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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원칙하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2017년부터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에 앞서, 국민권익위원회에서는 온라인 공공민원창구인 국민신문고를 2005년에 구축 및 운영해왔습니다. 이들은 직접 민주주의 실현의 장이라는 목표 및 기대를 안고 있는데요. 그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조선시대의 신문고 제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언론기관인 사간원 관리들의 모임을 그린 1540년작 ‘성세창 제시 미원계회도(成世昌 題詩 薇垣契會圖)’
 언론기관인 사간원 관리들의 모임을 그린 1540년작 ‘성세창 제시 미원계회도(成世昌 題詩 薇垣契會圖)’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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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언로(言路) 확보를 중시한 나라입니다. 하늘 아래 태양과 같은 임금에게도 공개적으로 비판을 개진하도록 사간원(司諫院)이라는 언론기관을 국가의 주요 부처로서 설치 및 작동시켰을 정도입니다. 또한 나라에 재앙이 일어나면 구언(求言)이라 하여, 임금이나 국가가 잘못하고 있는 일을 지적하도록 하고, 그 내용을 채택하여 정책에 반영하도록 했습니다.

이때 관료나 학자와 같은 엘리트층뿐 아니라, 초동목수(樵童牧竪, 땔나무를 하는 아이와 가축을 치는 아이) 곧 배움이 없고 신분이 낮으며 나이가 어린 사람의 말도 경청하는 것이 국가지도자의 덕목이었습니다. 원통하고 억울한 이가 없도록 하는 것, 즉 '민생에 귀 기울이는 정치'가 국정의 기본 방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조선 초기에는 신문고와 같은 제도를 운영했습니다.

우의정(현재의 총리와 유사) 이무가 말하였다. "신문고를 설치하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무고로 치는 자도 간혹 있습니다." 영사평부사(재정 담당 관청의 최고위직) 하윤이 말하였다. "신문고 관련 법에서, (민원 내용이) 사실이면 들어주고 허위이면 처벌하며, 절차를 밟지 않고 바로 임금에게 호소하고자 치는 자도 이같이 하는 것입니다... 관리가 백성의 소송을 판결할 때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하면 신문고로) 임금께 아뢸까 두려워서 마음을 다해 세밀하게 살핍니다." (태종실록 1년 11월 16일)

태종 재위 1년째인 1401년,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직접 호소하도록 북을 설치합니다. 현재까지도 그 개념이 통용되는 신문고의 시작점입니다. 신문고의 설치를 두고, 태종에게 두 가지 상반된 의견이 제시됩니다. 우선, 무고 곧 남을 해칠 목적으로 거짓을 꾸며 고소·고발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반하여, 민원이 허위 사실일 경우에는 처벌하면 되며, 백성들이 임금에게 억울함을 호소할까 봐 관리들이 성심껏 판결하므로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니, 신문고의 존재만으로도 유효하다는 것이지요. 태종은 후자에 동의하며 신문고 제도를 시행합니다. 그런데 민원인이 신문고를 치기까지는 여러 산을 넘어야 했습니다.

신문고가 유명무실해질 것을 염려한 세종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호소하려는 자는, 서울은 주무관청에 올리고 지방은 관찰사에게 올린다. 그렇게 한 뒤에도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사헌부에 알리고, 그리하고서도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신문고를 친다. 국가안위 및 불법살인에 관계되는 것 이외에는 아전·노비로서 그의 관원을 고소하는 자, 품계를 지닌 관리·하급관리·평민으로서 그의 관찰사·수령을 고소하는 자는 모두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장 백 대, 노동교화형 3년에 처한다. 타인을 몰래 사주하여 고소장을 내게 한 자도 죄가 역시 이와 같다. 자기의 원통한 일을 호소하는 자는 모두 들어주어 조사하되 무고를 행한 자는 장 백 대, 유배 삼천리에 처한다. (<경국대전>(經國大典) '형전(刑典)' '소원(訴冤)')

