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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교과서에서는 다산을 일컬어 '조선후기의 실학자'로 표기하지만, 실학자란 좁은 틀로 규정하기에 그의 학문과 업적은 너무 높고 넓고 깊고 심오하다. 다산의 저술 작업은 그가 쓴 글에서 "털끝 하나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듯이, 조선 후기 골수에 깊이 병든 국가를 개혁하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의 모든 저술, 나아가서 생애를 관통하는 중심축은 개혁사상과 제도개혁, 즉 "낡은 우리나라를 새롭게 개혁한다"는, '신아지구방(新我之舊邦)'이었다.[편집자말]
 
정약용
 정약용
ⓒ 강진군청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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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 - 글자 풀이대로라면 야트막한 우리네 시골 찻밭이 연상되지만, 여기에 고유명사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붙으면 거대한 학문의 산맥과 도무지 넓이와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큰 바다에 이르게 된다. 그야말로 산숭해심(山崇海深, 산은 높고 바다는 깊음)이다.

다산 정약용 -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개혁사상가, 저술가, 조선의 레오나르드 다빈치, 통합적인 인문학자, 전방위적인 지식경영자, 실천적 이론가, 조선의 엔지니어, 사회비평가, 우리 차 문화의 중흥자, 2500 수의 시를 쓴 시인, 조선최고의 메모광, 건축학자, 동학농민혁명을 촉발시킨 개혁사상가, '민보의(民堡議)'를 제창한 국가안보론, 탈중화의 자주파, 정조의 문체반정에 호응한 문인, 주자학에 맞선 조선실학사상의 비조, 유학과 서학의 창조적 통합자, 서학사상의 개척자, 조선시대 초기의 천주교 신자, 근대를 연 민중주의자….

흔히 교과서에서는 다산을 일컬어 '조선후기의 실학자'로 표기하지만, 실학자란 좁은 틀로 규정하기에 그의 학문과 업적은 너무 높고 넓고 깊고 심오하다.

앞에서 설정한 품평과 더불어 지방행정관의 행동지침을 정리한 『목민심서』를 펴낸 행정가이고, 조선의 형률을 정리한 『흠흠심서』를 엮은 법학자인가 하면,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수원 화성을 설계한 건축가이고, 천연두 치료법을 다룬 『마과회통』을 지은 의학자이기도 하다.

다산의 박람강기는 정치ㆍ경제ㆍ사회ㆍ국방ㆍ법률ㆍ과학ㆍ문학ㆍ철학ㆍ윤리ㆍ역사ㆍ지리ㆍ음악ㆍ예학ㆍ천문 등 각 분야에 이르렀다. 하여 추사 김정희는 다산의 저작물을 살펴 본 후 "선생의 백세대업(百世大業)은 위대하도다!"라고 찬탄하고, 위당 정인보는 "선생 한 사람에 대한 고구(考究)는 곧 조선의 역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 심혼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전 조선 성쇠 존멸에 대한 연구다"라고 정리하였다.

경이원지(敬而遠之)란 말이 있다. 존경하지만 멀리하고 싶은 인물을 말한다. 그럴까, 그래도 될까.

산삼이 귀한 것은 약효는 좋은데 깊은 산중에 있어 채취가 어렵기 때문이다. 옛부터 사람들이 흔한 무우보다 산삼을 귀히 여기는 것은 약효가 많기에 그러하듯이, 다산에 오르기 어렵다고 포기하기엔 그의 산맥과 심해에는 유용한 가치들이 차고 넘친다. 산이 높다고, 바다가 깊다고 포기할텐가.

다산은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불우한 사람이었다. 타고난 천재성에다 금수저를 물고 좋은 가문에서 출생하여 훌륭한 문중의 배필을 만나 초반은 평탄하고 평온했으나, 하늘의 시기였는지,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인지, 곧 불행과 불운이 잇따랐다.

자식 6남 3녀 중 4남 2녀를 일찍 잃고, 후계자감으로 점찍은 조카 장학초(丁學樵)가 17세에 세상을 떴으며, 천주교를 믿는다고 셋째 형 정약종(丁若鍾)은 참수되고, 본인과 둘째 형 정약전(丁若銓)은 멀리 유배되었다.

지기이자 멘토였던 이벽(李蘗)과는 너무 일찍 사별하였다. 기대가 컸던 조카사위 황사영(黃嗣永)은 조선 천주교의 재건을 위해 베이징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썼다가 발각되어 참형되었다. 가히 폐족상태에 이르렀다.
  
다산 정약용이 18년 강진 유배생활 가운데 10년을 거처했던 다산초당. 훗날 다산유적보존회에서 기와집으로 지어놓았다. 초당 앞 넓은 바위가 차 부뚜막인 ‘다조'다.
 다산 정약용이 18년 강진 유배생활 가운데 10년을 거처했던 다산초당. 훗날 다산유적보존회에서 기와집으로 지어놓았다. 초당 앞 넓은 바위가 차 부뚜막인 ‘다조"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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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이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재구속되어 강진으로 유배 결정이 나자 "천 사람을 죽여도 약용을 죽이지 않으면 아무도 죽이지 않는거와 같다"는 반대파의 참소와 모함 속에 18년의 유배 생활을 하지 않으면 생명을 부지하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불행한 생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다산의 다산다움은 추방ㆍ유배와 동시에 정치가ㆍ관리에서 학자로 거듭날 수 있는 불굴의 신념과 다방면에 능력을 갖춘 실력자라는 점이다. 곤장 30대를 맞고 만신창이가 되어 둘째 형과 함께 먼 전라도 산골 오지로 유배될 때, 그야말로 집안이 풍비박산에 폐족의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굴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자기 시대의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를 낱낱이 파헤치고 그 시정책을 제시하는 각종 저술에 착수했다.

다산은 "천하에 가르쳐서는 안 될 두 글자"는 '소일(消日)'이라 일렀다. 두 아들에게 "시간을 소비해선 안 된다"고 가르치고, 본인도 촌분을 아껴 독서하고 책을 지었다. "한자가 생겨난 이후 가장 많은 책"(정인보)을 지은 다산은 무려 500여 권의 책을 남겼다. 요즘 책으로 치면 400쪽짜리 50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유배 후반기에는 제자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모두 자신이 직접 지은 저술이다. 먹을 갈아 한 자 한 자를 붓으로 썼다.

강진 시절의 제자 황상(黃裳)에 따르면 "우리 스승은 귀양지에서 18년 동안 저술에만 힘써 과골(踝骨, 복사뼈)이 세 번이나 구멍났다. 나중에 뼈가 시어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벽에 시렁을 매어 놓고 서서 글을 썼다"고 증언한다.

프랑스혁명 전에 파리에 디드로 등 '백과전서파'가 있었듯이, 조선 후기에 다산은 1인의 '백과전서파'였다. 그래서 누군가는 "다산의 전공이 무엇이었느냐?"라는 애교섞인 질문을 던지기도 하였다.

다산의 저술 작업은 그가 쓴 글에서 "털끝 하나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듯이, 조선 후기 골수에 깊이 병든 국가를 개혁하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의 모든 저술, 나아가서 생애를 관통하는 중심축은 개혁사상과 제도개혁, 즉 "낡은 우리나라를 새롭게 개혁한다"는, '신아지구방(新我之舊邦)'이었다.

하지만 정조 사후 무능한 군주들과 이를 둘러싼 척족, 그리고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한 채 그 알량한 기득권 지키기에만 '소일'한 수구세력의 국정농단으로 나라를 빼앗기는 국치에 이르고 말았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다산, #정약용평전, #정약용 , #다산정약용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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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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