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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레이디 시절 카터 부부와 함께 청와대 영빈관에서.
 퍼스트레이디 시절 카터 부부와 함께 청와대 영빈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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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 미국대통령이 7월 중순 한국을 방문키로 했다. 사제단을 비롯 재야 민주세력은 박정희독재를 공인해주는 그의 방한을 극력 반대하였다. 당국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사제단과 재야인사들을 연금ㆍ연행시켰다. 고질 또는 괴질처럼 되었다. 정부가 국가의 행사에 특정인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 일상화되고 있었다. 사제들에 대한 탄압이 갈수록 심해졌다.

사제단은 6월 28일 〈박정희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서한〉을 공표했으나 이를 보도한 언론은 하나도 없었다. 이 시기 '반신반인(半神半人)'이 된 대통령에게 직접 공개서한을 쓴 사람(집단)은 사제단 뿐이었다. 물론 당사자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서한'의 뒷 부분이다.

1. 분명히 민주 법치국가라면 착한 국민의 주권을 보장한다는 말과 행동이 부합해야 되는 게 아닌지요?

2. 국내외적으로 이 나라의 국민총화를 자신하시고 카터 대통령에게 확신을 자부하시는 대통령께 묻습니다. 우리를 감시ㆍ미행ㆍ협박ㆍ동행ㆍ저지 및 연금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3. 카터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치안 질서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공익과 질서를 위한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사는 성직자를 삼엄하게 저지, 감시하는 이유는 왜인가요?

4. 총화 단결의 표시로 온 국민이 카터 대통령의 방한을 환영해야 한다면 국민의 자격을 가진 사람은 모두 참여시켜야 할 것이 아닌지요?

5. 부당하게 종교 행사를 방해하고 국민총화를 저해한 행위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요? 국민의 소리를 들을 줄 알고 지도 편달하시는 대통령께서 이유와 책임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대통령과 나라의 위정자를 위해 우리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석 2)

1970년대 함평 고구마사건과 함께 큰 농민사건으로 꼽히는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일명 오원춘사건이 1979년 5월에 다시 이슈화되었다. 1978년 영양군 청기면 농민들은 군청과 농협에서 알선한 씨감자를 심었으나 싹이 나지 않아 농사를 망치게 되었다. 가톨릭농민회 임원이었던 오원춘이 당국을 상대로 피해 보상을 받았고 이 사실을 농민들에게 알리는 강연을 했다.

농민들이 움직이자 당국은 그를 납치하여 울릉도 지역으로 끌고 다니며 폭행을 가하고 풀려난 그가 천주교 안동교구 신부들에게 알리고 정의구현사제단이 7월 17일 이 사건을 폭로하게 되었다. 오원춘은 7월 5일 〈양심선언〉을 통해 납치당하여 울릉도까지 15일 동안 강제 격리된 상태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낸 사실이 있었다고 밝혔다.

사제단은 8월 6일 〈우리에게 핍박이 올지라도〉라는 결의문을 통해 "현 정권은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죄악을 거침없이 저질러왔고 또 그럴 수 있는 비이성적 집단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것이 만일 사실이 아니라면 당국은 오원춘 형제를 이용하여 정호경 신부와 여러 형제들을 체포ㆍ투옥하기 위한 사기극을 각본에 의해서 조작ㆍ연출했다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 없다. 고난 받는 형제를 사랑하고 그 이웃 형제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마땅히 사제와 크리스찬이 해야 할 일이다."(주석 3 )라고 천명했다.


주석
2> 앞의 책, 416쪽.
3> 앞의 책, 43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민주주의,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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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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