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새벽 6시에 집을 나섰지만 주변은 훤하다. 해가 길어져 이미 30분 전에 해가 떴기 때문이다. 대문을 나선 전명희는 머리가 휑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70년 전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강원도 강릉과 삼척을 간다는 생각에 밤새 뒤척였던 것이다.

지난 8일 전명희는 둘째의 차에 몸을 싣고 청주에서 3시간 30분 만에 강릉경찰서에 도착했다. 반갑게 인사하는 이들은 MBC강원영동 기자들로 '한국전쟁과 여성'이라는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그녀가 전쟁기에 아버지를 잃고 힘들게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명희의 목소리를 영상에 담고자 온 것이다.

코로나19 때문에 강릉경찰서 출입 절차는 까다로웠다. 소정의 절차를 거쳐 경찰서 경비계장을 만났다. "아버지가 6.25 전에 강릉경찰서에 근무했는지 확인하고 싶어요"라는 부탁을 받은 담당 직원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죄송합니다. 관련 자료가 없습니다" 6.25 당시 경찰로 재직했다면 그나마 찾을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 전쟁 전에 퇴직을 해서 어렵다는 것이다.

전명희 일행은 삼척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녀의 아버지 전원석은 강릉에서 경찰을 그만두고, 6.25 전부터 삼척에서 회사 생활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전원석이 인민군에 학살 당한 사실을 찾으려면 삼척시청을 찾아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삼척시의 역사를 정리한 <삼척시사>에 그런 사실이 언급됐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원석은 북한군에게 개별적 희생을 당한 것이 아니라 100여 명의 인사들과 함께 집단학살을 당했다. 
 
 전원석이 구금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삼척경찰서
 전원석이 구금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삼척경찰서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삼척시청 총무과와 시청 자료실에도 관련 자료가 전혀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삼척경찰서를 찾았다. 하지만 이 곳도 자료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이 곳에서의 성과라면, 실낱같은 단서를 찾았다는 점이다.

어렵사리 전직 경찰이었던 심원수(90)옹을 소개 받았다. 심원수옹은 한국전쟁 당시에 "북한군이 우익들을 창고에 가두어 두었다. 그들이 후퇴하면서 구금되었던 이들을 트럭에 싣고 갔다고 들었다"고 했다.

새벽에 청주에서 출발해 강릉경찰서, 삼척시청, 삼척경찰서를 찾았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1952년 공보처 통계국에서 작성한 '6.25사변 피살자명부 강원도편'에도 아버지의 흔적은 없었다.

다만 심원수옹의 증언과 전명희의 기억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그나마 한숨을 덜어냈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전명희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마을 이름과 거리, 비누공장과 건물이 실재했다는 것도 확인했다. 

편지를 전해주지 않았다는 이유

"가족에게 편지 좀 전달해 주시오"라는 청년의 부탁에도 강릉경찰서 전원석 순경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원석은 순경이라는 자신의 직분상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는 좌익활동가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49년경의 일이다.

이 일이 전원석의 생명을 앗아갈 거라고 당시에는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전원석은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에 경찰을 그만두고 삼척으로 이주해 직장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전쟁이 발발했고 인민군이 삼척을 점령하면서 비극의 불씨가 점화되었다.

강릉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던 그 청년의 고향이 하필 삼척이었던 것이다. 그 청년은 북한군 점령 시절, 내무서에 전원석을 고발했다. 전원석이 자신의 가족에게 편지를 전해주지 않았다는 게 고발 이유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고발을 할 수는 없었기에, 전원석이 전직 경찰이었다는 사실을 표면에 내세웠다. 

전원석의 아내 박숙자는 둘째 명수를 업고 유치장에 면회를 갔지만, 남편을 만날 수는 없었다. 삼척내무서(경찰서) 유치장에 70여 일간 구금되었던 전원석은 1950년 9월 24일 트럭에 실려 북한군에게 끌려갔다. 남편이 북한군에 1차로 연행된 후 박숙자는 호구지책으로 시장에서 떡 장사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지나가는 트럭에서 웬 소리가 났다. "명수야~" 자신의 아들을 부르는 소리였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남편이 트럭에 실려 사지로 끌려가면서 보고 싶은 아들 이름을 부른 것이다. 아니, 전원석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리기 위해 '고함'을 친 것이리라. 아내 박숙자는 트럭 서너 대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소리 나는 방향으로 무작정 뛰었다. 하지만 트럭을 앞지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후 전원석이 북한군에 의해 삼척 바닷가에서 수장되었다는 소문만이 바람결에 들려왔다. 한국전쟁 당시 6살이었던 딸 전명희가 아버지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새벽 6시에 청주에서 강원도로 기억여행을 떠난 이유다.

