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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때는 그랬다. "오뉴월 하루 볕이 무섭다"라는 말은 서로 형 노릇, 언니 노릇 하려고 나이 경쟁을 할 때 쓰던 말이었다. 호적이 잘못 실렸느니, 너무 약하게 태어나서 죽을까 봐 출생신고가 늦었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상급학교 진학을 하고 첫 교실에서 이런 풍경이 심심찮게 벌어졌고 직장에 출근해서도 나이를 한 살이라도 더 올리려고 안간힘을 쓸 때였다. 나이 올라가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철렁 하는 이때에 돌이켜보자니 다 옛날 이야기다.

얼굴에 볕 가리개를 쓰지 않고 들판에 나섰다가 목덜미까지 새까맣게 타버린 날도 이런 말을 썼다. 여름이면 더워서 지레 그늘만 찾겠지만 추위는 확실히 물러갔고 그렇다고 덥지는 않은 봄날. 무방비로 집을 나서겠지만 햇살만큼은 날카롭게 살갗을 파고들어서다.

지난 주말에 다른 용도로 이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정확히는 주말이 아니라 금요일 오전이었다. 분명 하루 전에 한 바퀴 돌았던 길을 따라 두릅을 따러 좀 더 높은 산으로 올라가는데 길목에 여전히 두릅이 달려 있었다.

갓 얼굴을 내민 새순 외에는 알뜰하게 땄는데도 말이다. 어제는 못 보고 그냥 지나쳤었나? 내 발자국 소리를 듣고 두릅이 얼굴을 돌리고 있었나? 이유야 어쨌든 배낭에 두릅을 따 담는 손길은 신이 난다.

가시에 찔려 따끔대는 손등도 아무 불평이 없다. 오뉴월 하루 햇살이 정말 무섭군. 좋아. 내일도 오늘만 같아라. 팔목이 타건 얼굴이 타건 무슨 상관이랴.

눈높이로 산등성이를 훑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가 키 큰 두릅나무를 낫으로 찍어 부러뜨린 가지에서도 새순이 올라오고 있었다. 밑동이 잘렸는데도 말이다. 봄맞이 나가야지. 겨우내 버텨왔는데 이대로 죽을 순 없지. 세상 구경은 하고 가야지. 하루하루 말라가는 가지가 이를 앙다물고 새순을 더 밀어 올리려고 하지만 힘이 달리는지 두릅 순은 웅크린 채 활짝 피지는 못하고 용만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오뉴월 하루 볕이 이뤄낸 안타까운 경이다.

낫으로 두릅나무를 자르는 사람은 분명 동네 사람이 아닐 것이다. 산과 땅에 의지하여 내일을 기약하고 내년을 기다릴 줄 아는 농촌 사람은 절대 산나물 뿌리를 캐거나 두릅나무 가지를 자르지 않는다. 타지방에서 원정 온 사람이거나 주말 연휴에 고향을 찾은 외지 것들(!)일 것이다.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행태다.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은 자연 생태와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석학들의 글과 방송은 즐겨 듣고 동의를 하지만 눈앞의 좁쌀만한 이익 앞에서는 반사적으로 습관된 자아가 발동한다. 뒷사람을 배려할 겨를이 없다. 사지선다형 시험문제로 마주한다면 다들 '배려'와 '친환경'에 동그라미를 칠 것이다. 그래서 습관은 호랑이보다도 무섭다.

쾌적한 산속 공기와 함께 숲이 뿜어 주는 항균성 건강 물질 피톤치드(Phytoncide)는 망설임 없이 마스크도 벗게 한다. 코로나도 범접하지 못한다. 자연이 주는 축복이다. 그 자연을 해치는 인간의 습관. 오뉴월 하루 햇볕보다 무섭다.

감염병이 만든 새로운 삶의 기준들이 떠오른다. 사람끼리의 물리적 거리는 유지해야 하지만 자연과의 단절된 관계는 다시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세계화 대신 지역화, 무역 중심의 대외의존 경제 대신 자립 경제, 성장 대신 성숙.

산속에서 동네 할머니를 두 분이나 만났고 아랫동네 할아버지도 만났다. 없는 사람은 위로 올라가고, 있는 사람은 아래로 내려간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다. 아랫녘에 논뙈기나 있고 읍 소재지에 면서기로 일하거나 점포라도 하나 열었다면 아래로 내려가는 '있는' 사람들이다. 이도 저도 없이 궁핍한 사람들은 봄이 오기를 기다려 산에 올라가는 게 먹을 게 많다는 격언이다. 덤으로 건강도 얻는다. 

이제 농사짓기에도 연세가 많아 관공서 용어로 '퇴출 농'이 되다 보니 맥없이 노인복지관에 가서 놀기에도 열 적은 분들에게 산은 놀이터이자 건강기구이자 먹거리 보급소다. 이때 오뉴월 햇살은 무서운 게 아니라 보약이자 다기능 복합센터가 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주에 <함양신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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