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궁 3관왕을 차지한 안산이 30일 일본 유메노시마 공원 양궁장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양궁 여자 개인전 시상식을 마친 뒤 금메달을 들어 보이고 있다.

양궁 3관왕을 차지한 안산이 30일 일본 유메노시마 공원 양궁장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양궁 여자 개인전 시상식을 마친 뒤 금메달을 들어 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금요일, 스무살의 궁사는 도쿄 올림픽 최고의 스타로 올라섰다. 올림픽 양궁 국가대표팀 안산 선수는 개인전 8강에서 여성 양궁 세계 랭킹 1위 디피카 쿠마리(인도) 선수를 꺾었고, 매켄지 브라운(미국), 옐레나 오시포바(러시아올림픽위원회) 선수와 접전을 거듭한 끝에 극적으로 금메달을 품에 안았다. 많은 시청자들이 그의 승리에 환호했다. 상대 선수보다 안정적으로 움직인 안산 선수의 심박수 역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안산 선수는 한편에서 자신의 성취와 아무 상관이 없는, 황당한 이유로 공격을 받았다. 그가 쇼트 커트 헤어를 했다는 것, 그리고 개인 SNS에서 '웅앵웅', '오조오억' 등의 커뮤니티발 신조어를 사용한 전적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안산 선수가 페미니스트로 의심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올림픽 스타를 괴롭힌 반지성주의

안산 선수에 대한 공격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져갔다. 심지어 안 선수가 좋아하는 가수, 출신 지역, 평소에 착용하는 세월호 배지 역시 억측의 소재가 되었다. 심지어 그의 메달 반납을 종용하는 목소리도 등장했다. 그를 공격하는 일부 네티즌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쇼트 커트는 '탈코르셋' 운동을 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전유물이다./ '웅앵웅'과 '오조오억'은 여초 커뮤니티 등에서 주로 쓰이는 용어다./ 여초 커뮤니티는 페미니스트들의 본산이며, 이 용어는 남성혐오 표현이다."

심지어 제1야당 국민의힘 양준우 대변인조차 자신의 SNS를 통해 "논란의 시작은 허구였지만 안산 선수가 남혐 단어로 지목된 여러 용어들을 사용했던 것이 드러났다"고 했다.

법철학자 로날드 드워킨(Ronald Dworkin)과 제레미 월드론(Jeremy Waldron)은 혐오표현(Hate Speech)의 규제를 두고 논쟁했다. 혐오표현 규제에 반대한 드워킨은 혐오표현을 '소수자에 대한 불평등한 내용을 담은 표현'으로 정의했고, 월드론은 혐오표현이 '혐오를 사회적으로 재생산할 가능성'에 집중했다. 일각에서 '남혐 단어'로 여겨지고 있는 '오조오억'은 소수자에 대한 불평등한 내용을 담고 있는가? 혹은, 남성에 대한 사회 구조적 차별을 재생산할 위험이 있는가?

페미니스트의 정체성이 헤어 스타일, 인터넷 신조어 사용, 여대 재학 여부 등으로 판가름된다는 것 역시 피상적인 접근 방식이다. 커뮤니티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페미니스트가 아닐 수 있고, 해당 용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페미니스트일 수 있다. 문화예술학자 이라영 선생은 자신의 저서 <타락한 저항>에서 '혐오하는 대상에 대해 알기를 거부하는' 반지성주의를 논했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그것을 생각하는 일은 피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세상의 모든 존재를 '페미'와 '안티 페미'의 이분법으로 단순화한다. 이 논리대로 재편된 세계관에서 쇼트 커트 헤어 스타일을 한 여성은 페미니스트가 되고, '오조오억'은 남혐 단어가 된다. 안산을 공격한 네티즌들의 경직된 사고방식 역시 '알기를 거부하는' 반지성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이것은 논란이 아니다

논란거리가 아닌 것을 논란거리로 만드는 기성 언론의 보도 행태 역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사건의 경우 가해자(일부 네티즌)와 피해자(안산 선수)의 구도가 명확한 상황이다. 그러나 국내의 많은 레거시 미디어는 '남성혐오 표현 논란', '젠더 갈등' 등 기계적 중립에 매몰된 표현으로 본질을 흐렸다. 이 사건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는 시청자가 헤드라인을 접한다면 '안산 선수가 문제 소지가 있는 발언을 한 것일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언론조차 혐오 표현과 갈등에 대한 개념화를 하지 못한 것이다.

로이터 통신과 BBC, 폭스 뉴스 등 외신도 이 사건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앞선 매체들의 접근 방식과 대조된다. 로이터 통신은 "안산 선수에 대한 '온라인 학대'는 젊은 한국 남성 사이에서 일고 있는 반 페미니스트 정서에 근거했다"고 분석했다. BBC 소속 한국 특파원인 로라 비커 기자 역시 "자신들의 이상에 부합하지 않는 여성을 공격하는 소수의 목소리"라며 네티즌들을 비판했다. 논란이 아니라 '사이버 폭력'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페미니즘이라면 무엇이든 옳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페미니즘이 21세기 현대 사회의 큰 물줄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지난 5월 한미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공동성명에서는 이공계 여성의 역량 증진, 여성 폭력 종식과 성별임금격차 해소 선언 등 성평등 이슈가 포함되어 있었다.

마블 스튜디오가 2년 만에 내놓은 <블랙 위도우> 역시 핍박받아온 여성의 해방 서사였다. 지난해 위켄드와 함께 레트로 열풍을 주도한 팝스타 두아 리파(Dua Lipa)는 'Boys will be boys'를 불렀다. '너라는 위대함을 믿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여성의 나이키 광고는 어떤가? 짧은 머리를 한 여성 선수가 '페미니스트로 의심된다'라는 이유로 공격받았다는 것은 매우 퇴행적 사건이다.

안티 페미니즘 정서는 현 시대의 청년 정서를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페미니즘과 성평등이라는 기표 자체를 악마화하는 태도는 이번 사건과 같은 폭력으로 귀결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안산 선수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으로 높다. 그러나 이 촌극은 머지 않은 시일 내에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안산 선수가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누구도 혐오와 차별에 노출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 본질이다. 오히려 우리가 새겨야 하는 말은, 당시 경기를 중계했던 KBS 강승화 아나운서의 멘트와 가깝다. 혐오는 안산 선수도, 그리고 우리도 흔들 수 없으니.

"국가, 인종, 종교, 성별로 규정된 게 아닌 자신의 꿈을 향해 묵묵히 노력한 한 인간으로서의 그 선수, 그 자체를 보고 계십니다. 안산 선수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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