만 해석하는 한국사회의 분위기 상, 언제 공론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분명 있었을 겁니다. 
 
지난 4월 28일, 진중권이 페이스북에 남긴 글은 성폭력 피해자를 향한 2차가해다
 지난 4월 28일, 진중권이 페이스북에 남긴 글은 성폭력 피해자를 향한 2차가해다
ⓒ 진중권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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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사건을 정치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시점은 중요하지 않죠. 공론화를 총선 전에 했으면 총선 전에 했다고 비난했을 것이고, 총선 후에 했으면 총선 후에 했다고 비난했을 겁니다. 그것을 피해호소인은 걱정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가 우려하는 바로 그 모습을, 당신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피해자가 진짜로 원하는 건 

언론은 이번에도 성범죄 보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부 언론은 피해자의 신상명세에 주목하는 한편, 피해자를 지원하는 데에 힘쓰고 있는 부산성폭력상담소 소장의 정치적 이력을 들춰서 문제 삼는 기사도 등장했습니다. 굉장히 문제적입니다. 피해자 혹은 피해자를 지원하는 이들의 자질을 문제 삼는 것이야말로 성범죄 사건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피해자 탓하기(victim-blaming) 수법입니다. 수많은 미투 운동의 당사자들이 이러한 의심 앞에서 한 번쯤은 자기검열을 해야 했습니다.

피해자는 입장문에서 거듭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고, 공론화 시점은 최대한 조율할 수 있는 선에서 택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것이 정치적으로 누가 유리한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총선이 끼어있는 탓에 언제 공론화를 하든 공격을 받을 수 있겠다는 당사자의 고민이 느껴져서 서글픈 감정이 들던데, 진중권씨는 이 부분이 친문 혹은 민주당 지지자한테 유리한지 아닌지가 더 관심이 가시던가요? 

한때 당신이 '모두까기 인형'이라고 불렸던 것은, 진영과 무관하게 불합리한 일이라면 얼마든지 비판할 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자신이 속한 진영의 부조리에 대해 실제로 침묵하거나,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일을 보였기 때문에 당신의 '모두까기'는 빛을 내곤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요 근래에는 '친문'을 비판할 수 있다면 무슨 말이건 다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할 말 못할 말을 가리지 않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글을 쓰고 어떤 주장을 하건 간에, 그것이 피해자를 위하는 방향일지를 먼저 생각해 주세요. 그게 가장 먼저입니다. 

태그:#진중권, #2차가해, #진영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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