위와 같이, 호소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하여 누구나 바로 신문고를 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과 <태종실록> 등에 의하면, 서울 거주자는 담당 공무원에게 지방 거주자는 그 지역의 도지사·군수 등에게 민원을 제기하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검찰·감사원에 호소하고, 그럼에도 해결이 안 되면 서울의 의금부(현 공수처)에서 신문고를 지키는 담당자에게 신원조회를 받고 진술서·고소장을 제출한 후 이것이 받아들여지면 신문고를 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글을 모르는 대부분의 백성·천민보다 사대부 엘리트층에게 이용 기회가 치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의금부에 설치된 신문고를 직접 치기 위해서 지방 거주자는 서울까지 올라와야 하기 때문에 물리적 제약도 있습니다.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거나 신문고를 칠 수 있는 사안이 아닌 경우에는 강한 처벌 규정이 있으므로, 이것이 신문고 치기를 기피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민원을 제기하는 긴 과정의 사이사이에는 방해꾼들이 있었겠지요.

순금사(추후 의금부로 변경)에 명하였다. "신문고를 치며 호소하는 자를 막지 말라. (이 명령을) 위반하여 (신문고 치는 자를) 막거나 지체하는 자는 사헌부(지금의 검찰)에서 조사하고, 이를 보고하여 죄를 따져라." (태종실록 6년 11월 8일)

예나 지금이나 민원 처리를 성가시게 여기는 공무원이 있기 마련입니다. 신문고 치는 행위를 방해하는 사람은 처벌하겠다며 임금이 직접 관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원인의 접근은 종종 제지당합니다. 특히 '빽 없고' 신분 낮은 이들이 상대적으로 소외당합니다.

개인 소유의 여자종 자재가 광화문의 종을 치며 자기의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호소하므로, 승정원(임금 비서실)에서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였다. "의금부의 당직원이 (신문고 치는 것을) 막기 때문에 종을 쳤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이와 같이 금지당한 사람이 반드시 여럿일 터이니, 그 의금부의 당직원을 사헌부(현 검찰)로 넘겨 조사하게 하라." 결국 김중성·유미의 의금부 관직을 파면하였다. (세종실록 10년 5월 24일)

신문고를 지키는 당직자가 접근을 막자 한 천민이 신문고 대신 광화문의 종을 쳤습니다. 그 소리는 경복궁 일대를 울려, 임금의 귀에도 들렸을 테지요. 진상을 듣고 세종은, 이번 한 번만이 아니리라 예상했고, 역시나 조사 결과도 그러했습니다.

부당함을 호소하면 누군가는 들어준다는 사회적 신뢰가 흔들려, 신문고 제도가 유명무실해질 것을 염려한 세종은 담당자를 처벌합니다. 그런가 하면 여론 수렴이라는 당초의 공적 취지에서 벗어나 신문고를 치는 민원인들도 종종 발생합니다.

신문고의 역기능
 
 2007년 5월 16일 서울 서초문화회관에서 연극인들이 조선시대 백성들의 억울함을 임금에게 직접 고하였던 태종의 신문고 상소과정을 극형식으로 재현하고 있다.
 2007년 5월 16일 서울 서초문화회관에서 연극인들이 조선시대 백성들의 억울함을 임금에게 직접 고하였던 태종의 신문고 상소과정을 극형식으로 재현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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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대언(임금 비서) 김종서가 아뢰었다. "경상도의 진군(진영 소속된 군인)이 기선군(해군)의 예에 의거해 관직을 받고자 하여 두세 번 신문고를 치니, 이것은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아닌데도 전하를 번거롭게 하니, 이를 처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임금이 말하였다. "이미 원하는 바를 잃었는데(관직을 못 받았는데) 또 그 죄를 입게 된다면 진실로 불쌍하다." (세종실록 14년 7월 18일)

탐욕이나 사적 이득에 눈이 가려져 신문고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신문고로 민원을 제기했음에도 구제를 받지 못하거나, 무지한 탓에 신문고 이용 규범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못해서 처벌받는 이가 발생할 것을 세종은 염려합니다.

정해진 절차를 뛰어넘어 임금에게 직접 고발하거나 무고하는 사람도 세종은 처벌하지 않으려 합니다. '오죽하면'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웠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말길을 넓힌다는 목적도 존중되어야 하지만, 당초 세운 처벌 기준을 준용하지 않고 예외를 남발하면 제도의 취지가 훼손될 수 있습니다.

