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원태우 지사 표석'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안내판이 용인 철로변에 세워져 있다. 원태우 지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 의사에 앞서 공격했던 청년 지사이다. 하지만 도로 횡단보도 옆에 세워져 있는 이 안내판을 보고도 원태우 지사를 아는 국민은 별로 많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원태우 지사 표석"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안내판이 용인 철로변에 세워져 있다. 원태우 지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 의사에 앞서 공격했던 청년 지사이다. 하지만 도로 횡단보도 옆에 세워져 있는 이 안내판을 보고도 원태우 지사를 아는 국민은 별로 많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1905년 11월 17일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송건호의 <한국현대사론>에 나오는 이 문장에는 유심히 보아야 할 표현이 세 가지 있다. '이른바', '강제', '사실상'이라는 수식어가 바로 그들이다.

'이른바' '강제' '사실상'의 뜻은?

'을사보호조약' 앞에 '이른바'가 붙은 것은 그 조약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어떤 문제인가? '강제 체결'되었다는 것이다. 국제법상 무효인 그 조약 때문에 우리나라는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따라서 '을사보호조약' 앞에 '이른바'가 붙는 까닭을 알기 위해서는 '강제 체결'의 과정을 짚어보아야 한다.

1905년 10월 27일 일제는 일본군을 서울에 집결시켰다. 구완희와 박용화 등이 궁궐을 포위하려는 일본군을 인도하여 길안내를 맡았고, 대포를 설치하는 데 앞장섰다. 일본군에 에워싸인 궁궐은 아무도 출입할 수 없게 가로막혔고, 서울은 온통 공포의 도시가 되었다. 

일본 군사 행동의 총 지휘자는 하세가와(長谷川好道)였고, 조약을 조인할 실무 책임자는 하야시(林權助)였다. 일본왕이 자신을 대신해서 파견한 특사는 이토(伊藤博文)였다.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위협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이토를 고종 황제에게 보내 보호조약 안을 제시하고, 조선이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한국정부에 통고하는 형식으로 조약을 체결한다는 전략 하에 움직였다.

고종을 만난 이토, "나라를 내놓으시오!"

이토가 덕수궁을 찾아 고종 황제를 만난 때는 11월 10일 정오 무렵이었다. 이토는 일본왕의 친서를 고종 앞에 내놓았다. "짐(일본 국왕)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니 대사의 지휘를 따라 조처하시오."라는 내용의 친서였다. 이토가 조약을 체결하자고 하면 순순히 응하라는 협박이었다.
 
 을사늑약 직후 원태우 지사가 돌을 던져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에 큰 상처를 내었던 용인시 의거 현장(철길 옆)에 '의거 표석'이 세워져 있는 모습
 을사늑약 직후 원태우 지사가 돌을 던져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에 큰 상처를 내었던 용인시 의거 현장(철길 옆)에 "의거 표석"이 세워져 있는 모습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나라를 내놓으라는 데 어느 나라 왕이 기다렸다는 듯이 응낙할 것인가! 원하는 답을 고종으로부터 듣지 못한 이토는 일단 물러났다. 이토가 다시 고종을 알현한 것은 그로부터 닷새 후였다.

이토는 하루라도 빨리 조약을 체결하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고종이 만나는 것을 거절하니 제 뜻대로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고종은 결국 15일 이토와 대면하게 되었다. 이토가 노골적으로 고종을 위협했다.

"폐하께서 조약 체결을 거절하시면 조선에 중대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게 어떤 일인지는 충분히 헤아리시겠지요?"

고종이 이토를 쏘아보며 말했다.

"짐은 아무 것도 헤아리지 못한다. 다만 이 조약이 국가의 막중한 중대사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런즉 짐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국민의 의사를 물어보아야 한다."

이토가 눈을 부라리면서 고종을 윽박질렀다.

"국민의 의사를 물어보아야 한다 운운은 인민을 선동해서 일본에 반항하겠다는 것입니까? 지금 조선의 형편에 그런 우매한 조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신라 경순왕이 왕건과 전쟁을 벌이지 않고 순순히 나라를 고려에 바친 것이 무엇 때문인지 진정 모르십니까? 백성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임금으로서 진정한 애민 정신을 발휘한 것이지요. 폐하께서는 일국의 왕으로서 그런 측은지심도 지니고 있지 않으시다, 그 말씀이십니까?"

