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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경영 승계 의혹을 받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8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 굳은 얼굴로 법정 나서는 이재용  불법 경영 승계 의혹을 받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8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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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일단은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됐다. 9일 새벽 원정숙 서울중앙지방법원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경영권 불법승계 혐의를 받는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했다. 최지성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부회장)과 김종중 전 미래전략실 전략팀장(사장)에 대한 구속영장도 기각했다.

원 판사는 영장 기각 사유로 "불구속 재판의 원칙에 반(反)하여 피의자들을 구속할 필요성 및 상당성에 관하여는 소명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었다. 인권 보호를 위한 불구속 재판 원칙을 깨트리면서까지 피의자를 구속하기에는 검찰 측 자료가 충분치 않다고 본 것이다.

이 부회장이 구속 위기를 일단은 면했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일단은'에 불과하다. 여전히 안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영장 판사가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은 범죄의 입증에 관한 소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구속 필요성 및 상당성의 입증에 관한 소명이 부족해서다.

영장 판사는 "기본적 사실관계는 소명됐다"면서 "검찰은 그간의 수사를 통하여 이미 상당 정도의 증거를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검찰측 증거가 피의자를 구속할 필요성은 입증하지 못해도 범죄 혐의를 입증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안심은 이르다 

이재용 부회장이 안심할 수 없는 이유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검찰이 확보한 증거보다 훨씬 강력한 게 있다. 이병철-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3대를 관통하는 거시적인 흐름이 지금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현대사와 뒤엉킨 이 집안의 흐름을 추적해 보면, 지금 이들이 얼마나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삼성그룹이 한국 1위 재벌로 우뚝선 1950년대 후반 이래로, 크게 3차례의 '성공한 시민혁명'이 있었다. 1960년 4·19혁명, 1987년 6월항쟁, 2016년 촛불혁명이 그것이다.

한국 경제 역사에서 유일한의 유한양행처럼 정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일어선 재벌기업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런 풍토에서 선거가 아닌 민중혁명 또는 대격변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면 정권과 유착한 재벌 역시 도태되거나 약해지기 마련이다.

친일파 김성수·김연수와 연관된 삼양그룹이 해방 뒤에 위축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일본제국주의 패망으로 괴뢰국 만주국이 멸망한 데다가 38선 이북이 공산권에 넘어가면서, 삼양그룹은 북한과 만주에 투자한 막대한 자본을 상실하고 힘이 약해졌다.

민중혁명이나 대격변으로 정권이 무너지면 정권과 유착했던 기업 역시 덩달아 쇠망하는 패턴은 삼성그룹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4·19혁명 뒤 이재용 부회장의 할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이 일생 일대의 위기에 직면하고, 촛불혁명 뒤 이재용이 법원을 자주 출입하는 것은 삼성 역시 이 패턴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4·19, 6월항쟁, 촛불혁명과 삼성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부터)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부터)
ⓒ 삼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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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6월항쟁 뒤에는 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일까? 이 부회장이 촛불혁명에 즈음한 시기에 경영권을 승계했듯이, 이건희 회장 역시 6월항쟁이 있었던 1987년에 경영권을 이어받았다. 그런데도 당시 이건희 회장에게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이는 1960년 및 2016년과 달리 1987년 시민혁명은 정권 교체로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은 6월항쟁에 굴복해 6·29선언(직선제 개헌)을 하기는 했지만, 김대중·김영삼을 분열시켜 그해 12월 대통령선거에 승리함으로써 정권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전 정권과 유착했던 재벌 기업들은 그 덕에 화를 비껴갈 수 있었다.

하지만 1960년은 달랐다. 1년 뒤의 5·16 쿠데타로 모든 게 뒤집어지기는 했지만, 4월혁명 당시에는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몰락으로 인해 재벌기업들도 위기에 처하게 됐다. 해방 뒤에 이승만 정권과의 밀착으로 승승장구한 이병철의 삼성그룹은 특히 그러했다.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인 <호암 자전>에 따르면, 그는 아버지가 준 3백석 토지로 24세 때인 1934년부터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정미소·운수업·토지투자 등으로 돈을 번 뒤,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개업했다. 그가 서울로 옮겨 삼성물산공사를 세운 것은 해방 3년 뒤인 1948년이다. 그 뒤 그는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하고 이를 발판으로 이승만 정권 말기에 최대 재벌 반열에 올랐다.

