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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기자말]
* 이 기사는 구한말 조선에 머문 미 해군 중위 조지 클레이턴 포크의 이야기를 사료와 학술 논문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이전 기사 : '코리언 알파벳' 한글을 극찬한 1800년대 서양인]

1882년 6월 3일 일본 코베를 출발한 우리는 부산, 원산,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하고 시베리아를 횡단한 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베를린, 파리, 런던을 거쳐 마침내 10월 3일 뉴욕에 도착했습니다. 4개월이 걸린 지구 반바퀴의 여행이었습니다. 그 여행을 통해 나는 미국인으로서 최초로 한국을 방문하였을 뿐 아니라 미국에 한국을 처음으로 소개함으로써 한국과 운명적인 인연을 맺게 되었지요.
 
1884년 28세
▲ 조지 클레이턴 포크  1884년 28세
ⓒ Naval Historical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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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856년 10월 30일 펜실바니아주의 랭캐스터 카운티에 있는 작은 강변 마을 마리에타(Marietta)에서 태어났습니다. 두 동생과 함께 강변에서 뛰놀고 멱을 감던 유년시절이 나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던 것 같군요. 유유히 흐르는 푸른 강(수스케하나강Susquehanna River)은 소년의 가슴에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을 키워주었습니다. 시골뜨기가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미합중국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16살 때였습니다. 

한 연구가는 나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군요.
 
"조선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 표현된 향수로 보아 조지 포크는 고향에서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두 동생들과 강변에서 뛰어 놀며 지냈던 시절을 아련한 추억 속에 떠올린다. 그는 형제들 가운데에서도 뛰어났고 품은 뜻이 컸다. 메릴란드의 아나폴리스 해군 사관학교에 들어가 1876년 6월 3등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시골 소년이 아니었다.

준수한 스무 살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몸은 날씬하고 키는 중키였으며 눈은 파랬고 머리칼은 물결쳤다. 콧수염을 기른 그는 이지적이고 유능했으며 열정적이었다. 정의감이 투철해 불의를 참지 못했으며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책임감이 강했다. 한 마디로 해군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제목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술도 잘 마시는 호방한 쾌남아였지만 내면속에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처를 잘 받는 청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곤 하여 괴팍한 녀석이라는 말도 들었다. 고집불통이어서 한 번 옳다고 믿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 대쪽 같은 성격이 훗날 조선에서 문제가 될 것이다." - SAMUEL HAWLEY, <AMERICA'S MAN IN KOREA>(2008), 1-2쪽

졸업 후 나는 아시아 함대에서 6년간 복무했습니다. 그 기간 중에 여러 외국어 특히 동양언어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내 일본어를 잘 할 수 있었고 중국어는 표준어 뿐 아니라 광동어도 익혔습니다. 힌두어와 산스크리트어에도 흥미를 가졌지요. 귀임시에 한국어와 한글을 접했음은 앞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조선에 한글이라는 고유문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신선한 자극을 받았습니다. 거대한 중국대륙의 변방에 매달려 있는 '은둔 왕국'에 그들만의 고유한 문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당시 나는 한글의 우수성을 충분히 알 수 없었지만 매우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글임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외국어 실력은 아이사 함대에서 곧 주목을 받았습니다. 어떤 박사학위 논문은 이렇게 쓰고 있군요.  
 
"포크는 아시아 함대 복무에 첫 발을 디디면서부터 비범한 사관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강렬한 호기심을 지닌 그는 즉시 일본어 회화와 작문 공부를 시작했다. 아시아 함대는 외국어에 특별한 열정과 호기심을 지닌 인재를 필요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관들은 포크를 인정하고 격려했다. 당시 유럽과 미국의 함정들은 아시아 해안을 순항하면서 자국 상인들과 선교사들을 보호하고 지원했다. 극동에서 외교 활동의 前線(전선)에 있었던 해군은 현지 당국을 다루는 국가 정책의 통상적인 수단이기도 했다......…. 함장과 사령관들은 자신들이 수행하는 준외교관적인 역할이 군사 임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포크를 부하로 둔 상관들은 그의 외국어 지식과 동양 지식이 동양 각지를 이해하고 다루는데 유용함을 알고 만족해 했다. 포크 자신도 통상적인 해군 임무 외에 통역 및 정보 장교로서의 역할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 - ROBERT E. REORDAN, <THE ROLE OF GEORGE CLAYTON FAULK IN THE UNITED STATES-KOREAN RELATIONS, 1884-1887>(1955), 3-4쪽

