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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는 노동자인가?' 활동가들 사이의 오랜 논쟁이었던 해당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활동가와 노동자는 어떠한 존재인지 사전적 의미를 통해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할 듯하다.

먼저 활동가(活動家)란, '어떤 일의 성과를 거두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힘쓰는 사람 (표준국어대사전)'을 뜻한다. 이처럼 성과와 변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을 활동가라 부른다. 하지만 수익 성과를 위해 힘쓰는 사람을 활동가라고 부르지 않고 기업가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 목적성을 중심으로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을 반영하자면 시민사회활동가, 시민단체활동가, 사회단체활동가, 사회운동활동가, 비영리활동가 등으로 재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노동자(勞動者)란,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표준국어대사전)'을 칭한다.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바에 의하면 노동자는 '사용자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지급받는 사람'이다.

나는 이 두 호칭에 대해 주목해보고자 한다. 활동가는 '家'라는 한자를 사용하여 이미 그 이름 안에 연대적, 구성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노동자는 '者'라는 한자를 써서 파편적, 개인적 의미가 부각되어진다. 실제로 양쪽의 언어적 의미가 교환되는 등, 복합적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지만 언어가 사회적이고 충분히 이데올로기적(세상을 바라보는 틀)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아마 그 효용성을 기준으로 해당 단어가 결정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언제나 집단을 벗어난 개인(者)은 목소리를 잃기 쉬웠다. 해서 고대사회에서 무리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생존의 위협이자 사회적 존재의 종말을 의미하는 가장 두려운 형벌이었다. 그렇기에 근대 국가의 형성은 곧 파편화된 다양한 집단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한 일종의 투쟁 과정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집단에서 유리된 개인은 다시 집단화하여 안정감을 회복하는 것은 너무 당연했고, 중심 집단과 주변 집단의 세(勢)도 끊임없이 위치를 바뀌어 갔다. 영웅신화로 시작된 역사의 흐름도 점차 초점을 확대해 강력한 개인이나 집단에 유리되지 않고 개개인을 지켜내는 것으로 발전해 갔다.

이렇게 개인이 집단화되는 과정 가운데 고려해야 할 선제적 조건이 한 가지 있다. 바로 개인의 비동의성으로 연대되어 있는 집단은 먼저 구성원의 개인화에서 재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인의 동의구조 없이 집단화되어 있는 무리는 자칫 그 '이름'으로 인해 개인이 망각되어 질 수 있는 역의 상황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근대의 부족국가나 현대의 가족기업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의 명명 오류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한국의 기업문화 안에서는 집단의 구성원임을 강조해 연대의식을 강화하는 과거의 잔향들이 퍽 많이 존속해 있다. 문제는 군집(家)의 힘이 강할수록 개인(者)의 영역이 희석된다는 것이다. 해서 우리가 실제적으로 집단이라 바로 부를 수 있는 것은 개인주체(연대)의 집단 뿐이다.

다소 별도의 논의점이 있겠으나 나는 '활동가'라는 이름이 후자의 영역에서 곡해되고 있다 생각한다. 활동가(家)라는 군집에 둘러 쌓여 있기에 개인의 영역들이 희석될 우려가 있으며 무엇보다 직업적 특수성에 의해 '대의적 희생'이라는 명제로 얽혀 있을 때 개인은 쉬이 그 이름 밖으로 빠져나오기 어렵다.
 
활동가들의 익명게시판인 시민사회활동가 대나무숲 페이지에는 수시로 다양한 내적 고충과 내부적 사정들이 올라온다.
▲ 시민사회활동가 대나무숲 활동가들의 익명게시판인 시민사회활동가 대나무숲 페이지에는 수시로 다양한 내적 고충과 내부적 사정들이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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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재질문을 해보자. '활동가는 노동자인가?'

나는 활동가의 정체성도 노동자의 정체성도 해당의 이름이 해체되어지고 재정의되는 가운데 더욱 온전해질 수 있다 생각한다. 이에 이 질문은 선택문항에서 벗어난다. 오히려 해당의 명명을 재규정하는 가운데 상호 교집합적 공공 영역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활동가는 노동자가 아니기에 노동조합 설립이 옳으냐에 대한 찬반의견이 오랜 기간 있어 왔다. 일단 형태로 따지자면 사용자 측이 명확지 않고 그 활동이 주체와 자발로 이루어지는 영역인 점 등 그 설정이 모호했기 때문에 노동조합 설립에 진전이 미미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논의의 답은 개인의 영역을 넘어 구조와 시스템 안의 '힘의 작용'을 고려해보면 다소 명확해진다. 힘은 구조 안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하며 스스로 확장되어 진다. 개인의 권력 지향을 넘어 시스템이 권력을 생산하는 것이다.

구성원이 동일한 역할이라고 정관이나 내규 등 문서적으로 규정해도 구조 안에서 동일한 힘을 가진 것은 절대 아니다. 실제 존재하는 권력을 부정할 때 우리는 허상에 시달리고 있는 환각증 환자로 전락한다. 하지만 힘은 언제나 실제적이지 않는가? 적어도 그 힘의 압력을 받는 쪽에서는 말이다.

더불어 'job(정기적으로 보수를 받고 하는 일)'의 영역도 실제적이다. 아무리 사회적 목적 지향의 활동가라 할지라도 생활영위의 목표는 동일하며 직업이란 보상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의적인 목표로 개인 희생의 역전 현상이 이뤄지는 것은 생활의 근간을 흔드는 영역이 아닐 수 없다.

해서 모든 활동가(活動家)는 활동자(活動者)가 되어야 한다. 망각의 집단에서 탈출해서 다시 개인(者)이 되어야 한다. 개인만이 개인으로서 연대할 수 있고 개인만이 주체로 연대할 수 있다. 그 방법의 하나로 개인화된 이들의 모임인 노동자들의 조합 또한 노동가라고 부를 수 있는 충분조건이 될 것이다.

활동가는 노동자인가? 그들은 노동하는 활동가이며, 활동하는 노동자이다. 그것이 결코 다르지 않다.

태그:#활동가, #노동자, #노동조합,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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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리단체 교육부서에서 나눔과 순환의 주제로 다양한 세대를 만나가며 함께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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