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온라인으로 진행된 영화 <미나리> 관련 기자 간담회. 리 아이작 정 감독과 스티븐 연은 미국 LA 현지에서 배우 윤여정, 한예리는 부산 해운대 영화의 전당에 각각 자리했다.

영화 <미나리> 관련 기자 간담회의 윤여정. ⓒ 부산국제영화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미나리> 공식 기자회견. 윤여정이 화상을 통해 리 아이작 정(정이상) 감독과 주연배우 스티븐 연, 한예리와 인터뷰에 나섰다. 당시 윤여정은 아이작 정(정이상) 감독에게 "너무 믿음이 갔어요"라며 이런 일화를 털어놨다.

<미나리>에서 윤여정이 맡은 순자 역할은 사실 정 감독의 실제 할머니를 모델로 했다고. 부담감을 느끼던 윤여정에게 정 감독은 "선생님 마음대로 하시라"며 연기의 영역을 넓혀줬고, 그를 통해 윤여정은 순자를 연기하며 어떤 자유로움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꼈다는 설명이었다. 윤여정은 "아이작이 또 나를 이렇게 북돋아줘서 우리는 잘했던 것 같아"라면서 한편으로 연기자로서의 '필생의 목적'을 털어 놓기도 했다.

"나는 언제든지 내가 무슨 역할을 할 때 그거는 저의 미션이에요. 전형적인 할머니,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전형적인 엄마, 나 그런 거 하기 싫어요. 내가 조금 이렇게… 다르게 하고 싶어요. 그거는 나의, 내 필생의 목적이에요. 전형적인 것, 나 그렇게 안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전형성의 탈피, 남들과 다르게 연기하고 그걸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 욕구. 이를 위해 필생을 노력해야 하는 배우의 숙명. 윤여정의 이러한 속내는 특별하면서도 어떤 보편적인 감정을 일깨워줬다.

벌써 우리나이로 칠십 넷이 된 이 명배우에게도 연기자로서의 욕망은 여전히 꿈틀거리며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는가. 이를 위해 윤여정과 같이 '선택 받는 운명'을 안고 살아가는 배우들이 기울여야 하는 부단한 노력은 일상적인 것이겠고.

거장 <화녀> <충녀> 속 '김기영의 뮤즈'로 출발, '세시봉' 시대의 연인이었으며, 이를 모두 버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와 연기를 다시 시작했다는 윤여정. 김수현‧노희경 작가의 작품에 어울릴 것 같은 그에게 <전원일기>의 단역을 마다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윤여정은 '전형적인 엄마', '전형적인 할머니'를 탈피하는 필모그래피를 부단히 쌓아왔고, 미국 21개 각종 영화상의 여우조연상을 휩쓴 <미나리> 속 '한국 할머니' 순자는 그러한 노력의 결정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돌아봤다. 윤여정이 수행해온 미션의 기록들을. "나 그런 거 하기 싫어"라며 피하고 피해서 만난 엄마와 할머니가 과연 어떤 결을 내고 어떤 향취를 내뿜고 있었는지를.

박정희 세대 꾸짖는 '쿨한 엄마', 남 달랐던 '고복수 엄마'

"복수야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드라마 <네멋대로 해라>(2002) 속 고복수(양동근)의 '정유순 여사'는 쉽게 말해 아들을 버린 엄마다. 평소엔 유순하지만 술만 마시면 폭력을 일삼는 남편 고중섭(신구)에게 도망치면서 어린 복수를 버렸다. 그로부터 십 수 년 뒤, 뒤늦게 아들이 찾아왔다.

기대와 다르게 심드렁하다. 또 다른 어린 아들과 치킨집을 운영하던 정유순은 돈이, 생활이 궁하다. 소매치기가 된 아들이 가져다 준 돈을 이유 불문하고 챙겨드는 이 엄마. 엄마가 마냥 좋은 아들은 그런 태도도 싫지 않지만, 생활이, 그 지지리 궁상 맞는 삶이 이 엄마를 초라하게 만든다. 그랬던 엄마는 아들 복수가 시한부 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끝내 오열한다.