<호암 자전>에서 이병철은 이승만을 우리 역사의 몇 안 되는 위인으로 손꼽았다. 그는 이승만을 세종대왕 및 이순신과 동급의 인물로 높이 평가했다.

"어떻든, 소상한 기록이 없는 신라·고려시대는 접어 두더라도, 근세에 와서 세종대왕이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국민들은 한결같이 숭앙하지만, 그분들 못지않게 이 박사도 민족의 역사에 크나큰 발자취를 남겼다."

기록이 적은 신라·고려 시대에는 이승만보다 나은 인물이 있을지 모르지만, 조선시대 이후로는 세종과 이순신 정도가 이승만에 필적할 수 있다는 게 이병철의 말이다. '그분들 못지않게 이 박사도'라는 표현에서 이병철이 이승만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느낄 수 있다.

이승만과 이병철의 관계
 
이화장 집무실 풍경.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 소재.
 이화장 집무실 풍경.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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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이 이승만을 이렇게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승만이 그의 은인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삼성의 역사에 '크나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적어도 삼성 역사에서만큼은 위대한 인물일 수밖에 없다.

이승만은 이병철 가문과 인연이 깊었다. 2004년에 <경제와 사회> 제64호에 수록된 김주환 경기대 교수 논문 '한국사회 재(財)-재 갈등의 언(言)-언 갈등으로의 전환'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병철과 이승만의 인연은 그의 부친과 이승만의 관계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병철의 부친 이찬우는 조선조 말 이승만이 독립협회에 가담해 활동할 때부터 친교가 있었다."

<호암 자전>에 따르면, 해방 이후부터 정부 수립 이전 사이에 이병철(1910년 생)이 사전 연락도 없이 이승만(1875년 생) 자택인 이화장을 불쑥 방문한 일이 있다. 이 시기의 이승만은 아직 대통령은 아니지만, 거의 그 위치에 도달해 있었다. 그런 이승만을 불쑥 방문할 정도로 이병철은 이승만과 세대를 뛰어넘는 친분을 갖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이승만이 미국발(發) 전보를 보여주며 '남북분단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정치적 속내를 보여준 일도 있다고 <호암 자전>은 말한다. 이런 인연은 이승만의 삼성 지원으로 이어졌고, 이는 삼성이 대규모 기업집단으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됐다.

이승만이 삼성을 지원한 것은 그 가문과의 인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삼양그룹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이승만이 삼양을 견제한 것은 삼양이 일본제국주의와 연관됐기 때문은 아니다. 친일파 경찰 및 관료들과 손잡고 분단정부를 수립한 이승만이 그런 이유 때문에 삼양그룹을 싫어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가 삼양을 싫어한 것은 삼양이 자신의 라이벌인 김성수와 한국민주당(한민당)의 자금줄이었기 때문이다. 삼양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이승만은 이병철의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적극 지원했다. 이것이 삼성이 삼양을 제치고 최대 재벌로 올라선 디딤돌이었다.

삼성의 위기로 이어진 이승만 정권의 몰락 
 
서울 서초구 삼성 서초사옥 모습.
 서울 서초구 삼성 서초사옥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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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삼성을 지원한 것은 아니다. 2018년 1월 9일자 <미디어오늘>에 실린 김춘효 자유언론실천재단 기획편집위원 기고문 '삼성재벌, 한반도의 국제 정치경제학 산물'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승만은 제일모직 운영에 필요한 자금과 기계설비 수입 등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시중의 4개 국영은행 중 3개를 민영화하면서 삼성에게 은행업을 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는 점이다). 이 같은 특혜의 댓가로 이승만 정권은 대략 10~20% 정도 액수를 리베이트로 받았다."

