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정상훈씨는 국경없는 의사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인 최초로 에볼라 유행지역에 들어간 '에볼라 구호 의사'입니다. 아래 글은 2011년 11월부터 2012년 9월까지 아르메니아 의료봉사 시절에 만난 한 명의 스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두 사람 모두 많이 울어서 눈이 빨갛다.
▲ 루크 송별식에서 기젤라와 함께 두 사람 모두 많이 울어서 눈이 빨갛다.
ⓒ 정상훈

관련사진보기


새로 오게 될 간호 관리자(Nurse Manager) 소식에, 아르메니아 바나조르 팀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독일에서 정년퇴직하고 이번이 첫 번째 해외 구호활동인 60대 간호사라고 합니다. 팀원들에게 실망의 빛이 스쳤습니다. 한 아르메니아인 동료가 불평합니다. "이곳 북부는 종일 차를 타고 돌아다녀야 하는 곳이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나이 많은 사람을 보내다니. 힘들다고 중간에 또 가버리기라도 하면..." 그들의 반응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날이 왔습니다. 다들 무관심한 척이지만 창문 너머를 힐끔힐끔 쳐다 봅니다. 하얀 눈 천지에 새까만 흙을 뿌리며 사륜구동차가 도착했습니다. 기젤라가 차에서 씩씩하게 뛰어내립니다. 북부 사무실을 대표해서 제가 그녀를 맞았습니다. 그러자 기젤라가 초록색 눈을 반짝이며 저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안녕하세요? 나, 루크랑 밥 먹으려고 왔어요."

아르메니아의 루크
  
국경없는의사회는 아르메니아에서 '다제내성'(multidrug-resistant) 결핵 환자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다제내성 결핵은 중요한 몇 가지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결핵균 때문에 생깁니다. 당연히 치료하기 힘든 병입니다.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와 중동 사이 카프카스 산맥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90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소련)에서 분리 독립한 아르메니아는, 인구 300만 명의 작고 가난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다제내성 결핵 치료는 돈이 많이 듭니다. 한 움큼 되는 약을 길게는 2년 동안 먹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국경없는의사회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해외 현장에서 '루크'로 불린 저는, 아르메니아 결핵 사업에서 바나조르를 중심으로 한 북부 지역의 의사 관리자(Doctor Manager)였습니다. 말 그대로 여러 명의 아르메니아인 결핵의사를 관리하는 것이 제 임무였습니다. 하나의 사업은 대개 저와 같은 소수의 해외 자원활동가들과 훨씬 더 많은 현지 인력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북부 지역에는 두 달 넘게 간호 관리자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결핵은 참으로 무섭고 특이한 병입니다. 이 병은 사람의 폐뿐만 아니라 마음, 관계, 지역사회까지 갉아먹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든든하게 붙잡아줄 관계망이 약한 사람일수록, 쉽게 결핵으로 고통받습니다. 그래서 결핵을 '가난한 이들의 병'이라고 부릅니다.

의사가 처방하는 약만으로는 절대 고칠 수가 없습니다. 간호사, 약사, 심리상담사, 사회복지사 등 전문가들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의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문 인력을 관리하는 자리가 바로 '간호 관리자'였습니다.

깨져버린 팀
 
예레반에서 바나조르 가는 길에 직접 찍음.
▲ 황량한 아르메니아의 모습 예레반에서 바나조르 가는 길에 직접 찍음.
ⓒ 정상훈

관련사진보기


저는 기젤라보다 4개월 먼저 바나조르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두 명의 해외구호활동가가 있었습니다. 인도 출신 A는 북부 사업 책임자였습니다. 저보다 일주일 먼저 근무를 시작한 간호 관리자 B는 미국 출신 간호사였습니다. 스무 명이 넘는 아르메니아인 동료들과 일을 하려면, 한 숙소에서 지내는 세 사람의 팀워크가 중요하겠죠.

