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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사랑해,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

지난달 26일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기 직전 고 최숙현 선수가 어머니에게 보낸 마지막 문자메시지는 많은 이들을 분노하게 했다.

지난 2일 게시된 '트라이애슬론 유망주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란 청와대 청원에 7일까지 15만 명이 넘는 국민이 동의했다. 이제 최 선수가 가해자로 지목한 이들에게, 이들의 변명에 국민적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헌데, 사죄와 참회를 기대한 것이 무리였을까. 6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긴급 현안질의에 출석한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팀 김규봉 감독과 장아무개, 김아무개 선수의 태도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지도 선수가, 동료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아랑곳없이 제 앞가림에만 급급한 이 가해자들의 행태는 국민의 공분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여기에 성폭력 의혹까지 불거졌다. 최 선수의 동료는 가해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된 운동지도사가 치료를 가장해 상습적으로 가슴을 만지는 등 성추행을 일삼았다고 폭로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뿐만이 아니다. 최 선수가 끝내 극단적 선택에 이른 것은 구조와 관행의 높은 장벽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체육회 조사관과 나눈 마지막 통화에서 최 선수는 증거를 수집하고 자료를 모아야 하는 신고 과정을 버거워하는 듯 보였다. 은폐와 제 식구 감싸기에 익숙한 협회와 체육계에 대항해 홀로 싸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이 1998년생 청년을 얼마나 짓눌렀을까.

7일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서 그저 면피에 급급한 협회의 안일함을 질타하고, 체육계의 관행이란 이름으로 유지된 검은 카르텔을 철폐시키라 주문한 것도 더 이상의 피해자를, 희생자를 막기 위한 절치부심의 결과였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1년 반 전, 쇼트트랙 심석희 선수가 코치의 성폭력을 고발했을 당시에도 이러한 재발방지책을 주문한 바 있다.

그래서 관심은 가해자들에 대한 단죄와 체육계 지도자들의 폭력과 은폐란 구조적 문제를 근절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쏠린다. "그 사람들의 죄를 밝혀달라"던 최 선수의 유언을 이뤄주기 위해, 주로 어린 선수들이 입는 피해를 막기 위해 미국에서 벌어진 희대의 스포츠계 성폭력 사건의 전말을 참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지난해 징역 175년 형을 선고받은 미 체조협회 소속 전 주치의 래리 나사르 사건 말이다.
 
 미국 체조팀 주치의였던 래리 나사르
 미국 체조팀 주치의였던 래리 나사르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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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비견될 175년 형이 주는 교훈

"어린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강력한 여성으로 변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내러 돌아올 거다." (미국 체조선수 카일 스티븐슨)

법정에 선 피해자들이 하나둘 증언을 이어갈 때,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피고석을 응시했으며, 또 누군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며 법정 증언과 언론 인터뷰에 나선 이들은 전 미국 체조 국가대표를 포함한 수십 명의 여자 체조선수들이었다.

시작은 언론 제보였다. 2016년 한 지역 언론에 미시간대 체조팀과 미국 체조대표팀 주치의였던 래리 나사르의 성폭력 사건이 제보됐고, 이 언론의 의혹 제기 이후 제보에 나선 피해자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한다. 훗날 밝혀진 피해자의 숫자는 30여 년간 총 300명이 넘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에 출연한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래리 나사르가 상냥하고 동정적이었다고 말한다. 나사르는 몸무게 유지와 체력 관리, 그리고 성적제일주의에 지친 어린 체조선수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휴식을 제공하는 등 호의를 베풀었다. 이를 빌미로 어린 선수들의 주의를 분산시켰고, 치료를 가장해 성폭력의 수위를 높여갔고, 일부 선수들에게는 직접 성폭행을 자행하기도 했다.

폭력의 양상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과거 미국이나 심 선수나 최 선수 경우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조건이 몇 가지 있다. 먼저, 성적제일주의. 미국의 체조선수들 역시 성적에 대한 부담감에 지도자들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폭력이 가해진다고 해도 국가대표팀에서 탈락할까봐, 지도자들이, 협회가 자신을 버릴까봐 전전긍긍했고 제대로 신고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뒤에는 은밀하게 이뤄진 나사르의 폭력을 방치하고 은폐한 미국 체조 국가대표팀 감독진과 전미체조협회가 버티고 있었다. 성적제일주의에 빠진 동유럽 출신 국가대표 감독진은 일부 선수들이 성폭력 사실을 고발했는데도 유야무야 넘어갔다. 도리어 성폭력을 고발한 선수를 올림픽 출전 선수 명단에서 제외했다.

홍보와 돈벌이에 혈안이 됐던 전미체조협회 역시 수년 간 이어온 고발에 침묵했다.  이미지 관리에만 급급한 무책임하고 반인권적인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언론보도 이후 피해자들의 증언이 잇따르는 와중에도, 이들 책임자와 협회는 자신들의 책임을 면피하기에 바빴다. 다큐멘터리 제작진에 따르면, 경찰이나 FBI 역시 사건을 뭉개는 데 일조했다.

