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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살던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합니다.[편집자말]
나는 몇 달 전부터 어릴 적 살았던 여러 동네를 답사하며 그곳 자료들도 찾아보고 있다. 물론 예전에 살던 시절과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과거에 살았던 집들은 오래전 헐려 그 자리에 새집이나 건물이 들어섰고 주변 동네들 또한 많이 변했다. 나는 고향이 변해가는 모습을 기록하기로 했다. 그 첫 여정은 수유리, 서울 강북구 수유동이다. [이전기사 : 내 서울 도곡초 옛 졸업장에 '경상북도'가 적힌 이유]

수유리는 태어나서 초등학교 2학년 될 때까지, 그러니까 1966년부터 1974년 초까지 산 곳이다. 고향이란 말을 들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기도 하다. 드라마나 소설에서 고향을 묘사할 때 시골집 뒷산이나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를 보여주듯, 나는 수유리란 말을 들으면 우리 집 마당에서 보이던 북한산 인수봉과 동네 근처를 흐르던 우이천이 먼저 떠오른다.

수유리의 과거
 
<동국여도>  '도성도'에 기록된 '수유현' <동국여도>에서 한성의 도성 안과 도성 바깥의 성저십리가 기록된 '도성도'다. 오른쪽 위편의 빨간 타원이 '수유현이다.
▲ <동국여도> "도성도"에 기록된 "수유현" <동국여도>에서 한성의 도성 안과 도성 바깥의 성저십리가 기록된 "도성도"다. 오른쪽 위편의 빨간 타원이 "수유현이다.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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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 '경조오부도'에 기록된 '수유현' <대동여지도>에서 한성 지역을 기록한 '경조오부도'이다. 오른쪽 빨간 타원이 '수유현'이다.
▲ <대동여지도> "경조오부도"에 기록된 "수유현" <대동여지도>에서 한성 지역을 기록한 "경조오부도"이다. 오른쪽 빨간 타원이 "수유현"이다.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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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리처럼 끝에 '리'가 붙으면 왠지 도시보다는 지방이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서울 여러 곳에도 '리'가 붙은 지명이 있었다. 미아리, 청량리, 망우리가 그렇다. 현재 서울의 여러 지역이 한때는 서울이 아니었다는 흔적이다.

그렇다면 옛 한성, 서울 사대문 안에 있는 지역만 진짜 서울이었을까. 그렇게 보는 관점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한성은 지리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사대문 안쪽만 의미하지 않았다. 성 밖에도 한성부에 속한 지역이 있었다. 한성부 도성으로부터 10리, 그러니까 약 4km 이내의 지역을 '성저십리(城底十里)'라 불렀다.

조선은 그 지역에 한성부 산하 행정기관인 방(坊)을 두었다. 수유리는 지금의 종로구, 성북구, 강북구 일부 지역과 함께 숭신방(崇信坊)에 속했고, 정확한 행정구역은 '한성부 성저십리 숭신방 수유촌계(水踰村契)'였다. 지명으로서 수유현(水踰峴)을 언급하는 옛 문서도 많은데, 미아리 고개 너머 양주 방향으로 솟은 낮은 고개를 일컬었다. 그 일대가 지금의 수유동이다. 옛 지도에 그 흔적이 여럿 남아 있다.
            
조선 시대 동안 한성부였던 이 지역은 1911년에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소속으로 바뀐다. 일제가 경성을 한 나라의 수도가 아닌 한 지방에 속한 도시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1914년에는 일제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수유리 일대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수유리'로 다시 바뀐다. 그렇게 일제 강점기 내내 지금의 수유동은 경기도 땅이었다.

해방 후 1949년에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지역이 서울로 재편입되며 수유리는 '성북구' 관할이 된다. 그 지역이 원래 경성, 서울 땅이었으니 재편입이란 표현이 맞다. 당시 수유동은 '수유리'로 불렸는데 1950년에 서울시 조례에 의해 '수유동'으로 행정지명이 바뀐다.

하지만 이미 동으로 바뀐 지 오래인 1970년대에도 사람들은 수유리라는 지명을 입에 달고 살았다. 시내를 오가던 버스 표지판에도 수유리라고 쓰여 있었고 택시를 타도 수유리로 가자고 했다. 나 또한 지금도 수유리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다.

이 지역을 예전부터 부르던 순우리말 이름이 있었다. '무너미' 혹은 '무네미'. 물이 넘쳐 흐른다는 뜻이다. 아마 북한산 계곡에서 물이 넘치면 마을로 흘러들었던 모양이다. 이를 한자 물 '수(水)'와 넘칠 '유(踰)'로 옮겨 쓴 것이 지명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이 지역에 특이한 지명이 하나 있다. '우이신설선' 경전철 노선인 '화계역'과 '4.19민주묘지역' 사이에 있는 '가오리역' 말이다. 산 근처 내륙 지역에 '가오리'가 웬 말일까. 가오리(加五里)는 물고기가 아니라 이 지역의 옛 이름이었다. 조선 시대에 한성의 범위는 한양 도성과 그 바깥 성저십리까지이지만 성저십리였던 이곳에서부터 오리(五里)를 더하여(加) 우이동까지 경성 지역으로 삼았다는 데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수유동 국민주택단지 항공 사진(1972) 1960대초에 개발된 수유동 국민주택단지를 1972년애 촬영한 항공사진. 빨간 테두리 안이 국민주택단지. 그 주변에 도로와 편의시설을 공유하는 주택가들이 들어섰다. 지금의 수유2동 일대다.
▲ 수유동 국민주택단지 항공 사진(1972) 1960대초에 개발된 수유동 국민주택단지를 1972년애 촬영한 항공사진. 빨간 테두리 안이 국민주택단지. 그 주변에 도로와 편의시설을 공유하는 주택가들이 들어섰다. 지금의 수유2동 일대다.
ⓒ 서울특별시 항공 사진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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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6·25 전쟁 때 도심이 크게 파괴됐는데 지방 사람들까지 몰려들어 주거 지역 확충이 큰 과제였다. 그래서 서울 여러 지역에서 '대한주택공사'가 주도하는 택지 개발 사업이 진행된다. 수유리 일대에도 1960년대에 국민주택단지가 조성됐다.