딸에게 돌팔매질을 한 엄마

"야, 이 지지배야 빨리 돌아가." "엄마! 앙~"

표독스러운 눈매를 한 엄마의 눈길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진 전명희는 발걸음을 멈춘 채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딸의 울음에도 엄마는 매정하기만 했다. 엄마가 딸을 향해 돌팔매질을 한 것이다. 여섯 살 명희는 너무 무서워 달아났다. 삼척에서 강릉 넘어가는 이면고개에서 있었던 일이다. 

남편이 죽고 자식 둘을 키울 자신이 없었던 여인 박숙자의 삶도 평탄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52년경 어처구니없는 일이 강릉의 한 초가집 부엌에서 발생했다. 박숙자는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아궁이에 불을 붙이려고 끙끙거렸다. 나뭇가지에 불은 쉽게 붙지 않고 매운 연기만 났다. "후후" 연신 바람을 불어가며 불씨를 살려 나무에 불이 붙었을 때였다.

'탕'하는 소리와 함께 박숙자가 '악'하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아궁이에 있던 불발탄에 열이 가해지면서 그녀의 다리에 총알이 박혔다. 그녀는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달리했다. 너무 황당한 사건이라 믿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1950년대 초반까지 휴전선 근방뿐만 아니라 시골에서 흔히 일어나던 일이었다.

졸지에 천애고아가 된 전명희·명수 남매는 각자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누나 전명희는 어릴 적부터 남의 집살이를 전전해야 했다. 집살이라고 해봐야 잡일에서부터 식모 일이었다. 하지만 전명희는 남의 집 잡일을 하기에도 너무 어렸다. 6~7세 때부터 남의 집을 떠돌아 다녔는데, 하는 일은 주로 소에게 꼴을 먹이고 소죽 끓이는 일이나 아궁이에 불을 때는 것이었다.

한 여름이면 첫 닭이 우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소죽을 끓이는 게 일과의 시작이었다. 아궁이에 솔가지를 태우다 보면 눈썹과 머리카락을 태우기 일쑤였다. 소꼴을 베러 가다 뱀에 놀라기가 비일비재했고, 너무 배가 고파 사과 서리를 하다 주인에게 들켜 뺨을 맞기도 했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한 시절, 주인 할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것은 하루의 중요한(?) 일과였다.

개울가에서 죽을 뻔 했던 남동생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신나게 개울가에서 노래를 부르며 혼자 놀던 신명수의 몸이 기우뚱하며 물에 휩쓸렸다. '어푸푸'하며 몸의 중심을 잃은 명수는 당황했다. 개울을 따라 수십 미터 떠내려왔을 때, 천만다행으로 소년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때 등을 밀은 이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 일을 전해들은 누나 명희는 아는 사람의 짓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이 소년소녀에게 가까운 가족은 강릉에 사는 이모였지만, 남이나 다름이 없었다. 강릉 이모네 집 근처 개울가에서 죽을 뻔했던 명수는 이후 고아원에 맡겨졌고, 명희는 애초부터 남의집살이를 시작했기에 이모의 따뜻한 품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명희가 10대 후반 시절 강릉 박월리 이모네 집에 갔을 때였다. 누나가 왔다는 소식에 인근 고아원에 있던 명수가 왔다. 그런데 명수의 행동이 이상했다. 웃방 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해도 묵묵부답이었다. 고아원에서의 눈칫밥만이 아니라 이모네 집에 있을 때부터 무슨 일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오랜만에 찾은 이모네 집에서 명희 역시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이모는 명희에게 "찬장에 밥 있으니 먹으라"고 했다. 그런데 그 밥은 '얼음 밥'이었다. 후일 동생에게 들으니, 이모가 "보육원에 가서 가족 있다고 하지 마라"고 시켰다고 한다. 가족이 있으면 고아원 입소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리라.

