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1 08:28최종 업데이트 20.09.01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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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를 조장한다.'

이따금 동성애자가 직접적으로 등장하거나 혹은 동성애를 은유하는 내용의 드라마나 프로그램이 방송될 때면 늘 등장하는 반발이다. 이를 이유로 성소수자 혐오집단들은 해당 프로그램의 재방송이나 '다시보기' 서비스 중지를 요구하고 방송국을 규탄하곤 한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지금껏 이런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글을 쓰진 않았다. 저 주장의 바탕에 깔린 전제 자체가 이미 혐오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동성애건 무엇이건 특정한 삶의 형태가 조장될 위험이 있다는 말은 그것이 지양되거나 배제되고 지탄받아 마땅하다는 의미가 된다. 비판적인 의미로 쓰인 '조장한다'는 말 앞에 주로 무엇이 있던가. 집단따돌림? 마약? 도박? 간단히 생각해보아도 그리 좋은 것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즉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말에 '그렇지 않다'는 답은 '그런다고 동성애자가 늘어나지는 않는다'는 자칫 혐오자들을 안심시키는 말로 오독될 위험이 있다. 하지만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번 글에서는 보다 명확하게 답을 하고 이야기를 진행하고 싶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미디어에 동성애자가 한 트럭씩 등장한다고 이성애자가 갑자기 동성애자가 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성적지향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명확하게 밝혀진 적도 없지만(그리고 그런 일을 할 필요도 없지만) 미디어와 같은 주변 환경이 개인의 성적지향을 크게 좌우하진 못한다.

이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산증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온통 이성애만 등장하는 미디어와 이성애자인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왔지만 동성애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그토록 이성애를 '조장'했지만 나의 성적지향에는 티끌만 한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 셈이다.

왜 '섹스'를 말하고 교육하면 안 되는가?
 

김병욱 미래통합당이 25일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문제 삼은 책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 <엄마 인권선언>. ⓒ 노란돼지, 시금치, 담푸스

 
다소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얼마 전 황당한 소식을 들어서다. 7월 25일 김병욱 미래통합당 의원은 국회 교육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여성가족부가 성평등 교육을 목적으로 초등학교와 도서관에 배포 중인 '나다움어린이책' 중 일부 도서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엄마 인권 선언> <아빠 인권 선언>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 등이 바로 그 책이다.

김 의원은 엄청나게 문제적인 도서를 발견한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언급된 책들은 모범적인 성교육·성평등 도서로 이름을 알려왔다. 특히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의 경우 이미 1971년에 출간되어 성교육 자료로 널리 사용되어 왔으며, 한국에는 2017년에 출간되었지만 그 전부터도 우수한 성교육 사례로 자주 인용되어 왔다.

그렇다면 이 책들에 과연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일까. 김병욱 의원은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가 성행위를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성관계를 '신나고 멋진 일, 재미있는 일'로 묘사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임신과 출생 전반을 교육하는 책이 바로 그 전 단계인 이성 간의 섹스를 설명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이걸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괜찮아지는 것인가?

그런데 그런 식으로 성(性)과 몸에 대해 정확하게 교육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게 아니라면 왜 굳이 섹스에 관한 내용은 직접적으로 다루어선 안 되는 것일까? 불온해서? 음란해서? 이성 간 섹스와 임신과 출생은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인생에서 겪을지 모를 그들의 몸과 관련된 여러 행위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궁금하다. 도대체 김병욱 의원은 섹스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신나고 멋진 일, 재미있는 일'이라는 묘사 또한 마찬가지다. 많은 이들이 간과하지만 이는 성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다. 섹스가 신나고 재밌다는 말은 반대로 성행위를 하는 사람 중 누구라도 불쾌하거나 고통스럽다면 그건 건강한 관계가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건 성관계를 맺는 스스로와 상대방 모두에게 적용되는 아주 중요한 지식이다. 단순히 성행위를 놀이처럼 묘사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조기 성애화'라는 해괴한 개념

김병욱 의원의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김 의원은 앞서 언급한 발언에 이어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조기 성애화 우려까지 있는 노골적 표현이 있다'는 주장을 이어갔다. 조기 성애화라는 해괴한 개념은 대체 무엇일까. 아이들이 지나치게 빨리 '성애(性愛)'의 감정을 느끼고 성적 행동을 수행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일까.

