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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디 포스터 주연의 영화 <콘택트>에는 "지구에만 생명체가 산다면 엄청난 공간 낭비"라는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이런 엄청난 비효율은 광활한 우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행정안전부가 지난해 발표한 주민등록 인구 현황에 따르면, 우리 국토 면적의 10%에 불과한 수도권(서울, 인천, 경기)에 전체 인구의 50.17%가 몰려 산다. 전 국토의 수익을 빨아들이는 서울의 땅값과 집값이 임계점에 도달하자 점차 인천과 경기도로 인구 유출이 시작됐지만, 팽창의 범위는 좀처럼 수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수도권에 계속 아파트를 지어 공급을 늘리는 방식이 집값을 잡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사실 이조차도 의심스럽다), 이 비효율적인 구조를 바꿀 것 같지는 않다. 수도권을 벗어나도, 전국 어디에서도 꽤 괜찮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서울로의 부의 집중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여기, 과감하게 수도권을 떠나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삶을 시도한 연구자가 있다. 1인 연구소인 이후연구소 소장 하승우(49)는 2013년 서울의 직장과 경기도의 아파트를 떠나 옥천에 둥지를 틀었다. 수도권에서는 꿈도 못 꾸었을 '마당 있는 집'. 마당은 그럴듯하지만, 수도권을 떠난 삶도 그럴듯 했을까?
  
하승우 소장은 탈수도권을 선언하며 옥천군에 자리를 잡은 지 9년째다. 옥천을 비롯한 풀뿌리 자치 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쳐가고 있다.
▲ 이후 연구소 소장 하승우 하승우 소장은 탈수도권을 선언하며 옥천군에 자리를 잡은 지 9년째다. 옥천을 비롯한 풀뿌리 자치 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쳐가고 있다.
ⓒ 하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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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이 주도하는 운동? 주민이 사라지는 지방

한국에서 몇 명 되지 않는 아나키스트를 자임하는 그는 지방자치단체 예산, 주민자치, 생태·환경, 정당정치, 직접 행동 등 다방면의 연구와 실천을 해온 전문가이자 활동가다. '아나키스트'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말해주듯 그는 항상 삐딱한 시선으로 비주류의 길을 걸었다. 어쩌면 아무 연고도 없었던 그의 옥천행도 이런 삐딱함의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고교시절부터 남다른 삐딱함을 뽐냈던 그는 대학원에 진학해 아나키즘, 비판사회이론, 풀뿌리 정치 등 주류와는 결이 다른 정치학 연구를 했다. 그러던 2001년, 시민자치정책센터(이후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으로 재창립)와 만나며 이론과 실천을 접목할 기회를 잡았다. 당시 시민자치정책센터가 과천에서 연 '시민자치학교'의 수강생들은 자신이 배운 것을 실천해보자며 '보육조례개정을 위한 주민발의' 운동을 시작했다.

"과천 보육조례 주민발의는 주민들이 온전히 준비하고 실행한 주민 주도적 운동이었어요. 풀뿌리 활동가들이 도와주기는 했지만, 주민들이 주도해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집행했어요. 결국 이 힘이 시의회를 움직여서 주민들이 요구한 내용 그대로 통과시켰죠. 탄력이 한 번 붙으니까 다른 주민자치 운동으로 계속 확장되고 학교급식조례제정 운동에 영향을 미쳤어요."

누군가 사회적 약자 대신 운동해주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의 풀뿌리가 직접 일어나 실행하는 운동. 이런 형태는 당시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각광받으며 몸집을 불리던 시민운동과도 다른 것이었다. 과천에서의 경험으로 그토록 꿈꾸던 풀뿌리들의 직접 정치, 아나키스트적 이상이 실현될 것만 같았다.

풀뿌리 지역정치에 대한 관심은 2006년 개발 바람이 사라지지 않는 지리산에서 주민 스스로 공부하고 대안을 찾는 모임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강수돌, 우석훈, 구자인, 이호 등 저명한 풀뿌리 연구자, 활동가들과 5개 시·군 주민들이 구례에 모였다. 이들은 2, 3주마다 같이 공부하고 치열하게 토론하면서 단순한 개발 반대를 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풀뿌리의 힘을 모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런데 정작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주민들과 연구자, 활동가들이 함께 공부하고 대안을 찾아 나가면서 '주민 주도가 맞다'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그런데 진짜 문제는 지역에 가면 주민은 사라지고 있고, 같이 논의할 연구자나 활동가를 찾기조차 어렵다는 것이었어요. '서울에 몰려 있는 활동가나 연구자들이 지방으로 이주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 서울을 떠나 비수도권으로 이주해야 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던 것 같아요."