그에 고종도 아주 직설적으로 이토를 공박했다.

"오냐, 말 잘했다! 이 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이니 네놈이 짐을 죽인다 하더라도 결코 허가할 수 없다! 썩 물러가지 못할까!"

일본이 고종 앞에 내놓은 조약의 안은 대략 아래와 같았다. 이미 국권을 거의 다 빼앗긴 처지이지만 이제는 아주 나라 문을 닫으라는 내용이었으니 아무리 막다른 골목에 내놀린 고종일지라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1조 일본국 정부는 재(在)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監理)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신민(臣民) 및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 정부는 금후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떤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않기로 상약한다.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폐하의 궐하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게 하며,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京城, 서울)에 주재하고 한국 황제폐하를 친히 내알(內謁)할 권리를 가진다.

일본국 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 및 일본국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理事官)을 둘 권리를 가지며,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하에 종래 재(在)한국 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장리(掌理)한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

 

이토는 고종을 직접 협박하여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예상보다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머리를 굴린 이토는 고종이 국민의 의사를 물어보아야 한다고 발언한 데 주목했다. 그는 정부 대신들을 궁중에 모아놓고 동의를 얻는 것이 빠르겠다고 판단했다.

이토, 대신들의 합의로 국민 의사를 대체할 계획

11월 17일 이토의 요구에 따라 한국 정부의 대신들이 일본 공사관에 모였다. 하지만 오후 3시가 되도록 회의를 열었지만 일본이 바라는 결과는 탄생하지 않았다. 이토는 대신들을 이끌고 궁중으로 들어가 고종 앞에서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재개했다. 

궁궐 바깥 사방을 일본군 병사들이 빽빽하게 포위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궁궐 내부도 무장을 한 일본 헌병과 경찰들로 서슬이 시퍼렇게 서려 있었다. 헌병과 경찰들은 회의장 안까지 거리낌 없이 드나들면서 대신들을 협박했다.
  
그런 상황이었지만 대신들은 조약 체결에 관한 안건을 부결시켰다. 그러자 이토는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세 차례나 고종을 알현하여 대신들과 논의해서 조약 체결이 이루어지도록 해달라고 겁박했다. 마침내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다시 회의가 속개되었다.

가장 먼저 이토의 요구에 찬성하는 이완용

하오(오후) 3시부터 시작된 회의는 어느덧 8시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본군 사령관과 무장 헌병들을 좌우에 거느린 이토는 대신들에게 한 명 한 명 '조약 체결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하고 겁박하며 물었다.

참정 대신(현재의 국무총리) 한규설(韓圭卨), 탁지부 대신(재정경제부 장관) 민영기(閔泳綺), 법부 대신(법무부 장관) 이하영(李夏榮), 학부 대신(교육부 장관) 이완용(李完用), 군부 대신(국방부 장관) 이근택(李根澤), 내부 대신(행정안전부 장관) 이지용(李址鎔), 외부 대신(외교부 장관)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농림수산부 장관) 대신 권중현(權重顯) 들은 차례대로 이토의 재촉에 답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규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력히 반대했다. 민영기도 반대했다. 이완용이 가장 먼저 이토의 요구에 따랐다.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도 찬성했다. 처음에는 반대 의사를 나타내었던 권중현도 찬성으로 돌아섰다.
 
