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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존중받는 경기도를 만들겠습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취임 일성이다. 민선 7기 출범 2년을 맞은 이재명 지사의 친노동 정책이 주목받고 있다.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처음으로 노동국을 신설한 이 지사는 지방정부의 노동경찰권 확보를 요구하고 있다.

“노동하면서도 노동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시절을 심장에 담고 있다”는 ‘소년공 출신’ 이재명 지사. 그의 노동 문제에 대한 고민은 31년 전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 소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와 함께 활동했던 김재기(59)씨를 만나, ‘노동운동가 이재명’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편집자말]
 
 김재기(59.경기도 노인일자리지원센터 센터장)씨가 31년 전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함께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를 운영했던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
 김재기(59.경기도 노인일자리지원센터 센터장)씨가 31년 전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함께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를 운영했던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
ⓒ 경기도 권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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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 잔 마시던 밤, 덜컥덜컥 기계 소리 귓가에 남아~~."

작은 방에 따닥따닥 붙어 앉아 있던 20여 명의 노동자 사이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노래를 마친 이재명 변호사가 "저는 공장에서 이미 이렇게 됐습니다. 손등은 미싱(재봉틀)이 반복해서 찍는데도 모르고 (구멍이 났고), 프레스에 눌려서 (한쪽 팔은) 바보가 됐습니다"하면서 자신의 팔을 보여줬다.

이 변호사의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방 안은 울음바다가 됐다. 이 변호사가 자리에 앉자, 노동자들이 돌아가면서 저마다 한 맺힌 사연을 봇물 터지듯 쏟아내기 시작했다.

1989년 초여름 어느 날, 경기도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가 주최한 1박 2일 워크숍은 경기 동부권 지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분기점이 된다. 이날 노동자들은 노동법률상담소 소장인 이재명 변호사가 청소년기에 중고등학교 진학 대신 공장에 취직했고, 소년 노동자로 6년간 일하던 중 산업재해 사고를 당했지만, 보상과 치료를 받지 못해 팔이 굽는 장애를 입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그리고 노동자로 살아온 자신의 삶이 절대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인간으로서의 권익을 보호받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당시 상담소 간사로 근무했던 김재기씨는 "그날 워크숍을 계기로 10여 개의 사업장(기업)에서 주요 활동가들이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더 열정적으로 활동했다"면서 "그런 과정을 거쳐 87~88년 노동자 대투쟁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광주·이천·여주에서는 뒤늦게 노동운동이 폭발했다"고 설명했다.

[관련 기사 보기]
'노동 존중 경기' 기획 인터뷰 ① - 26살 청년 변호사 이재명의 '노동'과 톱 한 자루


"노동자 권익 지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 동원"

30년 전 이재명 변호사는 현재 경기도지사가 되어 각종 친노동 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는 도지사에 취임하면서 "민주화가 되면 노동자도 대접받는 세상이 올 줄 알았지만, 아직 아니다"며 "OECD 국가 중 산재 사망률 1위, 최장노동시간, 비정규직, 파견직 등 노동 현실을 보여주는 부끄러운 단어들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또한 "민주화의 마지막 과제는 노동과 경제민주화"라며 "도지사에게 주어지는 노동 관련 권한이 별로 없지만,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고 일과 삶이 균형을 이루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30년 전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 소장 시절 노동자·농민의 권익을 위해 벌였던 활동과 경험이 '노동 존중 경기'를 만드는 토대가 된 것이다.
 
 김재기(59.경기도 노인일자리지원센터 센터장)씨가 31년 전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함께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를 운영했던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
 김재기(59.경기도 노인일자리지원센터 센터장)씨가 31년 전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함께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를 운영했던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
ⓒ 경기도 권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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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기씨는 노동법률상담소에서 근무한 이후 수원에서 25년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활동을 한 뒤, 지난해부터 경기도 노인일자리지원센터 센터장을 맡고 있다. 다음은 지난 5일 진행한 김재기씨와 인터뷰 일문일답 중 후반부다.

- 1989년부터 이재명 변호사와 광주·이천·여주 노동자·농민들을 위한 노동법률상담소를 3년간 운영했다. 주로 어떤 활동을 했나?
"우선 약 10여 개 기업에서 자주적인 노조활동을 할 수 있는 분들을 발굴했다. 소모임을 만들어서 매주 어떤 것이 문제이고, 앞으로 어떻게 바꿀 것인지, 노조활동은 어떻게 더 활성화할 것인지 등에 대해 논의를 했다. 그러다 보니 노조가 해야 할 역할, 노동자 권익을 위해 회사에 요구해야 할 것들이 정리됐다.

