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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인 5월, 혈연관계를 넘어 새로운 가족을 꾸린 이들에게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를 들어봅니다.[편집자말]
어쩌다 같이 살게 되었을까?

이불 밑으로 삐죽 나온 그의 발가락이 귀여워 사진을 찍다가, 옥상에서 원숭이 모양이 그려진 팬티를 널다가, 방에 슬그머니 들어온 예쁜 노을이 사라질세라 다급히 그를 부르다가도,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연인과 함께 산 지 일 년 반. 우리가 함께 있는 익숙한 풍경에 푹 젖어 있다가도 문득 이 모든 것이 생경했다. 이 귀여운 애인은 어쩌다 내 곁에 있게 되었나.

결혼을 결심한 친구들에게 묻곤 한다. "어떻게 결혼을 결심하게 됐어?" 결혼할 사람은 한눈에 보면 안다는 둥, 아플 때 자신을 간호해 주는 걸 보고 이 사람이다 싶었다는 둥, 심지어는 안경을 쓰고 화장을 지운 자신을 받아들여 줬다는 둥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들은 많았으나 공통적인 이유는 하나였다. 함께 있고 싶어서.

동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함께 있고 싶어서 같이 살기로 했다.
  
함께 산다는 건 일상의 사소한 다름부터 맞춰나가야 한다는 것, 최소한 그러려니 눈감아줄 줄 아는 법을 배운다는 것 같았다.
 함께 산다는 건 일상의 사소한 다름부터 맞춰나가야 한다는 것, 최소한 그러려니 눈감아줄 줄 아는 법을 배운다는 것 같았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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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의 이유를 장황하게 해명할 일이 종종 생긴다. 그런 질문은 어김없이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왜 결혼이 아니라 동거인가?"

이상한 질문이다. "왜 동거가 아니라 결혼인가?"라고 묻고 싶어진다. 결혼은 '함께 있다'라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결혼은 사랑하는 두 사람의 합일에서 그치지 않는다.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약속까지 포함한다. 결혼 당사자들이 인생에 중대한 결정(휴직, 퇴직, 이민 등)을 내릴 때에 양가에 허락을 받는 문화는 또 어떠한가. 명절마다 일어나는 수많은 분란에 대해 여기서는 침묵하도록 하자.

그것이 옳다 혹은 그르다, 바뀌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건 지금 내 몫이 아니다. 다만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결혼은 '함께 있겠다'라는 약속보다 더 큰 무엇이라고. 상대와 하는 포옹이라기보다는 사회와 하는 악수에 가깝다고. 나는 아직 제도권 속으로 몸을 던져 사회와 악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었다.

실은 어쩌다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느냐는 질문만큼이나 어떻게 하다 동거를 하게 되었느냐는 질문도 답하기 어렵다.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뒤통수를 긁적이며 상대의 장점에 대해 중언부언 이야기하게 되는 식이다. 웃는 모습이 예쁘잖아. 말을 곱게 하더라고. 듬직하잖아.

그러나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이 세상에 어디 한둘인가. 사랑에 빠진 후에 그 이유에 대해 찾는 일은 낭만적인 놀이지만, 논리의 영역으로 들어오긴 어려운 부분이다.

동거도 비슷했다. 결혼이 아니라 동거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장단점을 따져 프레젠테이션하고, 끝없는 Yes와 No의 알고리즘에 답한 것도 아니다. 뒤늦게 그 시간을 더듬어 이유를 추론해 보니 하나의 문장이 남았다. 함께 있고 싶어서 동거하게 되었다.

그 사람이 오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의 세계가 통째로 온다

이 연애가 내 인생의 첫 연애가 아닌 것처럼, 동거 역시 처음은 아니다. 전 연인과 함께 산 적도 있었고, 룸메이트와 방을 나눠 쓴 경험도 있었으며, 외국인 가족에게 얹혀 살았던 적도 있었다.

퇴근 후 집 대문을 열었을 때 느껴지는 싸늘한 공기와 어둠을 사랑하는 내게,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마냥 행복한 일만은 아니었다. 어떤 부부들은 치약을 짜는 방식 때문에도 싸운다고 하지 않나. 치약에 견줄만한 생활용품들이 집에 얼마나 많은가. 물을 마시고 컵을 바로 씻는지, 집에 오면 양말을 벗어 빨래통에 넣는지, 빨래를 할 때 색깔별로 다 분류해서 하는지, 텔레비전을 종일 틀어두는지, 현관에 신발을 안쪽으로 놓는지 바깥쪽으로 두는지.

함께 산다는 건 일상의 사소한 다름부터 맞춰나가야 한다는 것, 최소한 그러려니 눈감아줄 줄 아는 법을 배운다는 것 같았다.