산동네에 사는 하층 계급 중년 여성이자 '돌싱'인 치킨집 여자 사장 정유순은 어쩌면 윤여정이 보여줄 수 있는 엄마 연기의 총합이지 않았을까. 드물게 쿨하고, 그 속에 복잡한 속내와 채 다 표현하지 못하던 인간미를 감춘. 인정옥 작가의 <네멋대로 해라>의 복수 엄마는 분명 윤여정이라서 공감이가고 윤여정이 아니었다면 낯설었을, 우리시대 또 다른 엄마의 얼굴이었다.

"치, 대한민국 만세 좋아하시네. 으이구 철딱서니 없기는."

<바람난 가족>의 임상수 감독은 유난히도 윤여정을 '애정'했던 것 같다. 최근 봉준호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윤여정이 임 감독이나 봉 감독이나 사회학과 출신이라 삐딱한 영화를 만든다던 바로 그 임상수 감독 말이다.

위 저 대사는 임 감독의 문제작 <그때 그 사람들>(2005)에서 윤여정의 나레이션 중 일부다. '박정희 암살' 사건 당일 청와대 사람들의 행적을 말 그대로 시니컬하게 쫓는 이 작품에서 윤여정은 어르신(박정희)에게 딸을 바쳐서라도 부와 권력을 쫓으려는 철없는 엄마로 짤막하게 출연했다.

사실 그 깜짝 출연은 임상수 감독의 복안이었던 것 같다. 윤여정은 영화의 말미, 박정희 암살 사건에 연루된 실제 인물들의 후일담을 일러주는 나레이터를 맡아 매우 '쿨'한 대사를 이어간다. 역사 속 김재규에 비견할 김부장(백윤식)이 양복을 입은 정부 요원들에게 구박을 당하는 초라한 모습 위로 윤여정의 목소리가 깔리는 식이다.

"어때요? 저 사람. 혁명적 민주투사로 보입니까? 아니면 과대망상에 빠진 돈키호테였을까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은 저 사내의 법정최후 진술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는 설이 있습니다. 글쎄. 관심 있는 분은 찾아서 읽어 보시도록."

실제 암살 사건과 역사에 대한 '쿨하디 쿨한' 관조. <그때 그 사람들> 속 임 감독의 복화술사인 윤여정의 역할인데, 남자들이 망쳐놓은 역사에 대한 거리두기이자 일종의 자기반성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때 그 시절' 한국에 없었던 윤여정이 다소 정제된 어조로 '쿨'하게 읊조리는 영화 속 나레이션. <그때 그 사람들>을 어떤 태도의 영화로 만드는데 일조한 것이 바로 이 윤여정의 목소리 연기였다.

윤여정의 필생의 목적들
 
 윤여정의 전미 비평가위원회(NBR) 여우조연상 수상을 알리는 <미나리> 포스터 갈무리

윤여정의 전미 비평가위원회(NBR) 여우조연상 수상을 알리는 <미나리> 포스터 갈무리 ⓒ 플랜비

 
'임상수가 사랑한 윤여정'은 이후 <바람난 가족>(2003)과 <돈의 맛>(2012)에서 일종의 파격을 선보였다. 요즘말로 '윤여정이 뭔들' 혹은 '윤여정이 윤여정했다'로 요약할 수 있는 파격 캐릭터, 맞다. 다시 돌아봐도 대체 불가 캐릭터요, 관객들에게 어떤 쾌감을 던져주는 역할이었다.

