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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를 마치고 사무실 근처로 산책을 나섰다. 청룡 예전로 99번안길이라 적힌 도로명 간판을 따라 내려 가다보면 편백나무가 울창한 숲길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곳을 지나 계곡물이 흐르는 커다란 아치형 다리를 건너면 부산의 대표 사찰인 범어사로 향하는 108계단이 등장한다.

나는 매일 같이 그 길을 오르내린다. 훌라우프를 열심히 돌리는 아주머니, 벤치에 앉아 챙겨 온 과일을 드시는 할아버지, 좁은 계단 모퉁이를 좌판 삼아 야채를 파는 할머니, 두 손을 꼭 붙잡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중년의 부부까지, 낮 12시 즈음 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들을 마주한다.

하루는 산책을 마치고 돌아가는데 숲속 길 군데군데 놓인 플라스틱 그릇들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수북이 쌓인 사료알갱이, 먹다 만 흔적, 물 등이 그릇에 담겨져 있었다. 누군가 만들어 준 길냥이 급식소.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들이었다.
 
고양이(자료사진)
 고양이(자료사진)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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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옹~" 마침 '길냥이'(길고양이) 무리들이 살금살금 숲 속에서 걸어 나왔다. 특별히 사람을 경계하진 않았다. 나는 서둘러 자리를 비켜주었다. 슬쩍 뒤돌아 보니 몸을 잔뜩 웅크린 길냥이들이 허겁지겁 밥을 먹으며 배를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도 그릇에 담긴 사료들은 항상 채워져 있었다. 그 뒤엔 춥고 외로운 길냥이들이 무사히 겨울나기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숨은 이웃들의 관심과 온정의 손길이 있었다.

가끔 눈에 익은 녀석들은 108계단 사이에서 도도한 자태를 뽐내며 오고가는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나는 그들에게 '범어사 원정대'라는 거창한 별명을 붙여주었다.

변덕스런 날씨 속에 최근 본격적인 한파가 찾아왔다. 며칠째 고양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이곳을 오고가며 주린 배를 채우는지 간혹 비어있는 그릇들이 눈에 띈다.

품 속에서 작은 통 하나를 꺼냈다. 먹기 좋게 자른 사과를 빈 그릇에 골고루 담아주었다. 작지만 따뜻한 릴레이에 동참하고 싶었다.

'범어사 원정대 친구들. 계곡물이 풀리고, 푸른 새싹이 돋는 봄이 오면, 여기 108계단에서 꼭 다시 보자.'

태그:#길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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