문화적인 활동도 했다. 이재명 변호사는 노동조합들을 하나로 모으는 데에 문화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풍물패를 만들어 공연도 하고, 그 안에서 활동가로 성장하게 했다. 그때 했던 사람들이 지금도 모임을 갖는다. 그리고 노래패를 모집해서 노동가요도 배우고, 전국 노동자 가요제에 나가서 입상도 했다. 또, 한 화장품 회사 노동자를 중심으로 연극반이 만들어졌다. 노동자들이 연극이라는 것을 통해서 문화 활동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노조에 대한 탄압으로 각박해져 있는 심신이 노래와 연극을 통해서 부드러워지면서 단합력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 노동법률상담소에서 왜 노조 문화 활동을 조직한 것인가?
"우리는 형식적으로 법률상담소였지만, 노동자들의 의식을 높이고 조직화를 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정의로운 활동을 하게끔 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때 사용자 측에서는 그걸 두고 '의식화 사업'이라고 매도를 했다.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었던 것이 영화감상반이다. 당시 광주·이천·여주 지역 노동자, 시민들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오직 '폭도들이나 빨갱이가 배후 조종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때 영화반을 만들어서 제일 먼저 상영했던 것이 (1980년 5월 전남) 광주도청 앞에서 벌어진 학살 장면을 독일의 한 목사가 촬영한 영상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런 걸 상영하면 국가보안법에 걸렸던 시절이다. 저녁에 한 노동자 지하방에 모여서 창문도 가리고 2시간짜리 기록물을 같이 봤다. 탱크가 (광주)시민들을 밟고 지나가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현장이 그대로 찍힌 영상을 가감 없이 보여줬다. 노동자들이 그것을 보고 잘못 알았다는 것을 크게 느끼는 계기가 됐고, 그 해부터는 방문단을 만들어서 매년 (광주광역시) 망월동 5.18 민주묘역을 참배했다. 그런 활동이 굉장히 부담스럽고 위험할 수 있는데, 이재명 변호사한테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라고 해서 크게 힘을 얻었다."

이재명 변호사가 부른 '잘린 손가락'... 민주노조 건설 운동 확대

- 돈이 없어서 법에 호소할 수 없었던 노동자, 농민, 서민들을 위한 무료 법률상담도 많이 하지 않았나.
"노동 문제뿐만 아니라 생활 법률까지도 상담했다. 돈 떼인 사람, 집에서 가정폭력을 당한 사람, 옛날 조상 땅을 찾겠다는 사람 등이 줄을 섰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1차 상담은 우리 간사들이 하고, 꼭 이재명 변호사 면담이 필요한 사람은 이 변호사가 오는 수요일과 토요일에만 하는 것으로 했다. 6개월 정도 지나서 보니까 그렇게 상담한 사례가 100장씩 쓸 수 있는 상담일지 3권이나 되더라. 엄청난 숫자였다. 당시 광주·이천·여주에는 법원도 없고, 변호사 사무실도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 당시 이재명 변호사는 왜 그렇게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가졌을까?
"어느 날 갑자기 사법고시 합격해서 왔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무조건 다 믿을 수 없었다. (성남에서 이천까지) 버스 타고 다니면서 돈도 안 되는데, 오히려 돈을 퍼붓는데, 바보같이 왜 저렇게 하나, 싶었다. 어쨌든 처음 3~4개월 활동하다 보니 (상담소를 찾아오는) 노동자·농민 수가 늘어났다. 어느 날 이재명 변호사가 그 사람들과 1박 2일을 같이 지낼 수 있도록 시간을 정해달라고 하더라. 그게 지금은 워크숍이라고 하지만 그땐 그런 용어도 몰랐다. 그렇게 한 20명 정도 모였는데, 이 변호사가 그날 모임을 직접 리드했다.

