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듬성한 눈썹을 아이 펜슬로 채워 넣고, 코랄 빛 립스틱을 바른 후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 마무리는 볼터치로 '톡톡'. 간만에 하는 화장이라 괜히 공을 들여본다. 눈치 빠른 딸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묻는다.      

"엄마, 어디가?"
"응. 엄마 오늘 약속있어."
"밖이 깜깜한데? 우린 어떻게 해?"
"아빠 일찍 오실 거야."      


때마침 칼퇴한 남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빛의 속도로 남편과 바통 터치.      

"여보, 애들 저녁 다 챙겨놨으니까 밥만 퍼서 줘."

애들한테 바짓가랑이 붙잡힐까봐 신발 뒤축도 구겨 신은 채 집을 나섰다.      

일년에 두 번, 회식하는 날입니다 
 
 동네 핫하다는 술집. 명성만큼 손님이 많다. 내가 밥하고 설거지할 동안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유흥을 즐기고 있었다니 살짝 배알이 꼴렸다.
 동네 핫하다는 술집. 명성만큼 손님이 많다. 내가 밥하고 설거지할 동안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유흥을 즐기고 있었다니 살짝 배알이 꼴렸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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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누난나~ 오늘은 회식하는 날. 동네 엄마들과 상하반기에 한 번씩 회식을 한다. 몇 년 전인가 회식을 이유로 매일같이 늦는 남편들에게 열폭한 계기로 '우리라고 못할쏘냐! 회식!' 그렇게 시작한 것이 정기모임으로 이어졌다.       

오후 7시 30분, 동네 빵집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한 친구가 늦는다. 헐레벌떡 뛰어온 친구가 "애들 밥 맥이고 오느라..." 하자 다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퇴근하는 직장인과 젊은이들 틈에 마흔 넘은 여자 넷이 나란히 걷고 있으니 왠지 부자연스럽다. <섹스앤더시티>의 세련미를 발산하고 싶은데 현실은 비루한 아줌마 넷이다. 그럴수록 어깨를 더 쫙 편다. 

도착한 곳은 동네 핫하다는 술집. 명성만큼 손님이 많다. 내가 밥하고 설거지할 동안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유흥을 즐기고 있었다니 살짝 배알이 꼴렸다. 메뉴판에 적힌 가격대를 보고 다들 흠칫 놀란 눈치. 하지만 뭘 시켜도 상관없다고 쿨하게 말한다. 

그래서 쿨~하게. 생 맥 네 잔과 골뱅이 무침 하나요~!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니 이 나이대의 여자 모임은 우리가 유일무이하다. 하긴 이 시간에 술 약속을 잡는 주부가 어디 흔할까? 술집 안은 중년 남자들, 패기 넘치는 대학생, 동호회 모임, 커플들이 저마다 흥에 겨워 잔을 부딪친다.

드디어, 우리 테이블에도 맥주 등장! 그런데 다들 반응이 미적지근하다. 이유인즉 나와 한 친구를 빼곤 전혀 술을 못마신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억지로 술 권하는 상사도 갑질하는 인간도 없는 전업맘의 회식자리... 기분 좋게 안주발만 세운다. 

그럼, 술도 안 마시고 흥도 없는 여자들이 술집에서 뭘 하냐고? 그러니까... 건전하게 놀면서 남의 불건전을 구경한다. 그것이 또 은근 꿀잼! 테이블 가득 소줏병이 세워진 남자들을 보면 "집에 가라 쫌!" 하며 열불을 내뿜고 어린 남녀가 쪽쪽 대는 걸 보며 "결혼 한 번 해봐야 정신 차린다"며 호호 거린다. 아마도 남들이 볼 땐 우리도 '위기의 주부들'일 것이다.       

별스럽지 않은 이런 풍경에 어린 아이처럼 재밌어 하는 건 우리 모두 홀몸 외출이 정말이지 간만인 탓이다. 다들 집 감옥에 갇혀 바깥 세상에 대한 감을 잃어가던 중이었다. 세상과의 연결고리, 어디서 찾을지 몰라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도. 이때 한 친구에게 '띠링' 메시지가 온다.      

"이 시간에 누구?"
"아직 애가 안 잔대."
"밤 11신데?"
"엄마 오면 자겠다고 했대..."     


친구는 얼핏 불안함이 감도는 미소를 짓는다. 판을 깔아도 맘 편히 놀 수 없는 엄마들이여~ 난 또 그게 짠해서 벌컥 맥주를 들이킨다. 목적도 없고, 뒷담도 없고, 술도 못 먹는 이 모임, 당최 왜 만나는지 궁금해진다. 기껏 해야 말 안 듣는 애들 얘기, 티브이 드라마 얘기... 결국 얘기는 돌고 돌아 그땐 그랬지로 귀결된다. 왠지 조연으로 밀려난 배우들의 항변 같아 처연한 느낌마저 든다.
      
누군가 하품을 시작하자 너도 나도 전염된다. "몇 시지?" 하고 핸드폰을 꺼내 보니 자정에 가깝다. 4시간 동안 맥주 네 잔과 안주 두 개, 이토록 순진한 아줌마 모임을 주인장이 좋아할 리 없다. 더 시킬까 말까 고민하다 "이제 일어나자"라는 누군가의 말에 다들 기다렸다는 듯 일어선다. 남편에게 "오늘 밤, 나 찾지 마!" 하며 도발하고 나왔는데, 갈 데도 없고 할 것도 없다. 왠지 억울하다.

회식의 끝은, 내일 아침 밥 걱정

학군은 별로라 하는데 '모성'군은 최고인 동네다. 탈선을 할래야 할 수가 없다. 삐뚤어지고 싶은 내 욕망은 한 번 꿈틀대지도 못하고 착실하게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얘들아 나 더 놀고 싶어...' 동조하는 친구가 없다. '내일 아침 수학 문제 풀어야지' 하는 것처럼 '내일 아침에 애들 밥 줘야지' 한다.
 
집으로 돌아오며 올려다본 밤하늘.  왜였을까? 회식을 끝내고 돌아오는 밤의 풍경에 울컥한 것은....
▲ 집으로 돌아오며 올려다본 밤하늘.  왜였을까? 회식을 끝내고 돌아오는 밤의 풍경에 울컥한 것은....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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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던 길을 따라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맹꽁이가 울고, 달무리가 엷게 퍼져 있다. 뒤늦게 올라온 취기 때문인지 분위기 때문인지 가슴이 울컥한다. "아~ 이 밤 냄새 얼마만이냐아~!" 소리를 꽥 지르자, 알콜기 1도 없는 여자 셋이 동시에 답한다.

"그러게."
"진짜 좋다."
"으음... 밤공기."


다들 행복한 표정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그때 나는 깨닫는다. 우리의 오늘은 고래의 숨구멍을 닮았구나... 바다 위로 숨 쉬러 나오는 고래처럼 우리도 숨 한번 쉬어보겠다고 밤의 수면 위를 이렇게 걷고 있구나. 센치한 생각도 잠시, 또 한 친구에게 '띠링' 문자가 온다.      

"아~ 남편이 언제 오냐고... 간다. 가!"

다들 들숨을 한껏 마시고 다시 깊은 수면 아래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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