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세계전쟁, 러시아 혁명 그리고 스페인 독감

1917년 중국에 머물며 박재혁이 다녔던 중화국청년회관은 환구중국학생회관일 가능성이 있다. 1913년 가을 환구중국학생회관에는 한인유학생을 위한 영어강습소가 설치되었고, 신규식과 신채호도 이곳에 머물었다. 1916년 중반 "신규식·조성환·민충식 등에게 오는 서신·전신 등 미국에서 오는 것은 환구중국학생회를 통해 전달"된다고 파악하였다. 박재혁은 영어를 배움과 동시에 각종 정보를 얻을 능력을 키웠다.

중국에 체류하던 박재혁은 1918년 6월 부산으로 돌아와 두어달을 지냈다. 중국에서 돌아온 박재혁은 모친과 동생을 만난 뒤 오택과 최천택, 김영주를 만났다. 일단 그는 중국에서 들은 세계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1914년에 발발한 세계대전을 일본은 구라파전쟁, 미국은 유럽전쟁이라 했다. 전쟁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 동맹국간의 진영전쟁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실재 원인은 식민지 쟁탈을 위한 제국주의 간의 다툼때문이었다.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상품의 과잉 생산과 원료의 확보는 시장 쟁탈을 요구했다. 그것이 무력 전쟁으로 나타났다. 전쟁은 유럽 제국주의 국가 사이에서 시작했지만 러시아. 일본, 미국의 참전으로 인해 세계대전으로 전개되었다. 전쟁은 육해공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과거와 다른 전쟁 양상이었다. 수류탄, 탱크, 잠수함, 비행기가 등장하고 심지어 독가스를 사용하였다. 특히 병력과 포탄을 쏟아붓는 물량전과 방어로 버틴 참호전은 엄청난 인명을 살상하였다.

1917년 레닌에 의해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하였다.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보는 마르크스 이론을 현실화한 것이었다. 세계는 다시금 이념의 진영으로 나누어졌다. 러시아 혁명을 좌절시키기 위해 반혁명군인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미국‧프랑스‧일본 등은 시베리아 등지로 출병하였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러시아 노동자‧농민의 적위군(적국)을 조직하여 외국군대와 맞서 싸워 소비에트 정권을 지켰다. 이런 사이에 자본주의, 자유주의 진영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노동자‧농민계급의 투쟁을 막기 위한 사상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사회주의 사상은 점차적으로 전 세계에 퍼져갔고, 일본이나 식민지 조선에도 확산되었다. 1920년 영국‧미국‧프랑스는 병력을 철수했지만, 일본은 1922년까지 시베리아에 병력을 주둔하였다. 1918년 11월 1천만 명 이상의 희생을 낸 전쟁이 끝났다.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고, 일본은 승전국이 되었다.

그런데 세계전쟁의 부상병과 제대 군인들에 의해 전세계로 1918년 6월부터 스페인 독감이 번졌다. 당시 전세계 인구는 19억여 명 중에서 5억여 명이 감염되었다. 전세계 사망자는 1,700만 명에서 5천만 명에 이르렀다.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는 유럽대륙은 물론 미국, 일본, 인도, 중국을 거쳐 남태평양 군도 심지어 북극에도 번졌다. 20세기 최초이자 최대의 팬데믹(pandemic)이었다. 당시에도 마스크는 감염의 방어선이었다.

식민지 조선에도 어김없이 스페인 독감을 발병하였다. 1919년 3월 조선총독부의 발표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 1,678만 명 중에 절반에 가까운 742만여 명이 감염되어 약 14만 527명이 사망하였다. 일본은 약 16만 명이 발병하여 1,297명이 사망하였다. 조선과 일본의 위생과 의료체계의 차이 때문이었지만, 민족 차별의 결과이기도 했다. 당시 국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김구 역시 20여 일간 앓아누웠었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은 미국에 항복했고 미국 윌슨 미국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의 정신에 기초한 민족자결주의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제질서를 확립하려 한다고 천명했다. 스페인 독감의 위험보다도 식민지 조선인은 자주적 민족 독립이 더 중요했다. 1919년 3월 우리 민족의 독립 열기는 스페인 독감을 넘어섰다.
   
