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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8일 감옥에서 석방된 함세웅 신부
 1979년 12월 8일 감옥에서 석방된 함세웅 신부
ⓒ 함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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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폭력이었다.

공권력의 외피를 뒤집어 쓴 정치폭력의 행태는 안하무인격이었다. 일부 종교지도자가들은 조찬기도회를 열어 전두환을 "하늘이 주신 민족의 태양"이라 읊조리고, 언론은 그의 대통령 취임을 "80년대의 새로운 발전이 필요한 새로운 활력을 얻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란 사설을 썼다. 천주교는 1981년이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이었다. 

광주의 비극을 들추어낼 힘도 용기도 없는 교회, 그렇다고 불의한 독재정권과 맞서 싸울 의지도 없었던 교회, 이런 교회에 교구설정 150주년 기념행사란 참으로 하늘이 주신 은총의 떡인 셈이었다. 온통 모든 것이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로 초점이 맞추어 있었으니 자연히 광주의 비극에 대한 기억은 흐려지고 독재정권에 대한 질타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교구 설정은 전 교회적 사건이었지만 교구간의 불일치로 결국 서울 중심의 행사가 되고 다른 교구에서는 행사에 참여하는 정도로 협조했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사제단은 어쩔 수 없이 자중할 수밖에 없었다. (주석 6)

유신체제에서 '순교'까지 내걸고 저항의 의지를 보였던 정의구현사제단이 5공 초기에는 다소 조신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정의사회'를 요란하게 내건 5공 정권의 살기 넘치는 사회 분위기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의 정명을 내세우기가 망설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용기 있는 사제들은 여전히 불의한 세력과 싸우고 법정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는 명제로 '정의(justice)'의 개념을 정립하고자 했던 소크라테스와 동시대의 인물 트라시마코스(B.C.470~B.C. 399)는 "정의는 단지 강자의 이익일 뿐"이라고 반격했다. 1980년대 초부터 한국사회의 나부낀 '정의'는 강자(도)들의 깃발이 되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이 집단적으로는 움츠린 데 비해 광주교구와 사제들 중에는 거대한 시대악에 맞서 싸운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함세웅 신부는 5월 17일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고, 5월 24일 광주대교구 윤공희 주교는 광주시민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로운 보살핌을 빌도록 하자는 〈공한〉을 사목서한에 실어 광주교구 내 전 교회에 배포했다. 광주교구 사제들은 5월 22일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가 작성한 〈전두환 광주 살륙작전〉이란 유인물 1만 매를 인쇄하여 각 성당에 배포, 신군부 공수특전단의 시민학살 만행을 많은 도민들에게 알렸다.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 6명과 수녀 1명이 7월 15일 계엄사령부에 구속되고, 광주교구 사제 8명도 계엄포고령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광주교구사제단은 7월 15일 보고서 〈제2의 광주항쟁 진상과 우리의 결의〉에서 광주항쟁의 진상을 밝혔다. 또한 박창신 신부와 임 모이세군이 6월 25일 밤 여산본당 사제관에서 괴한 4명에게 파이프와 칼 등으로 테러를 당한 것을 비롯 많은 성직자들이 고초를 겪었다. 김성용ㆍ조철현 신부는 사태수습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엉뚱하게 내란음모 방조 혐의로 피소되어 법정에 섰다.

정의구현사제단은 6월 30일 광주교구 사제단의 광주항쟁에 대한 진상보고서가 있은 후 별도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민족적 비극인 광주사태에 접하여 복음적 진리와 정의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이 그 태도를 밝힌다.

1. 우리는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이 발표한 광주항쟁의 진상이 진실임을 믿는다.

2. 당국은 정권 안보를 위해서 더 이상 사실을 왜곡, 허위 보도하는 현 작태를 즉각 포기하고 언론자유를 보장하라. 

3. 광주사태의 비극적 원인은 현 정부와 일부 군부의 광적인 살인행위에서 기인된 것임을 천명한다.

4. 현 사태는 민족적 치유가 요구된다. 비상계엄 해제와 구속된 민주시민, 학생들의 석방이 즉각 이루어져야 하며 민주헌정이 시급이 수립되어야 한다. (주석 7)


주석
6> <학생들의 용기만이 빛났다>, <암흑속의 횃불(4)>, 346쪽.
7> <암흑속의 횃불(4)>, 6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민주주의,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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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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