'우리가 더 친해지고 믿기 위해서는 서로 뭔가 통하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본인이 먼저 얘기를 하는데, 그때 굉장히 감동했다. 저도 아버지가 8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무장사로서 먹고 살았기 때문에 누이 3명을 포함해서 초등학교 근처도 못 가봤다. 그게 창피해서 그때까지 누구한테 얘기도 못했었다. 그런데 이재명 변호사도 자기는 학교 문턱도 못 가봤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공장에 가서 일을 하다 보니 중학교 나온 형은 시급을 10~20원 더 주더라, 그래서 그걸 더 받으려고 자기는 검정고시 학원에 다녔고, 또 중학교를 졸업해보니 고등학교 졸업한 형은 몇십 원을 더 주더라….

그런 얘기가 굉장히 쇼킹했다. (변호사라더니) 초등학교만 나온 게 전부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변호사가 공장에서 매 맞던 얘기 등을 더 하더니, '나머지는 제가 노래 하나 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면서 생뚱맞게 정말 노래를 부르는 거다. 숙연하게 일어나더니 '잘린 손가락'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잘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 잔 마시던 밤, 덜컥덜컥 기계 소리 귓가에 남아~'. 그러더니 '저는 공장에서 이미 이렇게 됐습니다. 손등은 미싱(재봉틀)이 반복해서 찍는데도 모르고 (구멍이 났고), 프레스에 눌려서 (한쪽 팔은) 바보가 됐습니다', 하면서 자신의 팔을 보여줬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울음바다가 됐다. 그다음부터 노동자들의 사연이 다 터져 나오는 거다."
 
 김재기(59.경기도 노인일자리지원센터 센터장)씨가 31년 전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함께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를 운영했던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
 김재기(59.경기도 노인일자리지원센터 센터장)씨가 31년 전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함께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를 운영했던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
ⓒ 경기도 권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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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명 변호사가 노동자로 살았던 자신의 얘기로 물꼬를 트니까, 거기 있던 노동자들도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당시에는 서로 아픈 얘기를 하는 것이 금기시되거나 부끄러움이 되었다. 그런 걸 얘기하면 무시당한다는 사회적 분위기도 있었고. 그랬을 때 가슴을 열어놓고 진심으로 얘기한 거다. 그렇게 (밤을 지새우고) 아침에 다들 눈이 퉁퉁 부었다. 가슴 속에 있는 자신의 얘기를 어디 가서 해본 적이 없었다. 이재명 변호사라는 사람이 와서 자신의 뜨거운 눈물과 가슴을 보이자, 자기들도 그렇게 살아온 것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 큰 공감대를 이뤘다. 어느새 다 형제, 동지가 된 거다.

상대방의 마음을 여는 게 아니라 본인이 먼저 마음을 열면서 믿음을 줬다. 단순히 형식적인 게 아니고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겠더라. 지금도 곳곳에서 (이재명 변호사의) 그 마음이 드러나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쌈닭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노동자·농민을 사랑하고 가슴으로 느끼는 사람이라는 게. 어쨌든 그 워크숍을 계기로 10여 개의 사업장에서 주요 활동가들이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더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87~88년 노동자 대투쟁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광주·이천·여주에서는 뒤늦게 노동운동이 폭발한 거다."

- 그 워크숍이 그 지역 노동운동에서 중요한 하나의 사건이었고, 현장이었는데.
"(민주노조가) 많이 활성화되고 활동가가 늘어났는데, 그 대가는 혹독했다. 예를 들어 당시 현대전자가 생산직에 있던 노동자들을 어느 날 본사로 발령 내버렸다. 반도체 만드는 생산직 노동자들에게 본사에서 영업하고 기획을 하라는 것이다. 회사에서는 그동안 일 열심히 했기 때문에 보상 차원에서 보낸 거라고 하지만, 이미 기획 업무나 영업 업무는 고도화되어 있는 전문영역이기 때문에 생산직 노동자들이 할 일이 없다. 사실상 그만두라는 거다."

감시·회유·압박·구속, 거세진 탄압... "감당하기 어려웠다"

-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더 거세졌다고?
"그렇다. 일부는 (스스로) 그만두고 나가기도 하고, 개별적으로 회유를 당하기도 하고, 일부는 해고되고. 이천·여주 지역에서 노조 활동을 하다가 해고자가 속출한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동안 해고자라고 하면 사고를 치거나 근무 태만으로 잘린 것이지, 노조 활동을 한 사례가 전혀 없었다. 물론 노조 활동 때문에 해고하면서도 핑계는 다 엉뚱하게 얘기했지만. 그렇게 혹독한 시련을 겪고도 마무리가 안 되니까, 이천에 또 초유의 사건이 터졌다. 노동자 3명이 한꺼번에 구속을 당한 거다."