미국 캔자스주 하스켈 카운티(Haskell County)의 미군 주둔지 포트 라일리(Fort Riley)의 캠프 펀스턴(Camp Funston) 군 병원 병상에서 스페인 독감을 앓고 있는 군인들.
 미국 캔자스주 하스켈 카운티(Haskell County)의 미군 주둔지 포트 라일리(Fort Riley)의 캠프 펀스턴(Camp Funston) 군 병원 병상에서 스페인 독감을 앓고 있는 군인들.
ⓒ Wiki commons

관련사진보기

 
박재혁, 고려인삼 장사를 하다

박재혁은 부산에 몇 개월 머문 뒤 다시 1918년 가을 경에 상해를 거쳐서 싱가포르에 갔다. 박재혁은 싱가포르의 '남양무역주식회사'에 근무하였다. 오택(22세)은 미국 전도사 부인에게 야간에 영어를 배웠다.

'고려인삼'은 조선 후기 이래 중국과 일본으로 수출한 중요 품목이었다. 인삼 그 자체가 마치 달러와 같이 국제 통용화폐 역할을 했다. 인삼은 땅에서 캐낸 수삼(水蔘, 생인삼), 건조 시켜 제조한 백삼(白蔘, 건삼), 인공재배한 수삼을 쪄서 말린 홍삼(紅蔘) 세 종류가 있다. 홍삼은 조선시대부터 개성 상인에 의해 유통되었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궁내부 내장원에서는 여러 가지 재원 확보 정책을 추진하면서 홍삼 전매를 시행하여 국가 독점 상품이 되었다.

그 후 장기간 보관의 목적으로 수삼을 수증기로 찐 다음 건조 시킨 홍삼은 조선총독부가 전매하여 일본기업 미쓰이(三井)물산이 독점적으로 판매했기 때문에 일반 한인들은 취급할 수 없었다. 미쓰이는 우리의 홍삼을 중국과의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남겼고, 결국 이를 통해 다시 조선을 침탈하는 자본으로 사용하였다. 박재혁이 삼정물산에 취업한 것은 일제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신분 위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인삼의 재배, 즉 경작권을 장악한 개성 삼포주는 삼포에서 주로 6년근 수삼을 채굴한 후 전량을 전매국에 납부하였다. 수확한 생인삼 중 총독부에서 수납하지 않은 것(후삼 혹은 퇴각삼이라고 한다)은 백삼으로 제조하여 자유로 판매할 수 있었다. 주로 홍삼은 중국으로, 백삼은 일본에 판매하였다. 물론 그중 일부는 몰래 홍삼으로 만들어 팔았다.  

전매제에 따라 홍삼을 제조하여 팔지 못하자 개성상인의 후예들은 백삼을 상품화하여 판매하였다. 그때가 1910년대 이후이다. 1910년대 이후 삼업 수확 면적이 급격히 증가하여 1913년에는 수확 면적이 12만 간으로 두 배 이상 급증하더니 1914년에는 19만 간으로 증가하였다. 증가 추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15년에는 29만 간, 1916년에는 34만 간으로 격증하였다. 1917년에도 수확 면적이 30만 간을 상회하였다. 1918년과 19년 두 해에는 20만 간 이하로 면적이 크게 감소하였다. 그리고 1920년에 다시 30만 간 이상으로 증가하였고 1922년에는 47만 간으로 격증하였다. 이후에는 1926년을 제외하면 30만-40만 간대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수삼, 백삼과 홍삼의 가격 차이는 있었다. 1924년 무렵 수삼 1근 가격은 1원 50전 가량, 백삼 1근은 15원 가량, 홍삼 1근 가격은 65원 정도였다. 이 홍삼을 중국에서 판매하면 1근 150원에서 200원 정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홍삼과 백삼의 차이는 단지 쪄서 말렸느냐 아니면 그냥 말렸느냐의 차이뿐이고 품질에는 하등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한국인과 일본인은 경제적인 백삼을 복용해도 충분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홍삼과 백삼이 약효에서 차이가 없고 가격은 백삼이 훨씬 저렴하니 백삼을 애용하라고 권고하였다. 때로는 일본산 백삼을 조선산 백삼으로 속여서 판매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백삼의 중국 수출은 일본에 비해 어려움이 많았다. 고려(조선)인삼은 곧 홍삼이라는 인식 때문이었으며, 중국에는 미국 백삼과 일본 백삼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립운동자금의 한 방편이 된 인삼 판매