이승만 정권의 온갖 부조리는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집약됐다. 4월혁명의 촉매제가 된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 독재의 압축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삼성그룹 역시 3·15와 관련됐다는 혐의를 피할 길이 없었다.

삼성과 3·15의 연관성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마자 도마 위에 올랐다. 1960년 5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 '부정선거 자금에 어마어마한 흑막'은 "3·15 부정선거를 강행하기 위하여 사용된 150억환의 자금 출처를 수사 중인 서울지검 이용훈 검사는 5일 하오 자유당 박용익 총무위원장, 제일은행 이기호 은행장, 산업은행 강원기 부총재를 환문하여 자금의 출처, 염출 방법, 소비처 등을 추궁하였다"고 한 뒤 이렇게 보도했다.

"검찰은 자유당에 선거자금을 바친 것으로 알려진 중앙산업, 삼호방적, 대한양회, 고려모직, 기아산업, 동립산업, 대한중기, 삼성물산 등 국내의 유수한 산업체와 거상들의 일부 장부와 산업은행 등 시중 금융기관의 자금 배정 서류 등도 압수하고 수사하고 있다."

삼성 등이 제공한 선거자금의 용처와 관련해 위 기사는 "부정선거를 감행하기 위하여 모 기관 등에는 최고 1억 대씩이나 돈을 뿌린 곳도 있으나, 말단에서 야당 참관인을 투표소 밖으로 쫓아낸 깡패들에게는 양복 한 벌과 구두 값으로 5만환 정도씩 뿌려진 것이라 한다"고 보도했다.

이런 식으로 이승만 정권을 지원하고 또 그 도움을 받아 기업을 일으켰기 때문에, 삼성은 4·19 혁명 과정에서 부정축재 1호 기업으로 낙인 찍히며 사회적 지탄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정경유착으로 돈을 번 기업이 보호자를 잃었으므로, 크게 위축되거나 도태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1년 뒤 5·16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삼성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과거의 존재'로 희미하게 남았을지도 모른다. 이병철 역시 감옥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다.

이병철-이건희-이재용 3대 이래 최대 위기

지금 이재용 부회장이 처한 위기는 크게 보면 할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병철은 정치권력과의 유착에 힘입어 내 것도 아닌 것을 내 것처럼 소유하며 거대 재벌로 성장했다. 이런 흐름이 손자 대까지 이어져, 삼성그룹 전체를 소유할 자금이 없는 이재용이 그룹을 불법 승계했다는 의혹을 받는 지금의 사태로까지 연결됐다.

이재용의 위기는 할아버지로부터 연원했을 뿐 아니라 할아버지의 위기보다도 훨씬 중대하다. 그런 점에서 이 집안의 사상 최대 위기라 할 수 있다. 할아버지 때는 5·16 쿠데타라는 '기적' 덕분에 화를 모면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기적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촛불혁명이 4년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기적'이 벌어질 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1882년 임오군란 이래의 전국적 민중항쟁이나 대격변에서, 민중과 보수권력이 일대일로 대결하면 민중이 절대로 지지 않았다. 외국 군대가 개입한 경우에만 보수가 상황을 역전시키며 권력을 지켰다.

하지만, 6월항쟁을 계기로 '한국 내부문제에 미군을 개입시키지 않는다'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공고해진 데다가 오늘날의 미국은 한국 문제에 개입할 여력도 없기 때문에, 지금의 한반도 정세가 외국군에 의해 뒤집어질 가능성은 아주 낮다. 이는 이재용이 할아버지 때의 기적을 누리게 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재용이 내려야 할 최선의 판단은 하루 속히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지금 논의되는 불법 경영권 승계을 떠나, 불법적인 그룹 '소유'에 대해서까지도 참회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놓지 않고는 지금의 위기를 피해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사의 발전 방향과 지금의 사회 분위기를 볼 때, 6월 9일의 구속영장 기각은 일시적인 희(喜)에 불과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집안을 감싸는 역사의 기운이 지금 이들에 대해 반성과 참회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태그:#재벌 개혁, #삼성그룹, #이재용, #경영권 불법승계,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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