건축공학자 전남일이 쓴 책 <한국 주거의 공간사>와 건축공학자 전병권과 김형우가 쓴 논문 <서울시 수유동 단독주거지의 확장에 따른 주거지 변화특성 연구>를 보면, 1960년대 초 지금의 수유동에 조성된 '우이동 국민주택단지'는 당시 최대 규모의 택지조성사업이었다고 한다. 그 개발의 흔적이 지금도 수유2동과 수유3동에 남아 있다. 서울 여러 지역에서 벌어진 이러한 택지 개발 사업들 덕분에 사람들은 시 외곽으로 몰려들었다.

인구가 증가하니 행정 수요도 많아졌을 것이다. 수유동이 포함된 성북구의 북쪽 지역이 1973년 도봉구로 분구된다. 인구는 계속 증가해 1995년에 미아동과 수유동 그리고 우이동은 강북구로 또다시 분구된다.

4.19 민주묘지와 아카데미하우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419민주 묘지에서 왼쪽 사진은 1967년 봄쯤 촬영했을 것이다. 당시 추모탑과 조형물은 지금도 변함없다
▲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419민주 묘지에서 왼쪽 사진은 1967년 봄쯤 촬영했을 것이다. 당시 추모탑과 조형물은 지금도 변함없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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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생 시절에 수유리를 회상하면 난 인수봉과 우이천 못지않게 '4.19민주묘지'도 함께 떠올렸었다. 아마 사진첩 때문일 것이다. 카메라가 귀하던 시절이라 어릴 적 사진이 몇 장 없는데 그나마 4.19민주묘지에 가서 찍은 사진이 여럿 남아 있어서다. 집에서 멀지 않아 그랬는지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4.19민주묘지에 가끔 다녔던 모양이었다.

얼마 전 수유동 답사를 4.19민주묘지 참배로 시작했는데 옛 사진 속 추모탑과 조형물은 지금도 그대로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묘소들 앞에서 기도하던 모습도 눈에 선했다.
     
대학 시절 이후에는 '아카데미 하우스'도 수유리와 연관돼 함께 떠오르곤 했다. 4.19민주묘지 입구에서 북한산 방향으로 도로 끝까지 올라가면 나오는 곳이다. 우리 세대에게는 민주화 운동의 산실로 기억되는 곳이기도 하다.

아카데미 하우스는 강원용 목사(1917~2006)가 1966년에 북한산 자락 약 1만 평 규모 부지에 세운 교육과 모임을 위한 시설이다. 이곳에서 진보적인 기독교 신앙 교육뿐 아니라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위한 많은 모임이 이루어졌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어떤 모임이 열렸다면, 그리고 시국 선언을 발표했다면, 모두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관련됐다고 해도 무방했을 정도다. 특히 문익환 목사 등 진보 기독교 단체와 관련된 일들이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많이 열렸다. 나도 '민중신학' 관련 세미나를 수강한 적 있다.

아무튼 나는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를 생각하면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먼저 떠오르는데, 이곳을 매각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지난해에 들었다. 아카데미 하우스가 가진 역사성을 생각하면 아쉬운 결정이다. 하지만 매각은 쉽지 않아 보인다. 아카데미 하우스를 소유한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가 다른 곳에 운영을 맡겼는데, 그곳이 리모델링을 하다 공사비가 밀려 유치권이 설정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하우스 민주화의 산실이었던 아카데미 하우스의 정문은 닫혔고 빨간 유치권 안내장이 붙어 있다.
▲ 아카데미 하우스 민주화의 산실이었던 아카데미 하우스의 정문은 닫혔고 빨간 유치권 안내장이 붙어 있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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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하우스 민주화의 산실이었던 아카데미 하우스의 정문은 닫혔고 빨간 유치권 안내장이 붙어 있다.
▲ 아카데미 하우스 민주화의 산실이었던 아카데미 하우스의 정문은 닫혔고 빨간 유치권 안내장이 붙어 있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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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처구니없는 뉴스를 접했다. 사랑제일교회 담임목사인 전광훈씨가 포함된 단체가 올해 봄 아카데미 하우스 매입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심지어 매각 예상 가격보다 높은 웃돈을 제시했다고. 비교적 진보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측은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민주화 운동의 산실이었던 아카데미 하우스를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정체성 맞지 않는 극우 단체에 팔아넘길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다.

전광훈 측이 만약 아카데미 하우스를 매입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나의 첫 고향 수유리가 극우 진영의 본거지가 될 게 뻔하다. 북한산이 펼쳐지고 우이천이 흐르는, 민주의 성지 4.19민주묘지와 민주화 운동의 산실 아카데미 하우스가 자리한, 수유리를 생각하면 떠오르던 그 아름다운 풍경들이 하마터면 더럽혀질 뻔했다.

난 고향에 대해서는 아름다운 추억만 간직하고픈 욕심이 있다. 그 욕심을 오래도록 지킬 수 있었으면.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강대호 시민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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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있습니다. 40년 넘게 살던 아파트를 떠나 산 아래 옥상집에 사는 경험과 동화 공부를 하는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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