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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옥영 시집 <추억의 풀무질>
 최옥영 시집 <추억의 풀무질>
ⓒ 최옥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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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조차 까딱하기 싫은 / 화창한 봄날 아침'을 맞아본 적이 언제였던가? 아마도 올해는 그런 아침이 없었던 듯하다. 코로나19 탓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생소한 명제는 평범한 시민에게 외출 자제를 명령했고, 대부분 도시에 거주하는 현대인들은 주로 아파트에 갇힌 채 반감금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봄이 왔는지, 꽃이 피는지 느낌도 잡히지 않았고, 설혹 창 밖으로 봄빛이 스며든다 해도 마음은 그것의 감흥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봄을 다 흘려보내고 있을 즈음에 '꽃비가 오거나 눈보라가 치거나 / 또 가야 한다 / 목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 그저 산책일 뿐'이라며 '지금 여기서 하찮은 것이라도 /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행복해야 한다(시 〈나른한 오후의 산책〉 일부)'는 어느 시인의 직관이 찾아왔다.

10년 만에 펴낸 시인의 새 시집
 
 최옥영 시인
 최옥영 시인
ⓒ 최옥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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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옥영 시인의 <추억의 풀무질>이 바로 그것이다. 10년 전에 낸 <덧없는 반추>에 이어 두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1994년부터 시작 활동을 시작했고, 문학예술 신인상을 받았다. 그는 본래는 시인이 아니라 화가로, 현재 대구원로미술인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곧 죽을 것만 같던 만신창이 몸을 이끌고 어느덧 팔순을 바라보는 시절을 살게 되었습니다. 인생사 일장춘몽이라 하지만 일희일비하며 지나온 시간들은 고난과 기쁨이 뒤섞여 무척도 긴 시간들이었습니다. (중략)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부질없는 결과물인 줄 알지만 마지막까지 붓을 들고 쓰러지고 싶을 뿐입니다."

시집 권두에 실려 있는 '시인의 말'을 듣고 나서 차례를 살피고, 이어서 책의 순서대로 시를 감상해 본다. 시인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행복해야 한다'라고 했다. 긴 코로나19 기간 동안 줄곧 책을 읽고 글을 썼는데, 최옥영 시인으로부터 한 수 배운다. 지나간 세월에 쌓인 추억을 하나하나 풀무질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시 〈추억의 풀무질〉을 여러 번 되풀이하며 읽어본다. 겨울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는 답답한 마음 속에 '어서 새 봄이 왔으면' 하는 기대감을 일으켜 주어서 좋다. '한 치 땅도 없는 자에게 / 빼앗길 것 있으랴 / 그저 봄을 기다릴 뿐(시 〈동토의 밤〉 일부)'…

검푸른 겨울 하늘에서
벌떼처럼 지상으로 내려오는
추억의 하얀 무늬를 보세요

어떤 것은 흰 무명 옷깃으로

아득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어떤 것은 여름날 고향 마을
초가지붕 밝히던
달밤의 하얀 박꽃으로
그리움을 풀무질하는
추억의 무늬를 눈여겨 보세요

오랫동안 잊고 지내 온
아득한 우리들의 소식을
지상에 쌓고 있는
순백의 강설

추억을 풀무질하며
소리 없이 찾아오는
저 순백의 무늬를 좀 보세요  


시인은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눈을 맞이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순백의 강설 속에 깃들어 있는 무늬를 본다. 얼핏 같은 듯 여겨지지만 사실은 모두가 조금씩 빛이 다르고, 결이 다르고, 느낌이 다른 눈발들이다. 눈발마다 제각각 색다른 추억이 있고, 남다른 소식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은 안다.  
시인은 그 소식들이 지상에 쌓이고 있는 정경을 응시한다. 눈발 하나 하나에 깃들어 있는 추억을 풀무질하면서 오랫동안 잊고 지내온 지난 날을 돌이켜본다. 흘러간 시간도 아득하지만 그 날들을 소리 없이 눈여겨 보고 있는 내 마음도 아득하다.

봄은 왔는가 싶지도 않았는데 벌써 6월

코로나 사태에 묻혀 봄은 하염없이 흘러가고 어느덧 6월이 되었다. 최옥영 시인의 6월은 어떤가? 여전히 코로나는 계속되고 있고, 벌써 섭씨 30도를 넘어가는 탓에 가슴이 답답한데, 시인은 여전히 시 〈갈방산〉을 통해 아득한 지난 날의 추억을 아늑하게 들려준다. 

6월이면
밤꽃 흐드러지는 마을
홀로 우뚝 선 당산나무 사이로
아득한 유년의 기억들이
달빛으로 피어나네

갈방산 등성이도
푸른 숲들도 일어서서 손짓하는
감미로운 훈풍의 품속

지난날 동심을 수놓던
푸르른 풀밭 사이로
초췌한 어머니의 쉰 목소리

지금도 갈방산 넘어 바람에 실려
메아리로 들리네


〈추억의 풀무질〉이 '추억'이라 한 것들을 이 시는 '기억'이라고 바꿔서 말한다. 머리와 가슴에서 사라진 일들은 추억이 될 수 없으니 〈추억의 풀무질〉의 '추억'과 〈갈방산〉의 '기억'은 그 함의가 같다. 그래서 두 시는 한결같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고, 어머니를 회상한다.

지도를 보면 갈방산은 경상북도 상주에 있다. 최옥영 시인의 고향이 그곳이라면 시 속의 갈방산은 상주 갈방산일 것이다. 하지만 독자에게는 꼭 그 산이 갈방산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세잔이 자신의 고향 프로방스의 진산을 소재로 수십 점의 〈생트빅투아르 산(La Montagne Sain te Victoire)〉을 그렸듯이, 독자들은 시인의 〈갈방산〉을 읽으며 제 각각 자신의 고향 산을 떠올려도 무방하다.

추억을 돌이켜보면 행복하다

왜 그런가? 최옥영 시인은 '하찮은 것이지만 / 나는 마음껏 노래한다'면서 그것을 〈시인의 권리〉라고 했다. 독자도 마찬가지다. 김춘수는 자신의 〈꽃〉을 '무의미 시'라 했지만 많은 독자들은 그것을 연애시로 읽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독자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뉴스에는 코로나 이야기가 여전하다. 어제처럼 오늘도 밖에 나가지 않고 책을 읽었다. 다만 어제까지와 달리 '하찮은 것' 한 가지를 더 실천했다. 최옥영 시인의 말대로 추억을 풀무질하며 하루를 보내 보았다. 그랬더니, 시인의 가르침처럼 '행복하다'.

덧붙이는 글 | 최옥영 시집, <추억의 풀무질> (그루, 2020년 5월 15일), 111쪽, 9천 원


추억의 풀무질

최옥영 (지은이), 그루(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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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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