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첫 책을 내고 북토크 자리에서 그리고 강연장에서, 독자로부터 생각지 못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혹시 작가님, 페미니스트세요?"

처음 그 질문을 들었을 때는 당황스러운 나머지 추상적인 답을 한 기억이다.

"저는 모든 인간의 권리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여성의 인권에만 집중하지는 않아요."

다시 말해,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의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강연장에서 두 번째로 페미니스트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는 내 책의 어느 구석에 페미니즘이 드러난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다.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는 거였다. 내 첫 번째 책은 결혼생활을 통해 쌓인 경험을 풀어놓으며 결혼 전후로 달라진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에세이였다. 굳이 페미니즘이 드러났다면 시가에서 며느리만 콕 집어 불러다 일을 시키는 잘못된 문화라든가, 시가에만 존댓말을 쓰는 호칭문화를 꼬집은 내용일 거라 짐작될 정도였다.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 두 번째 질문에도 비슷한 답을 했다.

"여성의 인권에만 집중하지 않아서 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말할 수는 없겠네요. 다만 권리를 존중받지 못하는 계층이 여성이고 제가 그 이야기를 쓴다면 페미니스트의 일부라 할 수는 있지요."

두루뭉술한 대답을 해놓고 우습게도 나는 현명했다고 자부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페미니스트는 나 정도의 글로, 나라는 인간이 하는 말 정도로 붙일 수 없는 이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는 명확하게 자신만의 주장과 이념으로 성차별에 반대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 사람은 단체를 조직하고 캠페인을 실행하고 자신만의 이념을 단단히 세워낸 사상가라고 생각했다. 아주 특별하고 공고히 기반을 잡은 자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거대한 오판이었다. 페미니스트가 그렇게 특정인만 될 수 있다면, 잘 알려진 사회운동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성차별이 해결되는 데 억겁의 세월이 소요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나는 어쩌자고 페미니스트에 자격을 부여하려 든 걸까? 이른바 '대단한 사람'만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한 나의 오판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정작 잃어버린 권리를 찾고 차별을 깨야 하는 여성은 바로 나인데 말이다.
   
나는 앞으로 페미니스트입니다
 나는 앞으로 페미니스트입니다
ⓒ envatoelements

관련사진보기

   
과거 내가 생각한 페미니스트의 자격(?)이란 걸 생각해보자면 1) 페미니즘 운동 경력이 많은 사람 2)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활동하는 여성 운동가 정도였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도대체 페미니스트가 되는 데 경력이나 유명세가 왜 필요하며, 윤리적 기준은 누가 세워줄 것인가. 아무리 관대하게 보려 해도 과거의 우매한 자신이 부끄러워 상종하기 싫어질 지경이다. 과거 엉성하게 세워둔 내면의 페미니스트 기준은 선거철이면 잡스러운 명분을 갖다 붙이며 공천을 받으려던 예비 정치인과 다를 바 없다.

또 페미니스트라고 자신을 소개하기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는 페미니즘에 막연한 거리감을 느낀 이유도 있다. 본래 익숙한 것에 새로운 것을 수혈하려면 거부감이 심한 법이다.

내 주변에서도 그랬다. 과거 회사에 다닐 때 동일 직무, 직급에서 여성의 임금이 낮은 걸 문제 삼으면 남자는 가장이라느니, 여자가 이런 걸 따지기 시작하면 피곤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시가에서 남자들은 거실에 앉아 정치 이야기를 하려 들고, 여자들은 주방에서 일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반드시 일해야 한다면 남편과 함께하겠다는 내 의견에 호통을 들어야 했다. 지금껏 먼저 나서서 주방일을 도맡아온 여자 어른들 눈에도 나는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도 분명 고생스러운 시절을 보낸 게 분명한데도 내 의견은 건방지고 이질적었으리라.

그래서 '원래'라는 명사를 문장 앞에 붙이고 지금껏 익숙했던 문화에 돌을 던지는 나를 야단쳤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문화를 고수하고픈 이들에게 나는 피로유발자이자 프로불만러였다.