<바람난 가족>에서 윤여정은 시한부 투병 중인 이북 출신 남편으로부터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며 자식손자따위 훌훌 털어버리고 '공개 바람'을 선언하는 시어머니 홍병한 여사를 연기했고, <돈의 맛>에서는 자기가 부리는 젊은 실장의 몸까지 탐하는 재벌가 백씨 집안의 탐욕스러운 안주인 백금옥을 맡아 김강우와 애정 신을 찍기도 했다.

특히 <돈의 맛>으로 제65회 칸 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기도 했던 윤여정은 당시 최고 45%의 시청률을 올렸던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2012)에서 '김남주 시어머니, 유준상 엄마'인 엄청애를 연기, 넓은 연기 폭을 자랑한 바 있다.

코믹한 주말극이던 <넝쿨째 굴러온 당신>과는 조금 결이 다르지만, 그 즈음 다소 평범한 엄마 혹은 할머니를 연기하기도 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송해성 감독의 차기작이자 소설가 천명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고령화 가족>(2013)이었다.

전작에서의 통편집으로 마음이 상한 윤여정이 처음엔 출연을 고사했다 송 감독의 진심을 확인하고 출연했다는 이 작품에서 윤여정은 소시민 '막장' 삼남매 윤제문, 박해일, 공효진의 '티키타카'를 보듬는 넉넉한 엄마를 연기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설 연휴 온가족이 함께 볼 만한 몇 안 되는 윤여정의 작품이기도 하다.

아, 그런 작품은 또 있다. 윤여정이 출연하진 않지만 윤여정의 아우라가 듬뿍 담겨있는 작품이. 트리오 한국 포크 음악계의 전설이 된 '트윈 폴리오'에 제3의 멤버가 있었다는 설정을 실화에 녹여낸 <쎄시봉>은 1960년대 그때 그 시절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조영남의 '리즈 시절'을 그렸다.

멜로드라마에 일가견이 있는 김현석 감독은 그들의 뮤즈였던 민자영(한효주)와 오근태(정우)의 로맨스를 주요 소재로 그리는데, 이 <쎄시봉>을 보며 윤여정을 떠올린 이들이 적지 않았다. 윤여정이 실제 음악다방 '쎄시봉'의 DJ로 활동했고, 그때 그 시절 쎄시봉 키드들의 '뮤즈'였다는 사실이 '전설'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랬던 윤여정은 <죽여주는 여자>(2016)에서 이른바 '박카스 할머니'를 연기해 또 한 번의 파격을 안겨줬다. 이미 <여배우들>(2009)이란 '페이크 다큐'에서 '5060 배우 윤여정'과 '여자 사람 윤여정'의 경계를 허문 바 있던 이재용 감독과의 범상치 않은 호흡이었다. 이 작품으로 윤여정은 제20회 몬트리올 판타지아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과 제10회 아시아 태평양 스크린 어워즈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렇게 '필생의 목적'일 이뤄낸 윤여정의 '오스카 입성'이 확실시 되고 있다. 최근 오스카 시상식을 주관하는 미국 아카데미위원회는 최근 <미나리>를 음악상과 주제가상 예비후보로 선정했다. 오스카상은 두 부문 모두 작품상 등 주요 부문 후보작 중에서 후보자와 후보곡을 선정해왔다.

11일까지 미국 내 영화상 중 무려 21개 여우조연상을 휩쓴 윤여정과 <미나리>의 아카데미상 주요 부문 후보 지명이 가시화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전형적인 것'을 거부하고 '조금 다른 것'을 추구했던 윤여정이 그 '필생의 목적'을 남들과는 달라도 많이 다른 오스카상 수상으로 이뤄내는지 지켜 볼 일만 남았다.
 
 23일 오후 온라인으로 진행된 영화 <미나리> 관련 기자 간담회. 리 아이작 정 감독과 스티븐 연은 미국 LA 현지에서 배우 윤여정, 한예리는 부산 해운대 영화의 전당에 각각 자리했다.

영화 <미나리> 관련 기자 간담회. ⓒ 부산국제영화제

윤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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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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