고려인삼은 한인들에게 생계유지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상해에 오는 한인 가운데 소지금이 넉넉지 않은 이들은 으레 인삼 몇 근을 들고 와서 현지에서 판매하여 여비나 생활비, 학비 등을 조달하였다. 중국 내륙이나 동남아로 여행할 때에도 부피가 작아 휴대하기 편리하고 현금화가 용이했기 때문에 휴대하고 다녔다. 당시 인삼 무역상점은 단순한 영업점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으며 인삼 행상이라는 직업은 독립운동가들이 생활 자금과 운동자금을 조달하는 방편이었다고 알려져 왔다.

박재혁이 싱가포르에서 미쓰이물산과 남양무역회사에 취직한 것은 인삼판매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상해 역시 중국인을 상대로한 인삼 장사로 최적지였다. 일제시기 중국은 일본과 더불어 고려인삼의 주요 소비국이었다. 한국의 인삼 수출은 중국 상해(上海)에 집중되었다. 상해는 중국 내 대표적인 인삼 집산지이자 소비지역으로 중국 남방의 홍콩, 남양(南洋)의 싱가포르와 함께 중요한 지역이었다.

상해에 모인 고려인삼은 현지에서 소비되거나 다시 중국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한국의 고려인삼 상인들도 상해에서 홍콩, 나아가 동남아나 북미, 중남미 등 세계 각지로 뻗어나갔다. 당시 남양(南洋)은 대만, 필리핀,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지역을 말했다.

싱가포르는 '동양의 십자로(十字路)'였다. 정원택은 1915년 3월 4일 오후 3시 싱가포르에 도착하면서 "이 항구는 유럽과 아시아 내왕의 중심지요, 남양에서 제1의 대도시이다. 하루 동안에 각국 기선의 출입이 30개 이상이나 된다고 하였다. 부두에는 손님을 맞는 자동차가 폭주하여 끊임없이 드나들며… 이곳에서 제1의 통용어는 영어요, 그 다음은 말레이시아어요, 중국말은 복건.광동말을 주로 쓴다고 한다. 싱가포르는 유럽과 아시아의 해상교역 중심지였기 때문에 1910년대 이전부터 인삼 상인들이 진출하고 있었다"라고 적었다.

상해 일본총영사관의 조사에 의하면, 1910년 9월 21일 현재 상해 거주 한인 37세대주 가운데 6세대주 직업이 인삼 행상이었다. 세대주의 직업 가운데 인삼 행상이 가장 많았다. 1914년 3월 현재 상해 거주 한인 53명 가운데 인삼 행상은 8인이었다. 인삼 행상을 가장하며 생계유지와 함께 독립운동 자금 조달 및 독립운동 연락책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의열단원 장승조(張承祚)는 상해에 와서 임시정부 군무부에서 활동했으나 몇 년 후 임시정부가 곤궁하여 식대도 주지 못하는 형편이라 부득이 인삼 한 근을 구하여 호북성 한구(漢口)로 인삼 행상을 떠났다는 기록이 한 예이다.

또 독립운동가들이 인삼 행상으로 변장하여 배일선전활동을 수행하였다. "한인(韓人)은 중국의 과격파와 연락하야 수백명의 단원이 매약(賣藥), 고려인삼 등의 행상인으로 변장하야 양자강 연안 각지 교통빈번한 가두에 노점을 설치하고 겉으로는 약을 판다고 하고, 내용으로는 조선망국 참상과 일본의 가혹한 대우를 연설하야 중국인의 배일(排日) 기세를 선동하는 고로 중국 관헌은 중일(中日) 국교에 관계가 급할가 하야 엄중 취체하나 해당 한인 등은 중국어에 유창하야 중국 관헌이 판명하야 체포하기 극히 어렵다"라고 하였다.