귀국 후 나는 해군도서관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한직 중의 한직이었지요. 당시 우리 해군은 바다에 떠다니는 외교관이었죠. 우리의 무기는 대포와 외국어 실력이라고 나는 생각했어요. 아니, 그걸 떠나 외국어는 내가 속한 문명권을 벗어나 다른 문화와 인간을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창구였습니다.

도서관에서 나는 틈틈이 한국어 공부를 시도했지만 학습 교재는 희소했고 그 내용도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나는 조선에 대한 궁금증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훗날 결혼하게 될 나의 여친은 한국에 가까운 나가사키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빨리 극동으로 다시 가고 싶었습니다.

귀국한 지 반 년이 좀 넘은 1883년 4월 나는 아시아 함대복무를 신청했습니다. 인사관계자를 설득하기 위하여 나는 동양언어 실력을 내세웠습니다. 당시엔 미국인 가운데에 중국어와 일본어를 아는 사람은 있었지만 한국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약간이나마 한국어를 아는 유일한 해병임을 굳이 숨기지 않았습니다.     

영국 외교관들의 조선 탐구는 뜨거웠다
 
일본 도자기의 세계적 브랜드
▲ 사쓰마 도자기 Satsma ware  일본 도자기의 세계적 브랜드
ⓒ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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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나는 그 기회에 한 가지 흥미로운 정보를 당국에 보고하였습니다. 다름아니라 우리 미국의 우방이자 경쟁국이며 세계 최강의 제국이던 영국의 외교관들이 수행하고 있는 조선탐구 동향이었습니다.

일본에 주재하는 두 명의 영국 외교관이 눈에 불을 켜고 조선을 탐구하고 있었습니다. 고베 영국 영사관의 아스턴(W. G. Aston) 영사와 동경 공사관의 사토우(Earnest Satow) 서기관이 그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뛰어난 외교관이자 탁월한 동양학자였으며, 일본학 및 한국학의 개척자였습니다.

아스턴 영사는 벌써 1979년에 47쪽에 이르는 <일본어 및 한국어 비교연구 A Comparative Study of the Japanese and Korean Languages>라는 논고를 쓰기도 했고, 사토우는 1880년 5월부터 조선에서 온 승려에게서 한국어와 한글 개인 교습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외교관의 한글 공부는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나중으로 미룰까 합니다.

이 기회에 사토우 서기관의 조선인 도자기 마을 탐방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아마 금시초문일 겁니다. 왜란 때 많은 조선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 후 수 백년 동안 그들을 직접 방문한 조선인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일본에 끌려가 도자기를 구우면서 살아가는 그들의 실상은 고국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단지 일본에서는 교토의 의사이자 여행가(橘南谿)가 1700년대 말에 조선인 도자기 마을(심수관가가 있던 곳)을 방문하여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자세하고 전문적인 사토우의 탐방기와 논문은 여태 잠들어 있었습니다.  

사토우가 탐방한 조선인 마을은 바로 유명한 심수관가가 소재한 곳이었습니다. 세계적인 도자기 브랜드로 명성을 이어오는 사쓰마 야끼(薩摩焼Satsuma-yaki 사쓰마 도자기)의 본고장이기도 하지요. 지도에서 그 위치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조선인 도차촌 위치
▲ 조선인 도자촌  조선인 도차촌 위치
ⓒ 구글어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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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이름은 당시 '나에시로가와苗代川' 혹은 도자기 마을이라는 뜻으로 '쓰보야(壺屋)'라 불렸습니다. 하지만 이들 옛 지명은 모두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오늘날은 히오끼(日置)시의 미야마(美山)로 바뀌었지요.  