 ▲  흔히 을사오적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하영과 민영기도 당시 대신으로서 을사오적 못잖게 망국에 기여했다는 의견도 많다. 그래서 "을사5적"이 아니라 "을사7적"이라는 주장이다. 조양회관(광복회 대구지부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을사오적 사진에 이하영과 민영기를 덧붙인 을사칠적 사진을 만들어보았다.
 ▲ 흔히 을사오적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하영과 민영기도 당시 대신으로서 을사오적 못잖게 망국에 기여했다는 의견도 많다. 그래서 "을사5적"이 아니라 "을사7적"이라는 주장이다. 조양회관(광복회 대구지부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을사오적 사진에 이하영과 민영기를 덧붙인 을사칠적 사진을 만들어보았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흔히 '을사 오적(乙巳五賊)'이라 부르는 대신들이 이토의 요구에 부응하여 협약 체결에 동의하자 한규설은 '대신들의 결정을 거부해 달라'고 건의하기 위해 고종에게 달려가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이토는 다른 대신들과 둘러앉아 조약을 체결했고, 한규설을 대궐 수옥헌(漱玉軒) 골방에 감금하고 면직시켰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산90-1 소재 '한규설 선생 묘'의 안내판을 읽어본다.
 
한규설(1856∽1930) 선생은 조선 말 고종 때의 대신으로, 자는 순우, 본관은 청주, 총융사(摠戎使, 조선 후기 5군영의 하나인 총융청의 주장으로 종2품) 규직(圭稷)의 아우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뒤 형조 · 공조의 판서,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포도대장, 장위사(壯衛使, 서울과 지방의 여러 군영을 통할하던 장위영의 대장), 의정부 참찬(정2품)을 역임했다.

광무 9년(1905) 참정대신(현 국무총리)으로 내각을 조직했는데, 이 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기 위해 일본 전권대사 이등박문이 각 대신들에게 협약을 요구했을 때 그 부당성을 주장하며 끝까지 반대, 조약 체결 후 파면되었다.

뒤에 다시 중추원 고문, 궁내부 특진관(特進官, 왕실 자문관)을 역임, 경술국치 때 일본 정부에 의해 남작을 수여하려 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묘는 부인 밀양박씨와 합장되었으며, 묘 앞 우측에는 옥개(屋蓋, 덮개돌)를 갖춘 대리석 묘비, 중앙에는 상석(床石, 제물을 놓기 위해 무덤 앞에 놓은 평평한 돌), 향로석(香爐石, 향 피우는 그릇을 놓은 돌), 그리고 그 앞 좌우에는 동물석(돌로 만든 동물 형상)과 망주석(望柱石, 묘 앞 양쪽에 세운 한 쌍의 돌)이 각각 갖추어져 있다.

1934년 10월 아들 양호(亮鎬)가 세운 묘비(墓碑, 무덤 앞의 빗돌. 한규설 묘비 앞면에는 '정부 참정대신 훈1등 주한공 휘규설 지묘, 증 정경부인 밀양박씨 좌부'가 한자로 새겨져 있다.)의 높이는 146cm, 폭 50cm, 두께 20cm의 규모이며, 옥개를 갖추었다.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라는 송건호의 표현은 이 조약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뜻이다. 송건호는 '을사보호조약'이라는 이름은 가당하지 않으며, 조약의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강제, 불법의 의미를 강조한 늑(勒)을 넣은 이름 을사늑약(乙巳勒約)일 뿐 결코 을사보호조약으로 부를 수  없다는 항변이다.

'을사조약'이 아니라 '을사늑약'

을사오적의 협조를 받아 을사늑약을 체결한 일제는 외국에 설치되어 있던 한국의 외교기관들을 모두 폐지시켰다. 한국에 머무르고 있던 영국·미국·청·독일·벨기에 등의 외교관들도 공사관을 철수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이제 지구상에 대한제국이라는 국가는 없어졌다.
 
 원태우 지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공격했던 현장에 '의거지 표석'이 세워져 있다.
 원태우 지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공격했던 현장에 "의거지 표석"이 세워져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늑약을 체결한 후 '기쁨'을 자축하기 위해 수원 지역으로 여행을 떠났다. 닷새 동안 온천욕도 하고 기생 파티도 즐길 요량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의 행각을 저지할 사람은 없었다. 이토는 희희낙락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런 이토를 참담하게 만든 일이 발생했다. 국가보훈처의 <의열투쟁사>에 따르면 '원수 이등을 처단하려는 의거가 을사늑약의 변이 있은 지 5일 후인 11월 22일 경부선 안양 부근에서 일어났다.' 한국인 청년 한 사람이 이토의 머리를 돌로 때린 것이었다. (계속)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