차비 150원이 모자라 남매가 헤어져

이모 집에서 찬밥 신세를 당한 명희는 남동생과 함께 서울 갈 결심을 했다. 강릉 기차역에서 차표를 끊으려는데 150원이 모자랐다. "명수야! 내가 먼저 서울 가서 돈 번 후에 데리러 올게" 그렇게 누나는 기차에 올라타 열차 맨 끝 칸으로 갔다. 잠시라도 동생을 보기 위해서다.

기차가 출발했는데 역 플랫폼에서 동생이 뛰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뛰었을까. 기차가 터널을 진입했는데 그때까지도 동생은 뛰어 왔다. 기차가 터널을 빠져왔을 때가 돼서야 동생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60여 년 전 강릉역에서 동생을 떼놓고 와야 했던 누나의 가슴은 평생 상처로 얼룩졌다. 그렇게 헤어진 남동생과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20여 년 전에 상봉할 수 있었다. 굴곡 많은 삶을 살았던 남동생은 10여 년 전에 세상을 떴다.

서울로 올라온 명희의 앞길이 암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이리저리 떠돌다가 극단의 일행이 된 것은 17세경이었다. 우연히 신파 극단의 연극을 보고 홀딱 반한 것이다. 그녀는 연극에서 왕 역할을 맡기도 했는데 그 날로 배역에서 잘리고 말았다. 글을 몰랐기 때문이다. 연기자가 대사를 암기해 줄줄 말을 해야 하는데, 명희는 그때까지 까막눈이었다. 전쟁 와중에 아버지 어머니 모두 돌아가셨기에 학교 문턱은 밟지도 못했다.

헛간에서 치른 전통혼례
 
 삼척 바닷가에 선 전명희
 삼척 바닷가에 선 전명희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전명희가 극단을 몇 년 따라다니다가 충북 단양에서 지낼 때였다. 중매쟁이가 결혼을 하라고 꾀었다. 주변에서도 부추겼다. 19세, 만으로는 18세였다. 시댁에서 결혼식 비용으로 3000원을 중매쟁이에게 주었는데, 중매쟁이가 1000원을 떼먹어 2000원으로 결혼 예복과 음식을 준비했다. 당시 살던 집 마당에서 전통혼례를 치르려는데 폭설이 쏟아졌다. 할 수 없이 헛간으로 갔다. 헛간에서 결혼식을 치른 때가 1964년 겨울이었다.

시댁은 충북 제천군 덕산면 도전리 도동골이었다. 두 살 위였던 남편 집도 빈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술을 입에 달고 살았던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전쟁이었다. 40여 년 결혼생활은 이사를 밥 먹듯이 해야 하는 불안정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 와중에도 똑바로 성장한 삼남매가 고마울 뿐이다. 둘째 자식과 청주에 사는 전명희(76세,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는 70년 전에 죽은 아버지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전명희는 아직도 아버지가 퇴근하며 기찻길에서 따온 찔레꽃을 동생과 나누어 먹던 일이 생각난다. 그러다가 돌팔매질로 엄마와 헤어져야 했던 일과 150원이 모자라 강릉역에서 동생과 헤어졌던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나타난다. 자신이 엄마를 미워했던 것처럼 동생이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을까 자책도 한다. 전명희는 70대가 되어서야 엄마를 이해하는 마음이 생겼다. '엄마가 자식 둘을 키울 자신이 없어 그랬겠지. 엄마도 시대의 희생양이지'라는 생각이 든다.

청주에서 새벽 6시에 출발한 기억여행은 강릉과 삼척을 들러 저녁 8시에야 도로 청주에 도착했다. 특별한 소득이 없었음을 면구스러워하는 나에게 그녀는 "어릴 때 기억이 거의 일치해 다행이었어요"라고 위로를 한다.

그녀의 기억여행에 국가가 함께 해, 아버지 전원석이 왜, 어떻게 죽었는지 밝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한다. 전쟁 후 그녀가 살아온 고통스러운 삶을 국가가 위로해주는 날이 언제쯤이나 올까?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