한국인 인삼상인에 대해 1916년 2월 17일자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에 따르면, "근시(近時) 한국인(韓國人)으로서 인삼판매(人蔘販賣) 기타 행상(行商)을 목적으로 신가파(新嘉坡, 싱가포르) 지방에 도항(渡航)하는 자가 점증(漸增)하였으나 기(其) 대부분이 여권을 소지하지 않고 동지(同地)에 도착한 후 다시 인도, 섬라(暹羅, 타이)·태국, 마닐라, 난령인도(蘭領印度)방면으로 가기 위하여 재신가파일본영사관(在新嘉坡日本領事館)에서 여권을 내려고 하는 자가 적지 않다"라고 하고 있다. 이로 보아 동남아지역에 인삼판매를 목적으로 싱가포르에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게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 11930년 12월 31일 싱가포르에서 인삼행상을 하던 사람이 <동아일보>에 보낸 편지에 따르면, "현재 남양일대에 필리핀, 인도, 지나, 섬라, 마래반도, 화란령 군도에 산재한 동포의 수는 약 5백 내지 6백명으로 산(算)할 수 있는 바, 그들의 직업으로는 십수인 내외의 교원학생, 관공리 및 수 개의 잡화상, 약종상을 제외한 기(其) 대부분은 고려인삼상으로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런 내용을 토대로 본다면, 박재혁은 싱가포르에서 인삼 무역상으로 활동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박재혁이 무역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어와 영어 사용이 어느 정도 능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박재혁은 인삼행상을 가장하면서 중국 내륙을 다니면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였거나 싱가포르에서 인삼 영업원으로 있으면서 독립군의 안전한 통행을 도왔을 가능성이 있다. 동남아지역에서 고려인삼은 한인들의 생활의 기반일 뿐만 아니라, 우리 독립운동에도 재정적 기반을 마련해 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회사가 4~5개소의 본지점을 두고 사업을 하였던 고려물산공사(高麗物産公司)이다. 이 조직을 통해 한인들이 동남아 각 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우리의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이 회사의 직원으로 고용되었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운남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상해에서 활동하던 문일민(文逸民)의 경우에도 고려물산공사의 사원이었다. 고려물산공사는 독립운동가들이 자유롭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연락망을 가지고 있었고, 안정된 직업을 갖고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1915년부터 1917년까지지 싱가포르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한 홍명희(洪命熹, 1888~1968), 김덕진(金德鎭, 1864~1947), 김진용(金晋鏞, 1889~1958), 정원택(鄭元澤, 1890~1971 등이 있었다. 홍명희 등의 행로는 당시 함께 정원택이 남긴 <지산외유일지(志山外遊日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싱가포르 등 남양군도로 가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중국 광복 전후에 운동자금이 남양의 화교 중에서 많이 연출되었으므로 우리도 재원이 풍부한 남양에 광복운동의 자금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는지 답사"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로 보아 홍명희 등 4명이 싱가포르에 가게 된 이유는 당시 중국혁명에서 자극을 받아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항구적으로 마련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박재혁, 고무신을 만들라고 하다 

그런데 싱가포르에 있었던 김진용이 말레이반도에서 고무원료를 구매하였다. <일지>에는 "6월 22일 단정(檀庭) 김진용, 벽초(碧初) 홍명희, 동성(東醒) 김덕진 및 나 정원택와 네 사람이 배를 타고 같이 가서 지난날 단정이 사두었던 고무원을 두루 보고 거기서 유숙하였다. 23일 싱가포르로 돌아왔다."라고 한다. 김진용이 구입한 고무농장은 싱가포르에서 배를 타고 얼마가지 않는 곳에 있었다.