사실 중요한 건 그 사람과 나의 생활습관이 얼마나 비슷한가는 아니다. 그런 식이라면 끊임없는 알고리즘의 질문(짜장면 vs. 짬뽕, 찍먹 vs. 부먹, 아침형 인간 vs. 저녁형 인간) 끝에서 만나는 사람이 천생연분일 수 있지 않나.

그건 자기복제이지 사랑은 아닌 것 같다. 같이 살아서 좋은 건 오히려 그런 다름에서 오는 세계의 확장이었다. 오랜 시간 함께 있다 보면 그 사람의 면면이 내게 물든다. 자주 쓰는 단어가 옮고, 걸음걸이가 닮는다. 생각하는 방식이 옮고, 관심 있는 분야가 확장된다. 그 사람이 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세계가 통째로 온다.

"언젠가 결혼할 거야?"

다른 의도 없이 종종 그런 질문을 받는다. 이렇게 살다 언젠가는 결혼하지 않겠느냐고. 그러나 내게 동거는 결혼을 위한 준비나 실험이 아니다. 연인을 좀 더 잘 알기 위한(물론 더 잘 알게 되기는 했으나) 테스트나 완벽한 합일을 위한 과정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인정하는 카테고리 안에 들어오지 않은 것들을 자주 '미성숙한 것'으로 폄하하지만, 동거는 그 상태 그대로 내게 완벽했다. 나는 연인의 가족이 아니라 연인만을 사랑하는 것에 만족하고, 사회의 든든한 울타리에서 깍지 끼고 살기보다 울타리 밖에서 조금 떨어져 걷는 게 좋다.

결혼 전에 동거를 해보겠다는 아이디어에 적극 찬성하는 만큼, 평생 동거만 하겠다는 커플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우리나라 특유의 결혼 풍습은 싫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일단 살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면 '했다'라는 것 자체가 성공인 것처럼, 동거에는 실패가 없다.

기혼도 미혼도 아닌, 괄호 바깥의 사랑
 
5월 15일 출간 예정인 책 앞표지
 5월 15일 출간 예정인 책 앞표지
ⓒ 웨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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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과 함께 살다 보니, 그런 일상을 모아 책으로 펴낼 일도 생겼다. 기혼도 미혼도 아닌 괄호 바깥의 사랑을 다룬 <더 사랑하면 결혼하고, 덜 사랑하면 동거하나요?>라는 책이다.

이 글이 결혼 생활에 대한 비난이나 제도 안에 들어간 사람을 향한 반발로 읽히지 않길 바란다. 제도 안에서 안정적 가정을 꾸리는 이들을 응원한다. 그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는 것처럼 퀴어를 비롯한 모든 동거인도 생활동반자법을 통해 인정받아야 하고, 동거도 결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선택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가에서부터 '어떻게' 함께 할 것인지까지. 무지개를 일곱 가지 색으로만 분류한다면, 세상은 얼마나 지루해질까.

막연하게 결혼과 출산을 상상하던 20대 초반. 나도 남들처럼 적당한(요즘 평균 결혼 연령은 삼십 대 초반이라고 하지만) 나이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줄 알았다.

그래서인지 상대의 성씨가 궁금했다. 내 아이의 성은 무엇이 될지, 우리의 청첩장에는 어떤 성의 남자가 적혀 있을지 상상하곤 했다. 김? 김씨는 너무 무난해. 이? 받침이 없어서 좋은 것 같지만 흔한 걸. 연인이 바뀌면 꼭 한 번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겨우 썸을 탄 것만으로 결혼식장 안내판에 떠오를 이름을 그려봤다는 건 남부끄러운 비밀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버릇이 없어졌다. 동화책 속에 얼렁뚱땅 나오는 '그리하여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건 결혼'식'에 대한 이야기고, 진짜 결혼은 그 이후부터라는 걸 알아서였을까. 아니면 결혼은 제도와 약속이라는 걸 어깨너머로 배워서였을까.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해서인가.

나는 지금 연인과는 그런 장면을 상상하지 않는다. 그건 내가 지금 연인을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 더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우겨보고 싶다.

대신 그런 장면을 상상해 본다. 원숭이처럼 내 머리를 헤집기를 좋아하는 연인에게 흰머리 뽑기를 맡기고 설핏 잠이 드는 낮을. 함께 간 터키 여행에서 얻은 그의 발가락 흉터가 옅어지는 걸 보는 밤을. 같이 세월을 잊는 법을 익히는 날을.

더 사랑하면 결혼하고, 덜 사랑하면 동거하나요? - 기혼도 미혼도 아닌 괄호 바깥의 사랑

정만춘 (지은이), 웨일북(2020)


태그:#가정의 달, #결혼,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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