이에 대해 <경향신문>의 이영경 기자는 성교육이 곧바로 '성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유네스코의 '국제 성교육 가이드'를 인용한 바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분석을 굳이 찾지 않아도 김병욱 의원의 발언은 설득력이 무척 떨어짐을 알 수 있다. 누차 반복하지만 특정 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곧바로 '감정'이나 '욕구'로 연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예로 들자면 나 또한 학교를 다니며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성교육을 매년 받아왔다. 성기가 무엇이고 이성 간의 성행위는 어떻게 이루어지며 적절한 피임 방법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내가 받았던 당시의 성교육은 오직 이성애만을 전제로 한, 이성애 중심적인 교육이었다. 하지만 그런 교육을 받은 내가 곧바로 이성에 대한 성애의 감정이 생기고 이성 간 섹스를 욕망했느냐고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내게 해당 교육 자료들은 '이케아 테이블 조립법'처럼 아주 무미건조하며 알아두면 나쁠 건 없지만 별다른 감흥을 전하지 않는 정보처럼 여겨졌다. 심지어 나와 비슷한 교육을 받았던 동년배 주변인들 중에서는 자신이 성적 끌림이나 관심을 느끼지 않는 '무성애자'임을 알린 이들도 있었다. 세월이 점차 흐르며 성교육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자극적이고 직접적인 이성 간의 성관계 묘사를 보아왔음에도 말이다.

문제는 '성애'를 알아서가 아니라 몰라서 발생한다
 

한국 사회에서 '성'과 관련한 문제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빠르게 '성애'를 알아서가 아니라 너무도 늦게까지 몰라서 발생해 왔다. ⓒ freeimgaes

 
사실 김병욱 의원의 주장과는 다르게 한국 사회에서 '성'과 관련한 문제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빠르게 '성애'를 알아서가 아니라 너무도 늦게까지 몰라서 발생해 왔다. 성적인 끌림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며 세상에는 정말로 다양한 성적 실천이 있음을 몰라서 말이다. 혹은 이러한 지식들이 지나치게 사소하게 여겨져서 문제가 발생했다.

많은 경우 성범죄 가해자들은 성애와 폭력·침해·착취 사이의 차이를 아예 모르거나 알아도 무시해도 그만인 고루한 도덕적 훈계처럼 여겨왔다. 다른 한편에서 피해자들은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 이중의 억압과 고통에 시달려왔다. 성교육 과정 전반에서 배제된 나 같은 성소수자들은 편견과 가짜뉴스들 사이에서 오랜 시간 방황하며 스스로가 비정상적인 존재는 아닌지 의심과 자학을 거듭했다. 성에 대한 올바른 정보와 지식이 빨리 교육될 필요가 있는 이유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김병욱 의원의 주장이 있었던 이후 여성가족부는 '나다움어린이책'의 일부 회수를 결정했다. 김 의원이 문제라고 지적한 바로 그 책들이다. 사업의 공동진행 기관인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아예 사업에서 빠지기로 결정했다. 심지어 재단은 사업 진행 과정에서 책의 내용을 꼼꼼히 살피지 못했으며 추후에는 더욱 철저한 검증과정을 거치겠다는 보도자료까지 배포했다. 책에 문제가 있다고 간접적으로 시인한 꼴이 아닌가. 가뜩이나 정확하고 올바른 성교육이 필요한 시기에 이루어진 엄청난 퇴보다. 정치인이 가짜뉴스와 편견에 휘둘리고, 기관이 소신과 줏대가 없으니 펼쳐진 추한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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