이율배반의 도시, 서울

도시에 대한 온갖 정이 다 떨어져도 대부분의 사람이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십중팔구 '돈', 즉 직장 때문이다. 그도 그랬다. 지방 이주를 결행하려 해도 항상 밥벌이가 발목을 잡았다. 대학에서 오랫동안 연구교수로 일하다 모교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가르치는 과정이 만들어지자 객원 교수로 참여했다. 그러나 학생에게 가르치는 내용과 그가 마주한 현실은 너무 차이가 컸다.

"학생들 만나는 걸 워낙 좋아해서 강의하는 것은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대학은 점점 이상하게 변해가요. 학생들에게는 연대와 시민성을 가르치면서 평가는 심지어 팀별 수업도 경쟁에 기초한 상대평가로 해요. 팀 간의 경쟁만이 아니라 팀 내에서도 서로 경쟁하게 만드는 거죠. 또 사회적 평등과 정의를 가르치면서 교수들은 객원 교수, 계약직 같은 방식으로 뽑아요. 저조차도 언제 그만두라는 통보를 받을지 알 수 없었고... 시민교육이라는 것이 그냥 그럴듯한 상품 포장지 같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어요."

결국 1년의 계약 기간을 채우고 미련 없이 떠나기로 했다. 직장도 집도. 마음의 결심이 서자,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두 그룹이 의기투합 했다. 하나는 자신과 같이 풀뿌리 자치 운동에 관심 많던 사람들의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인권운동을 하는 아내의 활동가 그룹이었다. 두 그룹은 함께 귀촌을 공부하면서 살 곳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 물건도 너무 고르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한다 했던가? 어디에 둥지를 틀지 결정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렀다.

"어디로 갈지 결정을 못해서 귀촌에 성공한 분들에게 의견을 구하니, '평생 살집'을 찾지 말고 '잠시 쉬어 갈 집'을 고르라고 조언해 주더라고요. 저에게 쉬어갈 곳이 어디인지 생각해보니까 서울에서 집 보러 다니던 곳 중간 즈음에 위치한 옥천이었어요. 잠시 머문다 생각하고 결정했죠."
 
옥천으로 이주해 구한 마당 있는 집. 보기에는 좋지만 잔디관리와 집수리 등 손이 많이 가는 고달픔은 감수해야 한다. 이 곳에서 세 식구가 산 지 9년째.
▲ 마당 있는 집 옥천으로 이주해 구한 마당 있는 집. 보기에는 좋지만 잔디관리와 집수리 등 손이 많이 가는 고달픔은 감수해야 한다. 이 곳에서 세 식구가 산 지 9년째.
ⓒ 손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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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을 갱신할 때마다 오르던 전셋값과 귀촌그룹이 모아둔 자금, 그리고 저축을 모아 집값을 마련했다. 운이 좋아 지은 지 1년이 된 마당 있는 집을 구했다. 그런데, 함께 의기투합한 사람들도 안착에 성공했을까?

"아니오. 두 가구만 내려왔어요. 활동가 그룹은 거의 내려오지 못했어요. 일을 좀 내려놔야 이동이 가능한데, 인권운동은 현안이 너무 많았어요. 사회운동하기에는 서울이 제일 좋잖아요? 미디어나 의제가 다 서울에 있고 네트워크하기에도 서울만 한 곳이 없어요. 그분들은 지금도 서울에서 계속 운동하고 있어요.(웃음)"

사회운동 활동가들에게도 서울은 이슈를 만들기도, 다른 활동가들과 협업하기도 수월한 곳이다. 작은 지방 동네에서는 대부분 이해관계와 얽히기 쉽고 함께 운동할 사람도 찾기 어렵다. 지방의 활동가 월급은 수도권에 비해 낮지만, 그렇다고 생활비가 실감 날 정도로 적게 드는 것도 아니다. 물론 비교할 수조차 없는 주거비는 예외다. 의기투합한 이들이 여전히 서울에 발목 잡혀 있으니 애초에 꿈꾸던 지역 공동체는 물거품이 되었나?

"내려오면서 우리끼리 공동체를 만들자는 생각은 접었어요. 쇼핑하듯이 이곳 저것 공동체가 잘 되는 곳 찾아다니는 것도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살고 싶을 정도로 공동체가 잘 되고 있는 곳이 존재하기나 할까? 설령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걸 소비하려고 들어가는 게 맞나? 또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끼리 모여 산다고 생각한 게 맞나? 이런 의문이 들더군요. 이주하면서 처음 구상은 다 포기했죠."

"농촌 살리려면 농촌기본소득 고민해야"

이주 9년째. 그는 지역의 막강 언론 <옥천 신문>에 기명 칼럼을 연재하고 있어 '하박사'라 불린다. 풀뿌리에 대한 그의 관심과 의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 옥천에 대한 정밀한 분석과 대안 마련 활동으로 이어졌다.