- 구속당한 이유는?
"노조 활동 하던 친구들인데, 말도 안 되는 이유였고, 사실상 이재명 변호사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일단 노동자들을 구속해서 (이재명 변호사 등과) 차단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구속된 노동자들이 상담소에 몇 번 갔다 오고, 누구를 만나고, 이재명 변호사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 다 알고 있었다. (경찰이 제시한) 사진을 보니까 거기에 (구속된 노동자들이) 다 있었다고 한다. 파출소 앞에서 전부 찍힌 거다. (경찰서에 끌려) 가서 보니까 자기들도 모르는 사진을 그들이 다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경찰이) '이러다 큰일 난다, 너희 감방 살아야 한다'고 (회유와 압박을 했다). (구속된 노동자들이) 농촌 지역에서 공장 다니다가 구속영장을 언제 받아봤겠나. 그 친구들이 얼마나 겁이 났겠나. 그런 식으로 노동자 십여 명이 여러 사업장에서 구속되고, 또 농민 활동가들을 상대로 수시로 그 부모님과 가족을 공략해서 회유하고 협박하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결국, 일부는 그만두기도 하고, 일부는 끝까지 남기도 했고…. 그 결과는 참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김재기(59.경기도 노인일자리지원센터 센터장)씨가 31년 전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함께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를 운영했던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
 김재기(59.경기도 노인일자리지원센터 센터장)씨가 31년 전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함께 광주·이천 노동법률상담소를 운영했던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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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법률상담소가 3년 만에 문을 닫은 이유는 무엇인가?
"두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3년이 지난 뒤에) 간사들을 비롯해 노동 활동가들이 (지역에) 형성이 많이 되었다. 그런데도 (이재명 변호사가) 이렇게 자주 와서 도움을 주고, 지속해서 활동하는 것을 우리가 계속 받아야 하느냐, 이제는 우리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고민이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가야 하느냐, 바람직하지 않다, 그게 첫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재명 변호사가 성남에서 변호사 일을 하면서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이만큼 했으면 우리가 독립해야 한다, (이재명 변호사를) 놓아줘야 한다고 결정한 것이다.

이재명 변호사를 만나서 '이만큼 했으면 당신 역할은 충분했다. 우리가 홀로 서야 한다. 이제 지켜봐 달라'고 했더니, '아직도 미흡한데 되겠습니까?', 그러더라. 믿어보라고, 몇 번의 말씀을 드린 뒤에야 (이 변호사가) '그렇게 하십시다. 어려울 때 또 얘기하십시다'고 해서 마무리가 됐다. 그 뒤에도 (이 변호사는) 중요한 상담이 있으면 꼭 (이천으로) 내려왔다."

- 31년 전 일이기는 하지만 경기 동부지역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획을 그었던 이천 노동법률상담소 얘기가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왜 그런 것 같나?
"저도 이런 얘기를 오늘 처음 하는 거다. 그때는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게 자랑일 수 없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괜찮지만, 과거에는 그런 운동을 했다는 것이 논란이 되는 일도 많았다. 그것은 그냥 가슴 속에 좋은 동기로 남아야지. 그걸 했다고 하는 것이 이재명 지사한테 누가 될 수도 있는 거고. 그래서 일체 입을 다물고 살았다. 그런데 최근에 보니까, 이 지사가 그렇게 청춘부터 한평생을 열정과 헌신과 시민들에 대한 사랑으로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부분을 왜곡하고 공격하는 일부 언론과 사람들이 있더라. 참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제가 한 얘기가 도움될 거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한평생을, 때에 따라서는 (이 지사와) 같이 심장 속에 산 사람, 또 한편으로는 떨어져서도 (이 지사를) 지켜봤던 사람으로서 이재명이라고 하는 사람의 진실한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 지사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이 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오래 지난 이야기들을 이제 하게 됐다.

본인이 살아온 과정과 열정, 그런 헌신과 진심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경기도에서 노동국 신설,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과감한 노동정책을 시행한 것이다. 또한,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노동경찰권 등) 도지사로서의 한계를 넘어서서 중앙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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