"사헌부에서 아뢰었다. '근래에 신문고를 치는 자가... 오직 개인사만 호소하며... 무고하는 자, 함부로 관청에 고하는 자, 절차를 거치지 않고 왕에게 바로 호소하는 자를 모두 그대로 두고 죄를 따지지 않기 때문에, 나쁜 무리들이 조금만 마음에 불평이 있으면 관리를 대면하여 '내가 마땅히 신문고를 치겠다'고 욕지거리를 하고, 흔히 웃어른과 다투어 이기지 못하면 '내가 마땅히 신문고를 치겠다'고 문득 대듭니다... 또 그 사이에 때론 바르게 판결한 것을 잘못 판결했다고 망령되게 일컫고, 때론 판결이 확정되지 않은 것을 확정되었다고 망령되게 일컬으며... 이로 인해 소송이 복잡하게 불어나고, 국가의 품격이 떨어지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종실록 15년 1월 16일)

사적 원망을 품고 남을 무고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문고를 두드리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또한 고소·고발을 남발하여 사법·행정 기관에 부담이 가중됩니다. 공무원에게도 고소하겠다며 위협해 공공기관 및 국가의 권위를 약화시키거나,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대들며 연장자 존중의 가치를 위협하는 이들도 다수 등장합니다.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없어'라며 혀를 차고 말 일이 아닙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사회 기강의 주요 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문고의 역기능으로 인해 하극상이 만연하고, 이로 인해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공공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정부 내에 공유됩니다. 신문고 제도가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것이지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의 반복

임금이 말하였다..."당초에 신문고 치는 것을 중지함은 어느 때에 있었으며, 또 무슨 까닭으로 인한 것인가" 영사(주요 관청의 최고위직) 홍윤성·김국광이 아뢰었다. "세조조에 어떤 사람이 잘못 누고(시각을 알리기 위해 치는 북)를 쳤는데, 이로 인하여 금지시킨 것이고, 별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북을 치게 허락하심도 무방합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그것을 허락하여라." (성종실록 2년 12월 15일)

세조 때 한 민원인이 시간을 알려주는 누고를 신문고로 오인하여 친 사소한 사건으로 인해 폐지되었던 신문고 제도는 성종 때 부활합니다. 그러나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을 보이다가 정권에 따라 폐지와 복구를 오갑니다. 공론 정치라는 이상과 제도의 운영이 가져오는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반복한 것이지요.

임금이 '신문고는 나라를 세운 초기의 옛 제도이다'라며 다시 설치하도록 명했는데, 시골 백성들이 자질구레한 일을 가지고 와서 번거롭게 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번잡스러움을 견디지 못하여 임금이 조사하기도 전에 (관료들이) 앞질러 처분해 버려서, (지방의) 관찰사와 수령이 전후로 죄를 입은 자가 많았다. 최후에는 호남의 옛 도백(관찰사) 홍낙성이 대략 그 폐단을 아뢰니, 임금 또한 바로 후회하였다. (영조실록 49년 3월 10일)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지방 내에서는 최고 통수권자인 관찰사·수령의 권력 행사에 신문고 제도가 제동을 걸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신문고는 임금과 백성들 간의 직접 소통을 가능하게 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여론을 수렴하는 일종의 '핫라인'으로 개설되었습니다. 한편 민원인들이 그 취지를 밝게 헤아리지 않고 이용하여, 정부에 계륵과 같은 제도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정부가 국민과의 공감을 표방하며 운영하고 있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과 국민신문고 제도에 대한 비판이 종종 제기됩니다. 허위사실 공표, 명예훼손, 가짜뉴스 생성 등을 통해 오히려 사회적 소통을 방해하는 장으로 악용되는 사례가 보도되고 있는 때문입니다.

직접민주주의 실현의 장은 결국 시민의 민주적 의식에 의해 유지 및 기능할 수 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목도해왔습니다. 우리의 소통 창구가 부침을 거듭하다가 폐지된 조선시대의 신문고처럼 되지 않도록 눈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다음 회에서는 또 다른 민의 수렴 제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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