이 조선인 마을을 사토우가 답사한 것은 1877년 2월 초였습니다. 답사 내용을 상세히 기록해 놓은 일기가 오랫동안 영국 국립 도서관에 잠들어 있었지요. 또한 사토우는 이듬해 초 1878년 2월 23일왕립일본학회에서 <The Corean Potters in Satsuma>(사쓰마의 조선 도공들)> 제목의 논고를 발표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사토우는 자신에게 숙박을 제공한 조선 여인의 인정어린 안내를 받았습니다. 먼저 조선 여인이 등장하는 일기를 보겠습니다.  
 
1877년 2월 6일 

아침 일찍 인력거로 타고 나섰다. 우리를 안내하는 현지인은 59세의 노부인으로 이름이 '후데'이다. 부인은 오야에(Oyaye-?)에서 일하고 있다 한다(조선 이름은 朴正順보쿠쇼준). 그녀 역시 조선인으로 조상이 16세기 말에 일본에 끌려왔다고 한다. 종일 비가 온다. 우리는 12시 반에 후데 부인 댁에 도착했다. 동네는 쓰보야(壺屋)인데 나에시로가와라고도 한다. 부인 댁에서 그날 내내 휴식을 취했다. 먹고, 마시고 읽었다. 방 한 켠에  일본 역사책이 있어서 그것도 읽어 보았다. 노부인이 하룻밤 묶으라 해서 기꺼이 받아들였다. 난생 처음으로 일본 베개를 베고 잤는데 그런대로 편했다. (끝) 

사토우는 박정순의 안내로 2월 2일 및 7일 양일 간에 갈쳐 도차촌을 방문하였습니다. 먼저 2월 2일자 일기를 보겠습니다. 
 
1877년 2월 2일

우리는 9시 10분전에 출발했다. 길이 질퍽거린다… 쓰보야(壺屋)에서 한 사무라이가 경영하는 타마노야마 쿠아이샤(Tanoyama Kuaisha) 도요로 향했다. 이곳에서 사쓰마 도자기(고급 도자기 브랜드) 외에도 평범한 청백색 도기와 함께 갈색 오지 그릇이 다량으로 나온다. (조선인) 도공이 예수님 상을 빚고 있는데 높이는 약 20인치이다. 예수님 이미지는 "주간 그리스천Christian Weekly"이라는 책(미국의 통속 종교잡지)에서 따왔다고 한다. 예수님의 얼굴과 턱 수염은 매우 근사하다. 그러나 옷 주름은 불교의 승복과 흡사하게 해 놓았다. 

도요장의 설명에 의하면, 장식용 고급 자기를 굽는 데에는 세 단계가 필요하다. 먼저 수야키(素焼)를 하고 유약을 바른다. 그 다음 두 번째 굽고 나서 채색을 입힌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굽는다. 고급자기는 혼합 도토를 사용한다. 혼합 비율은 자기의 크기에 따라 다르다.   

도공이 갈색 오지 항아리로 난로를 만들고 있었다. 7달러에 하나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시장에 내다 판 것은 없다고 한다. 가리개용 도자기 도안도 내게 보여주었다. 3피트의 높이 위에 사자가 자리잡고 있다. 또한 기반도 사자들이 받치고 있다.

장식성이 매우 높은 자기류는 덴보(天保1830-1843)대에 와서야 시작되었으나 도자기 제조업 자체는 약 300년 전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는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이 끝난 시기를 말하는 것 같다. 이곳 도공들은 도자기를 다른 곳에서처럼 히비-야키(罅焼き)라 부르지 않고 히비키-야키(hibiki-yaki) 라고 부른다.......(끝) 
 
 2월 7일자의 훨씬 상세한 일기와 다음 해 발표한 논문은 다음에 소개합니다.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태그:#조지 포크, #한글, #도자기, #심수관 , #사쓰마야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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