그런데 분위기가 묘했습니다. 일이 끝나면 두 사람은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환영식' 같은 것을 기대한 저는 좀 무안해졌습니다. 저 역시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북부 사업에 관해 가장 빨리 배우는 방법은 A, B 두 사람에게 묻는 것이었겠죠. 하지만 저 역시 퇴근하면 제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았습니다. 대화는 우리가 주고받는 이메일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두 달쯤 지난 어느 월요일 아침, B는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이메일로 밝혔습니다. 저는 놀랐습니다. B가 그런 결정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B는 다제내성 결핵 환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힘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B가 나와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다시 한 달 후 A가 아르메니아를 떠났습니다. A와 본부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을, 시간이 흐르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르메니아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세 달 만에, 저는 사실상 북부 지역에 혼자 남겨졌습니다. 남은 빵으로 저녁을 때우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기젤라의 초대
   
기젤라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금방 따뜻해졌습니다. 기젤라는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조르 직원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들과 기젤라는 어느새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주로 경비나 운전을 맡는 무뚝뚝한 남성 직원들에게는, 함께 담배를 피우며 말을 걸었습니다. 그녀의 영어는 어휘가 풍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기젤라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기젤라에게는 정신 없었을 첫 주가 지나가고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제 방에 있는데, 맛있는 음식 냄새가 주방에서 솔솔 풍깁니다. 기젤라는 손수 만든 저녁 식사에 저를 초대했습니다. 샐러드와 빵, 오븐구이 닭요리와 포도주가 차려졌습니다. 아르메니아에 도착한 지 4개월 만에 누군가와 느긋한 식사 그리고 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흡연자가 아니지만, 기젤라에게 담배를 몇 개비 얻어 피웠습니다. 참 편안했습니다. 아르메니아 사업은 저에게도 첫 해외구호활동이었습니다. 혼자 많이 긴장하고 스스로를 재촉하고 있었나 봅니다.

다음 주 토요일 오후,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저는 주방으로 내려가, 기젤라에게 요리 준비를 돕겠다고 말했습니다. 대한민국의 흔한 40대 남성이었던 제가, 할 줄 아는 요리라고는 라면뿐이었죠. 기젤라 덕에 스파게티 정도는 쉽게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행복을 위한 선택

주말이면 우리는 장도 함께 보았습니다. 그리고 기젤라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20대에 서독 공산당원이었습니다. 1960년대면 '미소 냉전'이 한창일 때입니다. 그런데 1969년 소련이 체코 프라하를 침공하자, 그녀는 바로 공산당에서 탈당했습니다. 그 이후 평범한 간호사로 살아왔습니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불행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에 대해 말을 아꼈지만, 그가 가족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간호사 생활을 하며 그녀가 두 아들을 키웠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우리 엄마가 떠올랐습니다. 공교롭게도 기젤라와 우리 엄마는 동갑이었고, 아들 둘인 것도 같습니다. 기젤라는 남편과 오랫동안 별거 중이었습니다. 자식들은 성인이 되었고 자신은 정년퇴직하게 되자, 기젤라는 스스로 행복해지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해외구호활동이었습니다. 그녀가 부러웠습니다. 우리 엄마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아르메니아 근무를 마치면, 남편과 이혼할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젤라의 송별사
 
가운데 유일한 아시아인이 필자.
아랫줄 좌측에서 네번째가 기젤라
▲ 국경없는의사회 아르메니아 북부 사업 팀원들 가운데 유일한 아시아인이 필자. 아랫줄 좌측에서 네번째가 기젤라
ⓒ 정상훈

관련사진보기


기젤라는 북부 사업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동안 유명무실했던 '북부 지역 활동가 간담회'를 정기적으로 다시 연 것도 그녀의 아이디어였습니다. 해외활동가든 아르메니아인이든 소통이 더 필요하다고 그녀는 강조했습니다. 다제내성 결핵 환자들은 종종 치료를 거부합니다. 저는 의사로서 당연히 '다제내성 결핵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경고나 '위협'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환자들도 있습니다. 그런 환자들을 끈질기게 만나서 설득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기젤라와 그녀의 팀 덕분이었습니다. 북부는 마침내 하나의 팀이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제는 제가 아르메니아를 떠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어느덧 9개월이 흘러버렸습니다. 북부 사람들 모두 모인 송별식에서, 저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습니다. 제가 살렸던 그리고 살리지 못했던 환자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환자가 치료를 거부하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사륜구동차를 타고 아르메니아의 황량한 고원지대를 함께 달렸던 아르메니아 동료들을 어찌 잊을까요? 그리고 기젤라의 송별사. 저는 그녀의 송별사를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너무 많이 울었거든요. 단 한 문장만 기억납니다. "I am loosing my muscle." 저 역시 기젤라가 제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함께 만든 요리법이 적힌 공책을, 기젤라는 저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태그:#스승의날, #국경없는의사회, #동네의사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