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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에서 '디지털 영상물 기획'이라는 전공 수업을 들은 적 있다. 2018년 가을학기, '국회의원 메이크오버 쇼'를 아이디어로 기획해 제출했다.  

넷플릭스에서 즐겨보던 예능 프로그램 <퀴어 아이>(다섯 명의 게이 스타가 의뢰인의 외모와 라이프스타일을 개선해준다는 내용의 쇼)의 콘셉트를 차용해 정치에 접목한 것이었다. 국회의원은 300명이나 되는데, 300가지 색깔은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5060 남성의 얼굴을 한 고루한 양복족이라는 국회의원의 이미지를 사랑할 수 있는 유권자가 몇이나 될까 싶었다.

나는 총진행을 개그우먼 박나래에 맡기고 내로라하는 패션, 헤어, 메이크업 분야의 전문가들을 캐스팅해 프로그램을 메이저 방송국에 편성했다. 원내 다섯 정당(20대 국회 기준, 21대 국회는 일곱 정당)에 소속된 다양한 성별과 연령대의 의원들을 의뢰인으로 초청하면서도, 국회 입성한 지 오래지 않은 정치 신인에게 더욱 많은 기회를 주고자 했다. 메이크오버 쇼라는 장르적 포맷은 예능의 언어를 빌려온 것일 뿐, 국회의원의 스타일 변화과정을 함께 지켜보며 정치인의 신념과 생각을 끌어내고 알리겠다는 것이 어느 대학 4학년생의 야심찬 목표였다.

학기말 과제로 제출하고 여태 잊고 있던 이 기획이 정의당 류호정 의원 덕에 다시 생각났다. '50대 남성 의원에게는 정장을 벗어난 캐주얼 스타일링과 셀프 그루밍 방법을 알려주고, 30대 여성 의원에게는 퍼스널 컬러 진단에 따른 상징색을 제안하는 등 잿빛 정장의 국회를 다채롭게 만들고 싶다'라는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문장에 웃음이 났다. '한국 국회는, 대중은 쉽지 않단다, 얘야.'

국회는 진보했다, 다만 
 
유시민 의원은 의원선서는 못했지만, 국가인권위원 임명안 표결에는 참여했다. / 유시민 의원과 김원웅 개혁당 대표가 본회의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유시민 의원은 의원선서는 못했지만, 국가인권위원 임명안 표결에는 참여했다. / 유시민 의원과 김원웅 개혁당 대표가 본회의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03년 첫 등원에서 흰색 바지를 입은 유시민 의원은 의원선서는 못했지만, 국가인권위원 임명안 표결에는 참여했다. / 유시민 의원과 김원웅 개혁당 대표가 본회의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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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내 소수정당 소속 의원 혹은 젊은, 여성 의원들이 세간의 비난을 떠안을 때마다 여당을 비롯한 거대 정당은 동료 정치인을 보호하기는커녕 침묵해왔다. 이번 '류호정 원피스 논란'에 있어선 류 의원의 소속 정당인 정의당뿐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유정주, 안민석, 고민정 의원,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 등이 사태에 대한 의견을 거들며 류 의원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타 정당 의원이 겪고 있는 난처함에 대해 경계를 넘어 즉각적인 연대를 보여준 흔치 않은 풍경이었다.

소수정당을 향한 비난에 두 거대정당 소속 의원들 일부가 호위하기를 자처했으니 적어도 21대 국회는 원피스 정도는 국회의원의 복장 카테고리에 포함하겠다는 것 같다. 유시민 전 의원의 '빽바지' 등원을 막았던 16대 국회와 비교하자면 엄청난 진보이고 열린 마음이다. 변화에 감사한다. 

이제 논의는 끝났는가? 그렇다고 여기서 끝낼 수 있을까? 이는 특정 지지층의 '일부'가 일으킨 해프닝이었는가? 류 의원을 향해 쏟아진 성희롱적 언사들은 '일베'와 같은 극우-여성혐오 성향의 커뮤니티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꾸려진 '더불어민주당 100만 당원 모임'처럼 극우 혐오 세력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듯 보이는 집단들에서도 린치는 이어졌다. 이는 커뮤니티의 형태와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여성을 향한 무자비한 혐오가 실재함을 의미한다. 누군가를 혐오의 대상으로 지목하는 순간, 혐오의 주체들은 그 대상을 이루는 모든 정체성을 소거하고 여성이라는 약자성만을 남겨 집단폭력을 가한다.

그렇기에 여성들은 혐오의 대상이 될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거나 벗어날 수가 없다. 직업이 국회의원인 자도, 평범한 직장인도, 블루칼라 노동자도 혐오의 대상이 될 확률은 똑같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고 낮음은 그들이 더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거나,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남성들은 인터넷 상에서 몇 문장으로 한 정치인을 순식간에 '술집 여자'로 추락시킨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누군가에겐 '미쓰박'으로 불렸듯이 말이다.

류호정 의원은 "제가 양복(정장)을 입었을 때도 그에 대한 성희롱 댓글이 있었다"라고 덤덤하게 반응했다. 성차별주의 남성들은 류 의원을 양복 입은 '여자', 원피스 입은 '여자', 국회의원인 '여자'로 본다. 그들은 여성 정치인들의 의정활동이 아닌 다리를 먼저 쳐다본다. 자신의 정치 활동으로 실력을 증명받지 못하고 성별화된 존재로만 여겨지는 것은 직업 정치인에게 가해질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수모이다. 이 수모를 겪은 남성 정치인은 없다.

류 의원 본인과 그를 국회로 보낸 투표자들은 아마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지금껏 국회에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자들은 정녕 누구였냐고. 그간 입법기관을 욕보인 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이 모든 사태가 국회의 권위주의를 타파하겠다는 목적을 가진 류호정 의원의 기획이었는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본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류 의원은 이미 훌륭한 기획자다. 국회에 펄럭인 도트무늬 붉은 원피스는 내가 본 최고의 정치 이미지 중 하나가 됐다. 그 이미지에 국회의 권위주의자들과 한국사회의 여성 혐오자들은 단시간에 반응했다. 침묵을 지키던 '패션테러' 정치인들이여! 빨주노초파남보, 길고짧게, 화려하고 담백하게, 마음껏 입으시라. 예쁘고, 멋지게, 잘 어울리게 차려 입고서 약자와 소수자를 위해 정치하시라.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지난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잠시 퇴장하고 있다.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지난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잠시 퇴장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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