하물며 어른들만 그랬을까? 또래와의 모임에서도 페미니즘을 불편해하는 시각은 만연했다. 언젠가 작은 모임에서 "요즘 페미니즘은 변질된 것 같아서 좀 불편해요"라는 말을 들었다. 다들 그 말에 동조하기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그 순간은 내내 마음속에 걸려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자리에서 페미니즘이 본래의 의미에서 변질되고, 공격적인 화풀이로 논의되는 바람에 나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순한 사람이라는 이미지에 편승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진정 하고 싶었던 한 마디는 이런 거였다.

"그럼 변질되지 않은 진짜 페미니즘은 도대체 어떤 건가요?"

이후로 글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글 속에 뚝뚝 묻어나던 매서움은 자각하지 못한 채 내 안에 쌓여가던 구박덩이 페미니즘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끔 날카롭게 쏟아져나오는 글자 속에는 알게 모르게 다수로부터 미움받는 페미니즘이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페미니즘을 말하고 싶으면서도 앞서 말한 것처럼 페미니스트의 자격에 함량 미달이라고 느끼고, 페미니즘을 향한 거부감에 주변만 빙빙 맴돌고 있다는 깨달음은 이다혜 작가의 <출근길의 주문>에서 읽으며 찾아왔다.
 
"페미니스트가 되면 무엇이 좋으냐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언제나, 전에는 그냥 넘기던 것들 하나하나가 걸려서 화가 나 오히려 참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왜 여성으로서의 나 자신을 자각하고 세상의 여성에 대한 차별에 눈떠야 하냐고? 그것은 도무지 진단명이 나오지 않던, 수많은 여성들의 승진 누락, 조기퇴직, 낮은 임금, 쉬운 해고 등의 문제들에 대한 답이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내 안의 페미니즘을 인정하고 나면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니다. 어른들이 습관처럼 하는 성차별 발언에 웃으며 동조할 수가 없다. 만연한 성차별을 인지하면서도 '좋은 게 좋은 것'을 주장하는 대화에서 유순하게 앉아있을 수가 없다. "나는 페미니즘 불편하니까 그런 얘긴 하기 싫어"라며 대화를 피하는 가족 구성원을 설득하느라 목이 아프다. 여자랑 엮이면 불편하다며 당당하게 펜스룰을 시도하는 남성에게 예의를 갖춰 응대하느라 골치를 썩인다.

그렇다면 이런 불편함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과거의 우매한 나로 돌아가야 할까? 페미니스트로 사는 건 불편하고 피곤하니 누군가 대신 차별을 해결해주길 기다리며 사는 게 좋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페미니스트의 적정인물은 별도로 정해지지 않는다. 고민해도 결론은 하나다.

'나 아니면 누가 할 건데?'

여성을 향한 차별을 없애는 데 여성이 아니면 누가 해야 할까? 나는 여성이고, 살면서 마주하는 차별들을 해결해야 한다면 그 주체는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나여야 한다. 만약 성차별을 누군가 대신 해결해주길 기대한다면 그건 누구일까. 정치인? 사회운동가? 연예인? 언론인? 아니면 인플루언서? 누구를 대입하든 말이 안 된다. 성차별 철폐를 누구한테 떠넘기는 자체가 모순이다. 결론은 '나'다.

결국 이렇게 돌고 돌아 나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인정하게 됐다. 페미니스트라고 특별한 자격이나 경력이 필요한 건 아니다. 성차별을 해결하고 성평등을 이룩하기 위해 대화하고 생각하고 행동이 필요할 경우 참여하는 것. 여기서 무엇이 더 필요할까?

지난 연말부터 매체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땐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써주세요"라는 간결한 요청이 전부였다. 요청을 수락하고 하얀 화면에 글자를 적어 내려가면서 나는 그동안 성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나 하고 싶었음을 알아버렸다. 쓰고 또 써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러니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나는 앞으로 페미니스트입니다.
내 삶을 위해 페미니스트로 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태그:#페미니즘, #페미니스트, #여성, #차별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