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남양주 산속의 광해군 '묘'. 철책으로 에워싸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남양주 산속의 광해군 "묘". 철책으로 에워싸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1592년(선조 25) 4월 29일 선조는 둘째아들 광해를 세자로 책봉한다. <선조실록> 당일 기사는 '광해군을 세자로 삼았다. 세자가 동궁으로 나오니 몰려와 있던 많은 사람들이 축하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태자 자리가 장남 임해군이 아니라 차남 광해군에게 돌아간 것은 임해에 대한 부정적 세평 때문이었다. <선조실록> 1595년(선조 28) 12월 16일자의 3번째 기사는 중국에 보내는 세자 책봉 문서의 임해군 부분을 선조가 고쳐 쓰라고 하명하는 내용인데, 선조는 '임해군이 사냥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한다는 표현은 너무 노골적이니 다시 다듬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임해군 집에 불을 지른 백성들

임해군에 관한 가장 단적인 혹평은 1597년(선조 30) 1월 4일자 <선조실록>의 '임해는 어려서부터 불의를 많이 저질렀다'는 선조의 발언이다. 아버지인 선조조차 그렇게 저평가할 정도였으니 피해자인 백성들이 임해에 대해 나쁜 인식을 가졌을 것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 집권층에 대한 민중의 반발을 보여주는 1592년(선조 25) 4월 14일자 <선조수정실록>은 백성들이 임해군의 집에 불을 질렀다고 증언한다.
 
도성의 궁성에 불이 났다. 임금의 가마가 떠나려 할 즈음 백성들이 먼저 내탕고(임금의 재산 보관 창고)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져갔다. 거가가 떠난 뒤 크게 불어난 난민들은 장례원(노비 관련 문서와 소송을 관장하는 기관)과 형조(현 법무부)부터 불태웠다. 두 관서가 공사 노비의 문서들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중략)

임해군의 집과 병조 판서(현 국방부장관) 홍여순의 집도 불에 탔다. 이들 두 집에 방화가 된 것은 평상시 많은 재물을 모았다고 소문이 난 탓이었다. 유도 대장(현 수도경비사령관)이 몇 사람을 죽여 군중을 경계시켰으나 난민이 떼로 일어나서 막을 수가 없었다.
  
백성들은 구한말에도 문제적 고관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런 자들을 죽이려 했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밀려 국가의 숨이 막 멈출 지경까지 몰렸던 1592년처럼, 그로부터 310년가량 뒤인 1904년에도 조선의 백성들은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권력자들을 응징하려 했다.

1904년 3월 2일, 백성들은 외부 대신(현 외교부 장관) 서리 이지용과 참서관(공사와 서기관 사이 직급) 구완희의 집에 폭탄을 투척했다. 둘은 2월 23일 황제의 재가도 받지 않고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任權助)가 내민 '한일 의정서(韓日議定書)'에 조인 도장을 찍은 자들이었다.   

한일의정서 불법 체결에 앞장선 이지용
 
을사오적(왼쪽부터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의 모습(대구 조양회관 전시 사진)
 을사오적(왼쪽부터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의 모습(대구 조양회관 전시 사진)
ⓒ 조양회관

관련사진보기

한 달 전인 1월 23일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운이 감돌자 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은 2월 9일 인천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일본은 그날 바로 서울까지 들어왔다. 다음날인 2월 10일 일본은 러시아를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순식간에 우리나라는 전쟁터로 돌변했다.

하야시는 일본군이 서울에 진입한 즉시 이지용을 앞세워 고종을 알현했다. 하야시는 고종에게 일본에 협력하라고 강요하면서 중립 선언을 전적으로 무시했다. 이틀 뒤인 2월 12일,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브(Pavlow)가 자국 병사 80명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을 떠났다.

하야시는 일본군 제12사단장 이노우에(井上)와 함께 한일 의정서 체결을 강압했다. 반일친로파 탁지부(현 기획재정부) 대신 이용익을 일본으로 압송하고, 이용익과 친한 길영수(보부상의 중심 인물), 육군 참장(현 준장) 이학균, 육군 참령(현 소령) 현상건 등을 연금한 뒤, 이지용과 한일 의정서를 체결했다.

"군사상 필요하면 일본은 조선 땅 어디든 사용할 수 있다"

전문 6조로 된 한일 의정서의 핵심 내용은 제4조로,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황실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임기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취하며,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한다. 대일본제국 정부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때에 맞춰 사용할 수 있다'였다.

한일 의정서를 체결한 일제는 곧바로 우리나라의 토지를 군용지로 광범위하게 점령했다. 일제는 3월 말 통신 기관도 군용으로 쓴다면서 강제 접수했다. 또 경부·경의 철도 부설권이 군사 용도로 일제에 넘어갔고, 6월 4일에는 충청·황해·평안 3도 연안의 어업권도 일본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3월 8일자 관보에 의정서가 실린 것을 본 조선의 국민들은 정부의 처사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고, 이윽고 매국노 이지용과 구완희의 집에 폭탄을 던졌던 것이다.

