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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이 아니라 “주선족”이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 바 있는 여진(女眞)족은 朱先, 諸申(중국어 발음은 ‘주선’)으로도 불리었는데 중국의 저명한 민족 원류사 연구 학자인 허광웨(何光岳)가 지은 『여진원류사(女眞源流史)』를 보면 여진(女眞)의 만주어의 발음은 ‘주선(jusen -‘사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으로서 우리의 ‘조선’ 발음과 매우 유사하다. 사실 여진(女眞)이라는 한자어의 중국어 발음은 ‘뉘전’이며, 이 발음으로 읽지도 않고 우리 독음 방식에 의하여 ‘여진’으로 읽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우리가 한자어를 우리 독음 그대로 읽어 여진족이라고 지칭해온 것은 잘못이며, 원래 만주족의 발음대로 “주선족”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본래 여진족(女眞族)이라는 명칭은 청나라 황타이지(청태종)가 여진(女眞)의 만주어인 珠申이라는 말이 당시 중국에서 ‘노예’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던 현실에 비춰 만주족(滿洲族)으로 바꾸도록 한 것이다.

또한 말갈(靺鞨)족에 나오는 ‘말갈’의 중국어 발음은 mohe 즉 “모허”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민족 구성원이었던 맥족(貊族)의 ‘백(貊)’ 자의 중국어 발음이 바로 mo이다. 실제 중국의 “전국 문화정보자원 공향(共享) 공정”이라는 중국 정부의 관영 사이트에 소개되어 있는 관련 자료에도 “靺鞨, 是貊族同音詞”(“말갈은 맥족의 동음어이다”)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사실로부터(http://www.ndcnc.gov.cn/datalib/2004/HundredName/DL/DL-20040210160731) 말갈족이 맥족으로부터 연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말갈족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고구려를 돕기까지 했다.

중국 문헌에 따르면 만주족은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만주족의 순서로 이어져 왔다. 그런데 청나라 건륭제가 지시해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여진’이 ‘숙신’으로부터 전래된 용어이며 그 발음은 ‘주선(珠申)’이라고 밝히고 있다. 물길(勿吉)의 중국어 발음‘우지(wuji)’는 ‘옥저(워쥐, woju)’와 유사하며 실제 앞에서 인용한 중국 정부의 관영 사이트 자료에도 ‘물길’이라는 명칭이 ‘옥저’로부터 기원했다고 설명되어 있다(勿吉族, 秦以前的居就, 秦漢之際的沃沮.....). 또 압록강의 옛 별칭은 읍루강이었다.

이처럼 만주족을 지칭하는 역대의 모든 명칭은 ‘조선’ 및 우리 민족과 매우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사실을 고려해볼 때, 만주족은 우리 한민족과 최소한 장기적인 융합 과정을 거쳤고 동시에 유사한 기원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 시조 누르하치의 6대조이며 청나라 황실의 시조로 추앙받았던 猛哥帖木兒는 우리나라 경원과 회령 지방에 거주하면서 당시 회령에 살던 이성계와 교류하였고, 조선 건국 후에는 조선 정부로부터 벼슬도 얻으면서 이후 조선군과 공동 토벌작전에 나섰다가 장남과 함께 전사하게 된다. 이러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및 만주족 역사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중국 금나라 시조는 고려인

