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두 손을 놓쳐서
난 길을 잃었죠
허나 멈출 수가 없어요
이게 내 사랑인걸요

내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그대 없이 나 홀로 하려 한다고
나의 이런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나를 설득하려 말아요


영화 <세자매>의 엔딩곡을 듣고 또 들었다. 주인공인 세 자매가 바다를 거닐던 그 장면을 적시던 이소라의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였다. 마침 이 명곡을 1시간 내내 재생하는 유튜브 영상을 발견했다.
 
 영화 <세자매> 한 장면.

영화 <세자매> 한 장면. ⓒ 리틀빅픽처스

 
어느 관객과의 대화에서, <세자매>의 둘째 미연을 연기한 문소리는 "여자 주인공이 세 명이 아니라 네 명이란 생각이 드는데, 마지막 한 명이 이소라씨인 것 같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세자매>의 엔딩을 떠올리며,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이소라의 목소리를 듣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길을 걸으려 한다"고, "정상이 없는 산을 오르려 한다"고, 그런다고 "괜한 헛수고라 생각하진 말아요"라고 이소라는 나지막이 그러나 절절하게 호소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내 마음이 헛된 희망이라고는 말하지 말아요"라고, "나의 무모함을 비웃지는 말아요"라고 당부하며, 그게 '내 사랑'이라고 읊조리고 있었다.

어쩌면 영화 속 세 자매의 관계가 그런 '내 사랑'과 닮아 있을지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제는 관계를 끊을 만한데도, 상대방을 멀리하고 버릴 만한데도 멈출 수가 없는 관계. 나 스스로는 막막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가고 있지만, 비웃음을 받거나 설득을 당하고 싶지는 않은 그런 사이.

함께 하는 시간은 비록 적더라도 헛된 희망 같은 '내 사랑'은 꼭 알아줬으면 하는 모순되면서도 그 마음만은 또 이해가 가는 기묘한 거리.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드는 내내 이 곡을 들었다던 이승원 감독의 <세 자매>는 자매라는 이름으로 묶인 세 여성의 관계와 일상을 통해 '사람'을, '가족'의 이면을 파헤치고 있었다. 적당히 섬세하고 날카롭게, 그렇지만 안도할 수 있을 만한 여유와 공감할 만한 장면과 감정을 제시하면서.

'가식왕' 미연은 왜?

중심은 둘째 미연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자 성가대 지휘자인 이 가정주부는 어쩌면 이 시대 중산층의 흔들리는 멘탈을 송곳처럼 짚어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 미연은 젊고 어린 교회 후배와 바람을 피우는 대학교수 남편에게 나지막한 그러나 묵직한 경고를 날릴 줄 알지만, 돌아서선 베개에 얼굴을 묻고선 고함을 지를 여유도 허락되지 않는 40대 두 아이의 엄마다.

지금껏 쌓아온 걸 잃을 수도, 잃을 생각도 없는 '가식왕' 미연은 복수에도 주저가 없다. 미연이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남편의 '불륜녀'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하고는 교회 사람들 앞에서 주님께 기도하겠다며 위로하는 장면이야말로 인간의 이중성을 감추지 않는 <세자매>의 매력이, 미연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명장면이라 할 만 하다.

'자기애'에 충만한 미연의 아픈 손가락이 동생 미옥(장윤주)과 언니 희숙(김선영)일 것이다. 허구한 날 낮술에, 밤술에 기억도 못할 말들을 전화로 쏟아내는 극작가 미옥은 그나마 나은 경우다.

미연은 교회 사람들 앞에 내놓기 창피할 만큼 튀는 외모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미옥을 할 수 있는 한 걱정하고 챙겨준다. 창작의 고통과 뜻 모를 자괴감에 괴로워하는 알코올의존증 동생의 '네버 엔딩' 취중 통화를 받아주는 미옥은 의외로 인자한 언니의 모습으로 비친다. 

반면 끊임없이 "내가 미안하다"를 연발하는 언니 희숙과는 어쩐 일인지 왕래를 하지 않고 연락도 거의 하지 않는 상태다. '궁상과 박복은 나의 것'과 같은 일상에 찌든 꽃집주인 희숙은 딸에게도 절절매고, 남편이 안겨준 빚에도 절절맨다. 희숙 역시 별달리 잘못한 것 없는데도 일상과 삶에 찌든 채 왠지 누군가에게 죄를 진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네 현대인의 반영이다.

<세자매>는 이 세 인물의 일상을 끊임없이 교차하고 또 교차시킨다. 감정을 이입을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계속해서 장면을 분절시킨다. 그렇다고 딱히 세 자매의 일상을 촘촘히 연결시킬 생각도 없다. 개별의 장면은 세밀하게 또 긴 호흡으로 지켜보되 그 분절시킨 일상이 서서히 캐릭터의 전체를 조망하게 만든다. 형식 자체가 인물들에게 밀착하고 싶어도 밀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뤄진 셈이다.

세형제도, 세남매도 아닌 세자매

 
 영화 <세자매> 관련 이미지.