뻔뻔하기는 가해자인 나사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성 경찰관에게 두 번째 조사를 받던 당시, 나사르는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성폭력이 아닌 치료행위였음을 강조했다. 최초 보도한 지역언론의 보도가 이어지자, 실명 공개만은 막아달라고 빌기까지 했다는 나사르. 그는 언론보도 이후 협회를 떠났으면서도 미 체조계 유력 단체에 임원으로 등용되기까지 했다. 나사르가 소속됐던 미시간대 역시 최초 보도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의 직을 그대로 두었다.

최초 보도 이후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서 고발과 증언에 나서지 않았다면, 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나사르의 성적 학대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됐을 것이다. 미국사회는 이에 응답했고, 미 법원은 나사르에게 사형에 준하는 총 175년 형을 언도했다.

자, 심석희 선수의 고발 이후에도 구조적인 폭력을 방치했던 한국 사회는 죽음으로 고발한 최 선수의 유언을 어떻게 받들 것인가. 이후 이어진 고발들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문체위에 불려나온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긴급 현안질의에 나와, 고 최숙현 선수 가혹행위 및 인권침해 사실과 관련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문체위에 불려나온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긴급 현안질의에 나와, 고 최숙현 선수 가혹행위 및 인권침해 사실과 관련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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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의 자정은 없다
이번엔 다를까? 이번엔 감독과 팀 닥터와 선배들이 조사받고 합당한 처벌을 받을까? 폭력의 관행을 방관한 기관들은 달라질까? 클린만 외쳐온 대한체육회는 달라질까? 학맥과 인맥으로 똘똘 뭉쳐진 체육계는 이런 정도는 지나가는 소나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과거에도 있었고, 그럴 때마다 한 차례 소나기처럼 지나간 다음에 슬그머니 예전 관행대로 돌아가 버리고는 했던 일들을 너무도 잘 아는 이들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달라져야 한다. 대한체육회 회장부터 물러나게 하고, 외부인사들로 객관적인 조사를 하도록 해야 한다. 체육계는 자정 능력을 기대할 수 없다. 목소리만 높일 게 아니다. 체육계 문제니까 체육계가 알아서 하라고 하는 건, 대충 덮겠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폭력의 관행에 용기를 주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페이스북 글 중에서)

맞다. 더 이상의 자정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국가주의 엘리트 스포츠의 구조적 문제를 계속 방치하고 그들에게 자정을 맡겨둔다면, 또 다른 종목에서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기를 눈 뜨고 기다리는 꼴일 뿐이다. 국가대표 출신인 임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jtbc 취재진과의 통화에서 "지금 제일 걱정하는 것은 가해자들이다. 죄 지은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살려놓고 봐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는가.
 
 국가대표 출신인 임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jtbc 취재진과의 통화에서 "지금 제일 걱정하는 것은 가해자들이다. 죄 지은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살려놓고 봐야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국가대표 출신인 임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jtbc 취재진과의 통화에서 "지금 제일 걱정하는 것은 가해자들이다. 죄 지은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살려놓고 봐야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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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에서도 볼 수 있듯, 비단 우리만의 문제도 아니다. 최근 이 다큐가 공개되면서 영국 체조 선수들도 지도자들의 상습적인 폭력과 이를 묵인한 영국 체육계를 고발하고 나섰다. 한국 체육계만의 고질병이 아닌 만큼, 정부는 물론 한국 사회 전체가 감시해야 할 문제다.

무엇보다, 엘리트 체육의 폐해를 철폐하는 것이 급선무다. 녹취록에서 드러난 바, 김규봉 감독 역시 "국가대표" 운운하며 최 선수를 때렸다. 최 선수의 자살 이후 고발에 나선 동료 선수들은 지도자의 폭력이 체육계의 관행이라 받아들였다고 한다.

최 선수도, 심 선수 역시도 국가대표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팀의 성적을 지켜내고자 감독의, 운동지도사의, 고참 선수들의 물리적, 심리적 폭력을 버텨왔던 것 아니겠는가. 선수 개인의 행복이 먼저다. 선수 개인의 행복이,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이들이 더 이상 국가를 위해, 팀을 위해, 성적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고 희생을 감내해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는 나사르의 단죄로 영화를 끝맺지 않는다. 영화는 나사르를 고발했다는 이유로 국가대표 자리에서 쫓겨난 체조 선수의 행복한 현재를 비춰준다.

성적지상주의를 내세워 나사르의 성폭력까지도 무마하려 했던 전미체조협회와는 달랐다. 한 대학 팀에서 활약 중인 이 선수는 친절하고 상냥한 동료들과 훌륭한 의료진과 함께 자신의 인생을 내건 체조를 즐겁게, 행복하게 계속해 가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대학선수권 1위 자리를 내내 지키면서. 

대학체육회를 비롯한 우리 체육계도 진작 자정에 나섰다면, 최 선수 역시 행복한 얼굴로 운동을 계속해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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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어제는 영화기자, 오늘은 시나리오 작가, 프리랜서 기자. https://brunch.co.kr/@hasungtae 기고 청탁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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