일제는 선산 군수 길영수, 평양 연대의 연대장 최낙주와 제2 대대장 이재화, 이규환 등이 폭탄을 투척한 범인이라면서 즉각 처벌하라고 우리 정부에 요구했다. 정부는 그들의 직위를 해제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이때는 '이미 많은 일본군이 서울 안에 주둔하고 (군사 시설과 군사 행동에 방해가 된다고 인정되는 사람은 사형 등 중형으로 처벌하고, 서울 및 중요 지역에는 경찰 업무를 일본 군대가 대신한다 등의) 군령까지 포고하고 있는 살벌한 때인 만큼 (일제에 맞서는) 문제가 더 확대될 수도 없었다(국가보훈처 <의열 투쟁사>).' 그러나 이지용과 구완희를 대상으로 시도된 처단 거사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에 맞서고, 친일파를 응징하려는 우리 민중의 첫 발걸음이었다. 

이지용과 구완희의 이력을 알아본다

이지용(1870, 고종 7-1928, 대한민국 10)은 조선 말기의 대표적 친일파 중 한 명으로 을사오적의 1인이다. 고종의 종질(5촌 조카)이자 이최응(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의 손자이다. 당연히 서울 태생이다.

조선 시대 과거 합격자의 평균 연령이 36세인데, 이지용은 17세(1887년, 고종 24) 때 등용문을 통과했다. 천재이거나, 또는 임금의 종질이라는 이유로 부적절하게 등과한 사례일 것이다. 임진왜란 때 행주 대첩과 이치 대첩을 이끈 권율은 영의정을 역임한 권철의 아들이었지만 45세에 급제했고, 충무공 이순신은 31세에 합격했다. 

대한제국 시대에 황해도 관찰사, 외부 대신 서리, 내부 대신 등을 역임한 이지용은 일제로부터 한일병합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백작 작위를 받았다. 이지용은 1910년 10월부터 중추원 고문을 지내면서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600원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 당시 우리나라 1년 국가 예산 1300만 원의 0.0123%이다. 2020년도 우리나라 예산 512조의 0.0123%는 약 6억 3천만 원이다.)

이지용은 1911년 1월 일본왕이 주는 은사금도 10만 원 받았다. 이지용은 1912년 1월 도박죄로 태형 100대를 선고받아 중추원 고문에서 해임된다. 1915년 9월 백작 작위가 회복되고, 1925년 7월 중추원 고문에 재임명된다. 그 이후 그는 1928년 6월 사망 때까지 매년 3000원의 중추원 고문 수당을 받았다.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인 이지용(대구 조양회관 전시 사진)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인 이지용(대구 조양회관 전시 사진)
ⓒ 조양회관

관련사진보기

구완희(1876년, 고종 13-1945년, 대한민국 27)는 1894년 동학 농민군이 봉기했을 때 유학(벼슬 없는 신분)으로 토벌에 참여했다. 그해 10월 공주 외곽 이인에서 '공'을 세워 대흥 군수에 임명되었다.

1896년 2월에는 호좌 의병진(대장 유인석, 1842-1915) 소모장 이범직(1868-1896)의 군대가 백성들의 원성이 높은 천안 군수 김병숙을 처단하는 등 두드러진 활약을 펼치자 격돌하여 물리치기도 했다.

구완희는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 평안북도 의주 군수였는데, 북진하는 일본군을 접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공'을 인정받은 구완희는 외부(현 외교부) 참서관에 뽑혔다. 그는 외부대신서리 이지용과 함께 한일의정서 조인에 적극 참여했다.

한일의정서 체결에 앞장선 '공'으로 출세가도 달려

그렇게 한일의정서 체결에 기여한 '공'으로 구완희는 경무사(현 경찰청장)를 역임하면서 칙임관 2등(차관급)까지 오른다. 그 후 구완희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때 박용화 등과 함께 일본군을 인도하여 궁궐을 포위하고 대포를 설치하기도 했다.

을사늑약 후의 서울 상황을 증언해주는 김윤식의 <속음청사>는 '전 의정(영의정) 이근명 등이 상소하고, 또 전 성천 군수 이석종 등이 일진회를 성토하며 일본인의 창귀(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호랑이를 인도하는 귀신)라 하며 윤시병·송병준의 머리 베기를 청하다가 역시 일본 사령부에 잡혀 갇혔다. 경무사 구완희가 알아 하였는데 역시 일본에 붙은 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그:#이지용, #구완희, #한일의정서, #을사늑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