그는 1916년경부터 멀라까(Malacca) 근처에 당시 유망한 사업으로 평가 받던 고무 플랜테이션을 사두고 고무 공장 운영에 간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석 광산에 투자하기도 하였다. 1917년 10월 18일 "연전부터 재배하던 고무원을 방매하니 대금이 2,200원이었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규모의 고무농장을 경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4년여의 남양 생활을 마치고 홍명희·변영만은 중국 상해로, 정원택·김덕진은 일본 신호(神戶)로 떠났다. 이로써 싱가포르에서 3년여 동안 체류하면서 펼친 독립운동자금 모집활동은 막을 내리게 된다.

박재혁이 근무했던 싱가포르 인근에 고무 농장이 있었다. 박재혁은 오택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오형, 그동안 잘 있었는가? 자네가 보내준 인삼으로 지금 싱가포르에서 장사를 잘하고 있다네, 거두절미하고 인삼판매 대금으로 생고무판을 보내니 이것을 이용하여 보시게! 동남아에서 '고무'원료를 가져와서 '고무'제품을 만들어 파는 것은 이윤이 많을 뿐만아니라, 분명 다른 사업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네. 먼저 고무로 신발을 만들면 어떨까?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게!"

박재혁의 편지를 받은 오택은 생고무판을 가지고 신발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화학지식과 창조력이 없어서 고무신을 만들지 못했다. 무엇보다 신발공장을 만드는 것은 많은 자본과 기술, 무엇보다 총독부의 허가가 필요했다. 오택에게 보낸 편지로 보면 박재혁은 경제적 안목이 있었던 청년이었다.
 
 그는 싱가포르 등지에 인삼을 통신판매를 하였다. 출처 매일신보
▲ 1910년대 인삼왕 최익모  그는 싱가포르 등지에 인삼을 통신판매를 하였다. 출처 매일신보
ⓒ 매일신보(1918.04.06.)

관련사진보기

 
조선 사람은 짚신과 미투리를 주로 신었다. 신분이 높은 양반은 가죽과 비단으로 만든 신발을 신었지만 , 일반 사람들은 식물의 줄기를 재료로 만든 짚신이나 미투리를 신었다. 거칠 뿐만 아니라 불편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신발보다 맨발로 뛰어놀았다. 조선 사람에게 고무신이 보급된 때는 1910년대 말이었다. 고무신은 고무화, 고무 경제화, 호모화(護謨靴)로 불렸다.

고무는 공기가 통하지 않아 비가 올 때나 땅이 질 때에 신으면 물이 들어오지 않아 유럽 각국에서 덧신으로 사용하였다. 세계대전 때 가죽값이 대단히 올라 구두 값도 올라 30원이란 전무한 높은 값이 되었다. 일본의 고무공장에서 대정 8년(1918)부터 고무 구두화 제조에 착수하여 고무신을 만들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1919년 대륙고무공장에서 짚신 모양의 조선식 고무신을 만들었다.

고무신이 만들어지자 고무신을 훔치는 절도범이 생기기도 했다. 당시 고무신 한 켤레 값이 짚신 다섯 켤레 값이었지만 착용감이 좋고 경제적이어서 수요가 폭발적이었다. 그래서 공장도 1921년 용산원산 한 곳이었던 것이 새로 여섯 곳이 설치되었다. 조선 사람의 반은 고무신을 신을 지경이었다. 고무신의 대유행은 필연적으로 짚신, 미투리 등을 제조하는 직공의 몰락을 가져왔다. 실제로 경성에서 전통적 조선신을 만들던 직공 500여 명이 직업을 잃고 실업자가 되어 사회적 문제가 됐다.

부산 지역의 신발 산업은 1923년 8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688번지에 일영고무공업사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부산에 고무공장이 생기고, 한국전쟁 이후 부산진지역에 범표, 말표, 기차표 등의 '검정고무신' 신발공장이 생겨 부산 신발 산업을 이끌었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태그:#의열단원, #벅재혁, #고려인삼, #오재영(오택)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부산, 울산, 양산 지역의 역사문화에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 탐험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