영화 <세자매> 관련 이미지. ⓒ 리틀빅픽쳐스

 
이런 형식은 일종의 '가족 드라마'인 <세자매>가 쉬이 택할 수 있는 어떤 연민을 소거하는데 일조한다. 바람난 남편에게 뺨을 맞는 미연은 일종의 피해자다. 그 미연은 교회 후배의 얼굴에 시퍼런 멍이 생길 정도의 물리적 폭력을 가한다. 이승원 감독은 그런 미연의 맨얼굴을 고스란히 바라보라고 주문한다.

감독이 인물을,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그런 식이다. 휴대폰에 새엄마인 자신의 이름을 '돌아이'라고 저장한 아들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단 미옥. 어느 날 남편의 전부인과 술이 덜깨 우스꽝스러운 광경으로 조우한 후, 돌변한다. 남편이 아들의 뺨을 때리는 것을 발견하곤 '정의의 사도'로 변신, 남편에게 바로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둘러댄다. 그날 이후, 미옥은 '가족'이란 것에 좀 더 관심을 갖는다.

셋 중 가장 안쓰러운 이는 첫째인데, 자신이 암에 걸린 사실조차 딸에게 고백하지 못하고 전전 긍긍하는 인물이 바로 희숙이다. 심지어 그 낮은 자존감과 지독한 고립감은 부지불식간에 희숙을 예상치 못한 자해로 이끌기도 한다.

각기 다른 방식의 폭력에 인물들을 노출시키는 <세자매>는 이 모두를 연민 없이 바라보라고, 냉정하게 지켜봐도 된다고 독려한다. 그런 연민의 배제가 가져다주는 효과는 <세자매>의 주인공들과 엇비슷한 연배의 세 형제를 내세운 드라마 <나의 아저씨>와 비교하면 확실해진다. 그렇다. <세자매>는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온갖 폭력에 노출되고 또 그 폭력에 익숙해질지 모르는 '한국 여성'들이다.

종국엔 <세자매>는 그 폭력의 연원을 까발리는 결말로 나아간다. 영화의 시작, 아득한 검은 밤을 달리는 두 여자 아이의 종착지가 어디였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왜 세 자매의 부모와 남동생은 이들의 대화 속에서만 등장했는지, 왜 희숙은 동생들과 이름이 닮지 않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날선 표현이나 한국사회 혹은 현대인의 이면을 극대화시킨 이승원 감독의 전작 <비밀과 거짓말>이나 <해피뻐스데이>을 떠올리는 이들에겐 다소 의외로 다가올 수도 있으리라. 그간 쌓아올린 세 자매의 관계와 감정을 터트리고 폭발시키는 클라이막스의 표현이나 수위의 세기가 말이다.

하지만, 앞서 "나를 설득하려 말아요"라는 이소라의 목소리가 극장 안에 울려 퍼지고, 또 그에 앞서 어린 시절 이후 처음으로 세 자매가 바닷가 앞에서 사진을 찍는 장면이 스크린에 영사되는 순간, <세자매>는 그런 감독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시켜 준다. 그 세 자매의 얼굴에서, 세 배우의 얼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내 사랑'을 서로에게 전하며 오늘을 살아내는 이들의 어떤 고단한 희망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연기의 끝

"연기의 끝을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이 감독이 세 번째 장편영화인 <세자매>를 만들면서 한 다짐이라고 한다. 배우들 간 연기의 불꽃이 튀는 그런 밀도 높은 영화 말이다. 문소리를 위시한 세 여성 배우의 연기만으로도 <세자매>는 눈길이 가는, 두 시간이 절대 아깝지 않은 영화다.

특히 문소리의 경우는 말 그대로 문소리가 그간 증명했던 너른 연기 폭과 리얼리즘의 끝을 확인시켜 준다. 우리 옆의 바로 그 크리스천의 얼굴을 한, 그러나 동생과 누나 앞에선 예의 그 경계를 살짝 풀던 미연이 끝끝내 감정을 폭발시키다 절제하는 장면을 보라.

<세자매> 속 미연을 연기하며 문소리는 자신이 연출한 <여배우는 오늘도>를 포함해 우리가 신뢰해 온 '배우 문소리'의 총합을 보여주는 동시에 누군가는 쉬이 예단했을 그 문소리의 이미지나 연기 톤을 또 한 번 뛰어넘는다. 위선과 불안, 확신을 오가며 나와 가족을 챙기고 다독이는 문소리의 미연에게서 나도 몰랐던 내 얼굴을, 현대인의 초상을 발견하는 이가 적지 않았으리라.

이승원 감독의 뮤즈인 김선영은 시종일관 친숙한 듯 낯선 얼굴을 거두지 못하는 희숙의 감정에 숨결을 불어넣고, 장윤주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술가 엄마' 미옥을 그럴싸하게 연기하며 다음 장면을 예상하기 힘든 <세자매>를 상징하는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그리하여 이 세 배우는 이승원 감독과 함께 왜 <세자매>가 '삼형제'나 '삼남매'가 아니라 '세자매'여야 했는지를 스스로 증명해냈다. 

<세자매>가 코로나19 시대의 극장가가 아닌 좀 더 너른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시기와 환경에서 상영됐다면 하는 안타까움을 공유하는 이들이라면, 영화 관람 이후 이소라의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를 찾아 들은 관객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문소리와 두 배우로 인해 <세자매>가 흔한 가족영화의 범주를 훌쩍 뛰어넘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세자매 문소리 이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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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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