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 롯데엔터테인먼트

 
입사 8년 차 동기인 말단 여직원 '이자영(고아성)', '정유나(이솜)', '심보람(박혜수)'은 반복되는 단순 업무와 회사의 차별 대우에 나날이 지쳐간다. 그래서 토익 600점 이상을 받으면 대리로 승진시켜주겠다는 공고를 보고 희망에 부푼 그들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최선을 다해 영어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잔심부름을 하러 간 공장에서 자영은 검은 폐수가 유출되는 것을 목격하고, 주변 마을 주민들이 큰 피해를 보고 있음을 확인한다. 회사의 안일한 대처에 괴로워하던 자영은 대리 승진이라는 꿈과 해고의 위험 사이에서 유나, 보람과 함께 회사가 무엇을 감추고자 하는지, 결정적 증거를 찾으려 한다. 

예술 작품에서 제목은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제목은 작품에 대한 흥미를 돋우기도 하며, 작품의 소재나 주제,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함축하고 전달하는 기능도 맡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만족스러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영화다. 흔치 않은 제목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고, 제목에 충실한 초반부 전개는 다수의 관객에게 재미를 줄 수 있다. 반면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너무 많았던 나머지 뒤늦게 제목으로 되돌아 온 결말은 이야기를 온전히 끝맺지 못한 여운을 남긴다.

세 주인공이 토익 공부를 시작하는 계기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 롯데엔터테인먼트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시작은 제목에 충실하다. 영화는 세 주인공이 토익 점수 600점 이상을 받으면 대리로 승진시켜준다는 회사의 공고에 주목하고 토익 공부를 시작하는 계기를 두 가지 측면으로 풀어내며 많은 관객들을 이야기에 끌어들인다.

하나는 여성들이 겪는 차별이다. 주인공을 비롯해 작중 많은 삼진그룹 여직원은  커피 타 오기, 햄버거 주문 및 배달받기, 청소 등 단순한 반복 업무를 도맡으며, 임신과 출산을 이유로 승진과 퇴사 문제에 있어 불이익을 당한다. 이때 영화는 복장, 음악, 직장 생활을 묘사함에 있어서 90년대라는 시대상을 적절하게 환기시키면서 자칫 젠더 갈등으로 흐를 여지를 주지 않는다. 또한 직장 내 여성에 대한 차별 대우가 2020년 현재에도 완전히 뿌리 뽑혔다고 말하는 힘든 상황인 만큼 영화는 관객들을 손쉽게 포섭한다.

다른 하나는 공정성의 문제다. 영화는 주인공이 실무 분야에서 다른 대졸 회사원이나 상사보다 실행력이 좋고 아이디어가 뛰어나다는 점을 꼼꼼히 보여준다. 자영은 부서 업무의 디테일을 총괄하며 그녀가 없이는 업무가 진행이 안 된다. 유나는 마케팅부 회의에서 가장 효과적인 기획안을 생각해내며, 단숨에 회계 작업을 끝낸 보람은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 덕분에 단지 고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 이들의 답답함과 설움은 영화 안에서 큰 설득력을 얻는다. 이에 더해 능력 중심의 공정한 경쟁의 필요성이라는 주제의식은 현재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지점인만큼, 다수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제목을 충실히 설명하는 시작은 영리하고도 효과적이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결말 또한 제목에 충실하다. 그러나 이처럼 제목에 딱 들어맞는 결말은 초반부와 달리 어딘가 불편하고 인위적인 느낌을 남긴다.

비교적 밝고 유쾌한 톤으로 세 주인공이 어떤 차별 대우를 겪는지에 대한 코미디를 보여주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자영이 공장에서 폐수 유출을 확인하는 장면을 기점 삼아 급격하게 장르를 사회고발 영화로 전환한다. 이후 영화는 세 주인공이 회사 내 갑질, 내부 고발자, 배타적 기업 문화, 언론과 대기업 간의 유착, 그리고 외국계 자본과 국내 기업 간의 경영권 다툼에 이르는 한국 사회의 각종 병폐를 빠짐없이 목격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다룬다.

사실 이처럼 회사의 중심 업무에서 배제된 주인공이 여러 기밀사항을 모두 파악하고 폭로한다는 전개는 현실적이지 않고, 그 자체로 개연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모든 문제를 주인공이 해결하고, 그들도 승진하는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된다. 

따라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라는 제목은 현실에서 시작해 판타지로 끝난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와 2020년대를 공통으로 관통하는 현실의 문제를 묘사하다가 그 문제가 모두 말끔히 해결된 판타지로 끝나는 것이다. 다만 영화의 결말처럼 그 끝이 판타지로 남기에는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가 현실과 상당히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남는다.

이러한 단점을 무마하기 위해서 영화는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 대신 코미디의 문법으로 사회 이슈를 풀어낸다. 모든 문제의 근원에 평면적인 악역을 두고 권선징악의 구도 안에서 우연에 기대며 개연성과 현실성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전개를 보여준다.

하지만 바로 이 대목에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실수를 범한다. 사회고발 영화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현실성을 놓치기 때문이다. 평범한 개인들이 힘을 모아 싸우고 깊이 좌절도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적 폭력을 비판할 때 사회고발 영화는 깊은 울림을 준다. 따라서 현실의 어려움을 간략히 묘사하면서 각종 사회 현안을 그저 배경으로만 놔둔 결과, 영화는 코미디와 사회고발 영화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그래서 급히 코미디로 되돌아온 영화의 결말과 제목이 아쉬운 것이다.

<다크 워터스>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

비슷한 소재를 다룬 다른 영화와 비교하면 문제는 더 분명하다. 지난 3월에 개봉했던 마크 러팔로, 앤 해서웨이 주연 <다크 워터스>는 폐수로 인한 환경오염 이슈를 다룬다. 영화의 내용과 방향성은 비슷하다. 화학 회사 '듀폰'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사건을 축소하고 감춰왔는지, 지역 사회와의 정치권과는 어떻게 합의를 봤는지를 고발한다. 또한 문제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연구원의 비윤리성과 언론의 자기 보호적 행태를 본인도 모르게 피해를 보는 피해자와 대비시킨다. 

그러나 <다크 워터스>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과 그 끝은 정반대에 위치한다. 피해자가 제기한 소송이 끝을 모르고 이루어진다는 점, 그 소송에서 본래 회사 측 변호사였던 주인공이 피해자를 변호하는 결말은 현실적인 시각으로 현실을 비추는 마무리를 보여주며 사회 고발 영화가 기대받는 무게감을 남긴다. 또한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사안에 대한 문제의식을 환기하려는 의도도 적절히 묶어낸다.
 
물론 영화가 판타지로 끝나는 것,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현실을 대신해 짜릿한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점, 배우들의 매력과 안정적으로 맞물려 들어간 캐릭터의 재미 덕분에 극의 진행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상업영화로서 충분히 몫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충분히 장르의 특징도 살리면서 의도한 메시지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안정적이고 상업적인 판타지의 결말로 달려 나간 선택은 끝내 아쉽다. 기왕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크레디트로 시작할 거였다면, 사건의 현실성과 무게감을 충분히 살렸을 때 수박 겉핥기 같은 인상을 피하고 더욱 개성 있는 작품으로 남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0)에 게재한 글입니다
영화리뷰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코미디 사회고발 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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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읽는 하루, KinoDAY의 공간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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