중국 금(金)나라의 정사인 『금사(金史)』”에는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금나라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고려사』에도 이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세가 권 13 예종 을미 10년 3월조 편을 보면,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옛적에 우리나라 平州의 중 김준이 여진으로 도망하여 아지고촌에 살았는데 이가 금나라의 선조로 되었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평주의 중 김행지의 아들 김극수가 처음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서 여진인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 古乙 太師를 낳았고 고을은 活羅 太師를 낳았다. 活羅에게는 아들이 여러 사람이었다. 맏아들은 핵리발이요 다음은 영가(盈歌)였는데 영가가 가장 뛰어나 인심을 얻었다. 영가가 죽고 핵리발의 맏아들 오아속이 그 뒤를 이었고 오아속이 죽은 뒤 그의 아우 아골타가 位에 올랐다’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다른 문헌도 있다. 같은 책 『고려사』예종 기축 4년의 기록에는
“기해일에 동번 사절들인 요불(裏弗), 사현(史顯) 등이 내조하였다. 경자일에 왕이 선정전 남문에 나가서 요불, 사현 등 6명을 접견하고 그들의 온 이유를 물으니 요불 등이 아뢰기를 ‘지난날 우리의 태사 영가(盈歌)는 우리 조상이 큰 나라(大邦-고려)에서 출생하였으니 의리상 자손의 대에 이르도록 거기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고 지금 태사 오아속(烏雅束)도 역시 큰 나라를 부모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려사』예종 정유 12년 편에는, “금나라 임금 아골타가 아지 등 다섯 명의 사신을 시켜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형의 나라 대여진 금국 황제는 아우 고려 국왕에게 이 편지를 보낸다.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한쪽 지방에 끼어 있으면서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조심스럽게 섬겨 왔는데 거란이 오만하게도 우리 국토를 유린하고 우리 백성을 노예로 생각하였으며 빈번히 까닭 없는 군사 행동을 감행하였다. 우리가 하는 수 없이 그를 항거하여 나서니 다행히 하늘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섬멸하게 되었다. 왕은 우리에게 화친을 허락하고 형제의 의를 맺어 영세 무궁한 우호관계를 가지기를 바란다.’라고 하면서 좋은 말 한 필을 보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중국에서 한족이든 북방민족이든 새로운 왕조가 건국하게 되면 대부분 한반도에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고 그리하여 공격이 이어졌다. 하지만 금나라의 경우 고려에 대하여 전혀 공격을 하지 않고 오히려 요나라를 공격하여 의주를 빼앗고도 그대로 퇴각하여 고려가 의주를 차지하도록 돕기까지 하였다. 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났는가의 원인을 위의 문헌들이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만주족이 자신들의 최초의 왕국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발해가 대조영 등 고구려인들이 사회구성의 상부구조를 점했던 사실과 금나라 황실이 고려 후예인 사실은 상당히 유사성을 띠고 있다. 이는 비교적 높은 수준의 문화적 소양과 사회의 운용 및 통치에 있어 경험을 지니고 있던 한민족의 지식층과 만주족의 대중들이 결합하여 국가를 건설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만주, 역사적으로 한민족과 만주족이 공동으로 일궈낸 지역

사실 조선이 청나라와 적극적으로 교류하지 않고 중화사상과 사대주의에 빠져 명나라만을 존숭하고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 무시하고 단절했으며 끝내 병자호란까지 초래했던 사실은 우리 민족을 발전적으로 전진시키는 데 있어 치명적인 착오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고려 시대의 “묘청의 난” 사건을 조선의 1천년 역사상 최대 사건으로 평가한 바 있지만, 병자호란 역시 그에 못지않게 우리 민족사에 대단히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사건으로 평가될 수 있다.

실제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개척했으며 중국을 통치하는 데 있어 중국 역대의 어느 왕조보다 효과적이며 장기적으로 성공을 거뒀던 국가였다. 그러한 청나라에 대하여 효종 때 제기되었던 이른바 ‘북벌론’은 완전히 비현실적이고 허구적인 명분론의 측면이 강했다. 정치경제적으로 그리고 더욱 심각하게는 심리적으로 청나라와 완전하게 단절했던 조선이 필연적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던 역사는 복잡다단하게 얽혀져 있는 오늘의 국제정세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교훈이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만주 지역과 한국 북부 지역의 역사는 한민족과 만주족이 공동으로 일궈낸 역사라고 할 것이다. 또한 『고려사』를 보면 태조 을유 8년 9월에 “발해 장군 신덕 등 5백 명이 귀순하고 12월에 발해 좌수위 소장 모두간 등이 백성 1천 호와 함께 귀순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등 수많은 거란족과 여진인 그리고 발해인이 고려에 귀속했던 기록이 많은 곳에서 나타나고 있어 그들이 우리나라 민족을 구성하는 한 부분을 점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가 만주족의 부족 편에 숙신, 물길, 말갈과 함께 부여, 삼한을 비롯하여 백제, 신라까지 열거하고 있고, 강역 편에도 모두 포괄하여 다루고 있는 것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만주족과 한민족은 그 기원과 계통이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으며, 따라서 향후 이 분야에 대해 보다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우리 한민족의 기원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태그:#만주, #조선, #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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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학 박사, 국회도서관 조사관으로 근무하였고, 그간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 등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해왔다. <이상한 영어 사전>, <변이 국회의원의 탄생>, <논어>, <도덕경>, <광주백서>, <사마천 사기 56>등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시민이 만들어가는 민주주의 그리고 오늘의 심각한 기후위기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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