2015년에는 옥천순환경제공동체, 옥천신문과 함께 지표위원회를 만들어 지역 현황을 세세하게 분석한 '풀뿌리사회지표 소책자'를 펴냈다. 주민들과 함께 옥천의 인구변동부터 직업별 비율, 소득 격차, 주거 형태, 복지 환경, 지자체 예산과 지역 정치, 지역 경제 등을 샅샅이 훑는 작지 않은 프로젝트였다.

2016년에는 옥천군의 10년 치 예산을 모조리 분석해 예산 흐름을 드러내고 지역에서의 정책 대안을 준비했다. 예산 감시 교육동영상인 '비리 잡는 세금판다' 제작 PD와는 지금도 집필도 하고 전국을 누비며 강연도 한다.
 
하승우 소장은 2015년 옥천순환경제공동체, 옥천신문과 함께 지표위원회를 조직해 옥천군의 거의 모든 환경을 지표로 기록했다. 이 결과물은 '풀뿌리사회지표 소책자'로 발간됐다.
▲ 옥천군 지표위원회 하승우 소장은 2015년 옥천순환경제공동체, 옥천신문과 함께 지표위원회를 조직해 옥천군의 거의 모든 환경을 지표로 기록했다. 이 결과물은 "풀뿌리사회지표 소책자"로 발간됐다.
ⓒ 하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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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한 활동으로 옥천에서는 나름 '셀럽'이 되었지만 여러 사람이 알아보니 쓰레기를 아무 곳이나 버리는 식의 소소한 '나쁜 짓'을 할 수 없고 사생활 보호가 안 된다는 단점이 생겼다. 그래도 서울과는 차원이 다른 삶의 양식은 이제 되돌리기 어려워졌다.

"살아보니 내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긴 서울보다 시간이 느려요. 할 일도 많고, 집도 알아서 고쳐야 하고, 느릿느릿 걸어서 볼 일 보고... 서울은 작은 공간에 바글바글 모여 살아서 사람들이 민감한데 여긴 여유롭죠. 물론 처음 올 때는 우리 빼고 다 아는 사람이고,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있긴 했어요. 여기 읍내 인구가 3만이니 서울 아파트 큰 단지 하나 규모라 정보도 빨리 퍼지고요."

그렇다고 누구나 귀촌에 성공하는 것은 아닐 테다. 오히려 그가 '농사'를 선택하지 않고 시간과 공간 제약을 덜 받는 '독립연구'를 업으로 삼고 있어서 버틸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잔인한 수도권 살이에 지친 이들에게도, 농촌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몇 달 만에 수억의 집값이 오르는 비현실적인 현실에서, 농촌에서의 삶은 생존을 보장할 수 있을까?

"지방을 살리겠다고 균형발전을 이야기하면서 무슨 무슨 센터를 짓고, 사람도 없는데 대규모 공원만 많은 예산을 들여 만들어놔요. 이제 건물이 아니라 사람에게 지원할 때가 되었어요. 지금처럼 대농 중심의 지원이 아니라 농촌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일정한 소득을 지원하는 '농촌기본소득' 같은 것을 고민해야 해요. 옥천만 해도 전체 인구 5만 명 중에 겸업농을 합친 농가인구가 26%(1만 3천 명)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일정한 지원이 있어야 지역경제가 순환할 수 있어요. 농촌에는 농민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의 계산에 따르면 현재 옥천군 예산의 10분의 1만 투자하면 5만 명의 군민에게 매년 100만 원씩 지원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지원만으로 지역경제가 유지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옥천에서는 '옥천살림', '옥천신문', '옥천순환경제공동체'가 만들어져 공공 급식,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서울 청년과의 교류 등 다양한 시도를 진행하고 있다.

이런 시도가 빛을 보기 위해서는 그가 말한 농촌기본소득 같은 것을 적극적으로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서울의 부유함은 알고 보면 지방과 농촌의 부를 끊임없이 빨아들인, 착취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농촌이 스스로 일어서기 위해서는 유출된 지역의 부를 일정하게 환원해 자생력을 지원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국가기관이나 대학 몇 개가 특정 지역으로 이동한다고 해서 국토의 엄청난 비효율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중요한 것은 전국 어디나, 골고루 자생력을 갖춘 지역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농촌을 지원해 살 만한 공간을 만들 수 있다면, 그래서 수도권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해 발버둥 치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의 유력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소수의 불로소득자를 제외한 모두에게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

옥천의 셀럽 하승우 소장이 어떻게 설득력 있는 대안을 만들어 내는지 함께 지켜보자.
 

태그:#하승우, #옥천, #탈수도권, #농촌기본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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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생활속 진보를 꿈꾸는 소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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