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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국회의사당 건물 밖에서 낙태 합법화 지지 시위대가 상원이 임신 14주 이내에 낙태를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는 소식에 환호하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AP=연합뉴스)
 30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국회의사당 건물 밖에서 낙태 합법화 지지 시위대가 상원이 임신 14주 이내에 낙태를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는 소식에 환호하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AP=연합뉴스)
ⓒ 연합뉴스,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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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시각 12월 30일, 아르헨티나 상원은 일부 가톨릭계 반발에도 불구하고 임신 1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는 "안전한 낙태법"을 찬성 38표, 반대 29표, 기권 1표로 통과시켰다. 낙태 합법화는 현 대통령인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공약 중 하나였다. 

남미 위성통신 텔레수르에 따르면,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에 "안전하고 합법적이며 자유로운 낙태는 이제 합법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성의 권리를 확대하고 공중 보건을 보장하는 더 나은 사회가 되었습니다"라고 썼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공식 홈페이지)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공식 홈페이지)
ⓒ 공식 홈페이지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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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적 시술로 매년 사망하는 여성들 

아르헨티나에서는 여성계뿐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음성적인 불법 낙태 시술로 인하여 많은 여성이 죽거나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는 경우가 많아, 낙태 시술을 양성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나왔다(텔레수르 기사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보건부는 2016년~2018년 총 65명 이상의 여성이 불법 낙태 관련 합병증으로 사망했다고 알렸다-편집자 주). 그러나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아 그동안 통과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진행된 낙태 합법화 시도는 이번까지 합치면 8번째였다. 8번째 시도 끝에 낙태 합법화가 이뤄진 것이다. 물론 의료진이 종교적 신념으로 낙태 시술을 거부할 수 있는 조항은 남겨두었다. 이는 일부 가톨릭계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남겨 놓은 것으로 해석된다.

이번 낙태 합법화는 아르헨티나에 역사적, 정치적 의미가 매우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의미를 알려면 아르헨티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르헨티나 여성 해방의 역사: 에바 페론 vs 가톨릭, 군부

사실 아르헨티나는 1955년에 낙태가 이미 합법화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돼 있었다. 이는 아르헨티나뿐 아니라 세계사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인물 중 한 명인 에바 페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51년 연설하고 있는 에바 페론. 일부 보수우익에게 포퓰리스트 악마라고 매도당하지만, 그는 아르헨티나 여성 인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1951년 연설하고 있는 에바 페론. 일부 보수우익에게 포퓰리스트 악마라고 매도당하지만, 그는 아르헨티나 여성 인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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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졌다시피, 에바 페론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도망친 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상경하여 연예인으로 성공한 뒤 1945년 당시 노동부 장관이었던 후안 페론과 결혼하였고, 1946년 후안 페론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영부인으로서 빈곤 퇴치와 여성 해방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였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여성들에게 가혹한 사회였다. 에바 페론이 공개석상에서 바지를 입고 나온 것을 가지고 보수주의자들이 비난할 정도였다. 여성들의 사회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다. 거기다 페론 부부가 집권하기 이전에는 아르헨티나 여성에게 선거권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는 1947년에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한다. 이후에도 에바 페론은 에바 페론 재단을 통해 빈민 구호와 여성 해방 사업을 추진하였다. 에비타가 죽은 이후 그의 뜻을 계승하여 1955년 이혼이 합법화되었다.

그러나 이혼 합법화는 가톨릭계의 반발을 불렀다. 가톨릭은 에바 페론이 살아있을 때도 그녀와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경제까지 좋지 않아 군부와의 갈등까지 겹쳐 1955년 쿠데타로서 후안 페론은 망명을 떠났다.

이후 아르헨티나에서는 민주화될 때까지 여성과 관련된 진보적 정책이 멈추게 되었다.

가톨릭 보수주의·군부 독재 청산하는 과정으로서의 낙태 합법화

80년대 후반 민주화 이후, 이혼 합법화가 부활하는 등 진보적인 여성 정책이 다시 추진되기 시작했다. 군부 독재의 적폐를 철폐해나가는 과정에서 여성 정책이 부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시 시작된 이 흐름을 가로막은 것은 가톨릭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가톨릭계 보수 인사들은 2010년 7월 동성 결혼 합법화 당시에도 이를 반대하는 가장 큰 저항 세력이었고, 이번 낙태 합법화에도 가장 큰 반대 세력 중 하나였다. 에바 페론이 살던 그 시기의 구도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아르헨티나 보수 우익들 또한 가톨릭과 함께 낙태 합법화를 반대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보수우익들은 한국의 일부 수구 세력처럼 군부독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거나, 민주화 운동 중간에 변절한 세력들이다.

아르헨티나의 낙태 합법화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즉 단순히 여성의 권리를 진흥하는 정책을 넘어, 이는 여성들 권리를 억압해온 가톨릭 보수주의와 군부독재 잔재를 청산해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한국 또한 1987년 민주화 이후, 군부독재의 잔재들을 모두 청산하지는 못했다. 아르헨티나 여성들, 이를 지지하는 국민들의 투쟁이 한국 사회에도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르헨티나 여성들이 적폐 세력들을 몰아내고 여성이 해방된 사회를 만드는 과정을 한국 시민사회에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관련 기사]
낙태죄 폐지, 여성노동자의 재생산권을 위한 첫걸음 http://omn.kr/1qwoo
2021년 1월 1일 0시 낙태죄 사망, 권인숙 "큰 기회가 왔다" http://omn.kr/1r3qb

태그:#아르헨티나, #여성인권, #낙태, #낙태 합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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