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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당시 백선엽 육군소장 (1951. 8. 13.).
  한국전쟁 당시 백선엽 육군소장 (1951. 8. 13.).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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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이 논란이다. 보훈처가 백선엽 사후 현충원 안장 문제를 가족과 협의했다는 내용을 조선일보가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6·25 전쟁 영웅에 현충원 1평도 내줄수 없다니..." 5월 27일자)로 내보낸 이후 논란이 불거졌다.

미래통합당 의원들은 6·25 전쟁영웅에 합당한 대우를 하라며 반발하고 나섰고 민주당 의원들은 백선엽의 친일 경력을 언급하며 현충원 안장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며 여야가 대립하는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정치권 외에도 전직 장성들 모임인 성우회는 "백선엽 장군에 대한 매도는 국군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했고 조선일보는 "백선엽 장군이 현충원에 못 간다면 더 이상 대한민국이 아니다"라는 제하의 사설을 내며 논란을 부추겼다(5월 28일자).

그런가. 백선엽이 현충원에 가고 못 가는 하는 문제가 국군을 부정하고 대한민국을 부정할 만한 일인가.

51년 겨울 백야사

현재 진행되는 논란에서는 백선엽의 친일 문제가 주되게 부각되고 있으나 한국전쟁 당시 백선엽의 공(功)과 과(過)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백선엽이 일제강점기 간도특설대에 복무하며 항일운동을 탄압한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본인은 실제 독립군을 토벌하지는 않았다고 항변하나 만주와 간도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무력으로 진압하며 전투를 수행한 간도특설대의 임무 특성을 고려하면 설득력이 없다. 백선엽 본인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해방 후 백선엽은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일본군에서 얻은 군사경험을 발판으로 승승장구했다. 국방경비대 정보처장으로 여순사건 후 숙군을 주도했으며 5사단장, 1사단장을 거쳐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준장으로 진급했다. 휴전회담 당시에는 남측 대표로 나섰고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53년 1월 한국군 최초의 대장이 되었다. 전쟁 후 육군대학 총장, 육군참모총장을 거치며 군의 최고 지위를 누렸고 퇴역 후에도 중국 및 프랑스 대사, 교통부장관 등을 지냈다.

백선엽이 이 같은 영화를 누린 가장 큰 이유는 한국전쟁 당시 그의 공이다. 그를 영웅으로 칭송하는 전직 장성들, 보수 언론들은 다부동전투와 평양 최초 입성 등을 그의 업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그가 한국전쟁 중 수행한 임무와 전투의 과정에서 과는 없었을까? 필자가 최근 만난 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의 유족은 인터뷰에서 백선엽이 지휘한 부대가 자행한 학살을 말했다.

1951년 겨울 국군과 경찰 등 3만여 명 이상으로 구성된 대규모 토벌군은 지리산 일대를 에워싸며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 작전을 벌였다. 작전명은 '쥐잡기작전(Operation Rat Killer)'이었으며 토벌군의 명칭은 '백선엽야전사령부(백야사, Task Force Paik)'였다. 백야사는 일본군이 만주에서 사용했던 초토화작전 방식으로 토벌을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당시 전쟁을 피해 산에 숨어있던 조재현(당시 9세) 가족은 밀려오는 토벌군을 피해 도망쳤으나 할아버지는 군인에게 잡혀 몽둥이로 맞아 온 몸이 다 부서져 사망했다. 옆에서 2살배기 아이를 안고 있던 작은 숙모는 남편 어디 갔느냐는 질문에 대답을 안 한다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안고 있던 아이도 함께 죽었다. 다른 방향으로 도망갔던 할머니와 숙모, 6살 사촌동생은 토벌군에게 붙잡혀 광주포로수용소로 보내졌으나 열악한 처우로 모두 병들어 죽었다.

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통해 진실이 규명된 사건 중 '대하리 피란민 일가족 희생사건'이라 명명된 사건의 내용이기도 하다(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5권 경남 산청·거창 등 민간인 희생사건 중).

그뿐 아니다... 5사단장일 때도, 1사단장일 때도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 회원들이 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앞에서 규탄 집회를 열고 김진호 회장의 사퇴와 백선엽 장군의 훈장박탈 등을 주장하고 있다.
 2019년 7월 3일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 회원들이 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앞에서 규탄 집회를 열고 김진호 회장의 사퇴와 백선엽 장군의 훈장박탈 등을 주장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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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백야사의 전과가 사살 7천여 명, 생포 6천여 명에 달했으며 이는 당시 육군본부가 예상했던 빨치산의 수 3천 명을 훨씬 넘는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백선엽은 같은 글에서 미군의 자료를 언급하며 "예상보다 훨씬 많은 게릴라가 있었거나 무고한 주민들이 소탕망에 걸렸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는 기록에 대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고 적었다(실록 지리산 - 백선엽 육필증언록 - 1992).

백야사에 의한 희생만 있었을까? 한국전쟁 발발 전 백선엽이 5사단장을 지내고 있을 때에도 지휘하던 부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있다(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중 제3권 광양지역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 중 5사단 15연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들). 1950년 10월 초 수복작전을 전개하던 1사단(사단장 백선엽) 역시 여러 건의 민간인 학살사건을 저질렀다(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3권 충북지역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 중 1사단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들).

어떤 사람들은 반란군에게 협조했다며 사살되었고, 밥을 해주었다고 살해되었고, 입산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인민군 점령 하에서 부역했다고 사살되었고, 머리를 깎아 인민군 패잔병으로 보인다며 살해되었고, 심지어 국방색 옷을 입어 수상하다는 이유로 죽었다.

설사 백선엽 본인은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말레이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악명 높은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일본 육군 제25군 사령관으로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다. 야마시타는 부하에게 학살을 지시하지 않았고 범죄행위에 대한 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재판부는 상급자가 대규모 범죄를 지시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또한 상급자의 지시에 불응한 하급자가 독단으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도 이에 대한 책임이 상급자에게 있음이 명백하다고 판결하며 전쟁범죄의 책임을 물었다('학살, 그 이후의 삶과 정치', 2018, 한성훈).

백선엽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백야사 당시 발생한 반인권적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지금도 백 야전사 작전 당시 비인도적 행위를 했던가를 자문해보지만 한 점도 하늘에 부끄러운 일은 없었다고 늘 자부하고 있다"
- <실록 지리산 –백선엽 육필증언록>(1992)
 
올 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되는 해다. 전쟁을 다시 기억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죽음과 고통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일각에서 전쟁영웅이라 불리는 한 인물을 어디 묻을지 왈가왈부할 때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가 현충원에 못가는 것이 국군이나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이라 목청 높일 문제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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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 대한 감시와 비판적 제언'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Civilian Military Watch)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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