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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플랫폼에 글을 열심히 썼더니 돈이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욕심만큼도 아니고, 아직 주머니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제게 보상하기로 합니다. 남들은 쉬워 보이는 한 뼘 더 들여다보는 세상 소식과 한 숨 더 들이는 생각의 깊이에 노력을 했습니다. 한 숨 더, 한 뼘 더, 한 발자국 더, 그런 남모를 노력의 투자에 대한 보상이니 뜻깊게 쓰고자 합니다.

그래서, 결심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결정 끝에, 정말 오랜만에 이발소에 가기로 합니다. 뭐 요즘에는 폼나게 '바버샵'이라고 하더군요. 퇴폐의 오명을 쓰고, 일상의 주변에서 사라진 뒤, 다시 로드샵이라며 홍대, 이태원, 연남동, 힙한 거리에 하나둘씩 눈에 띄던 곳이 삶의 근처에 와 있더군요. 그래서 가 보기로 합니다.

제법 무거운 철제문을 열고 들어선 이발소, 아니 바버샵의 모습은 낯설기만 합니다. 예전 이발소의 묵직한 직각 회전의자는 여전하지만, 알록달록 벽지에 벽 한켠을 채운 영어 가득한 원형 통들, 아마도 포마드ㆍ스킨ㆍ왁스일 것이라 생각하며 자리에 앉습니다.

그 순간 이터널 선샤인의 짐 캐리가 된 듯, 기억은 추억을 회상하고 추억은 어느새 그 먼 옛날을 이야기합니다. 그 먼 옛날의 추억은 이상하게도 냄새가 납니다.
 
거울에 비친 비슷한 모습이 비슷한 연상 작용을 합니다. 시간 여행으로의 장치인 듯.
 거울에 비친 비슷한 모습이 비슷한 연상 작용을 합니다. 시간 여행으로의 장치인 듯.
ⓒ 영화 <이터널 선샤인>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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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유년ㆍ소년 시절 부친은 늘 부재중이었습니다. 가정사라기보다는 '가계 사정'으로 부친은 머나먼 열국의 사막에서 일하는 파견 근로자였고, 제게 부친은 늘 사진으로, 편지로만 찾아오는 그리운 사람 그 자체였지요.

어버이날에 두 개씩 만들게 되는 카네이션을 모친의 양 가슴에 다는 일이야 다반사였고, 다 큰 사내가 여탕에 끌려 들어가 유치원 동무를 만난 일은 아직도 극복하기 어려운 기억입니다. 그중 이발에 대해서는 참 묘한 기억이 있습니다.

가벼운 살림에 막내 녀석 머리야 집안의 신경 쓸 일이 못 되었겠지요. 어른들 모두 신경 쓸 틈 없으면, 제 머리는 세 갈래로 묶어 노란 고무줄 밴드로 동여매어지기 일쑤였습니다.

땀 범벅, 땀띠 불쑥 솓아 오르는 계절이 되면, 출처를 알 수 없는 황금빛 묵직한 재단용 핑클 가위가 내 머리를 일자로 정리하곤 했습니다. 귀 잘리기 싫으면 숨도 크게 쉬지 말라는 모친의 엄포에 제 머리는 늘 '바가지', 그냥 까만 대접을 엎어 놓은 모양새로 한 철을 보냈습니다.

부친이 일 년에 한 번 귀국 휴가를 오면 제게 신세계가 열렸습니다. 일요일 오후 저와 형의 손을 잡고 들어선 곳, 철제 직각 의자와 하얀 가운의 아저씨가 빗과 가위를 가슴 주머니에 꽂아 넣고 반갑게 맞이하는 곳, 바로 '이발소'였습니다.

저는 의자 위에 나무판자를 덧올려 작은 키를 보완하고, 드디어 남자의 머리를 깎았습니다. 간지럽고 들썩 거려도 제법 잘 참아 보았더니, 이내 타일과 시멘트 미장이 매끈해진 세면대인지 수돗가인지 모를 곳에서 머리를 감겨 주었습니다. 뭐 묘사할 거리도 없이 간단한 아이의 차례가 끝나고 부친의 의자로 시선 고정이 되었습니다.

착착착 빠른 가위질 손놀림으로 머리를 다듬어 내고, 의자를 제치고 부친의 얼굴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건을 덮어 놓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이발사는 플라스틱 컵에 두툼한 솔을 휘저어 거품을 낸 뒤 부친의 양 뺨과 턱에 발라내었습니다.

그리고 서슬이 퍼런 면도칼로 싸사삭 수염을 밀어내고, 거품에 묻어 나온 잔재를 수건에 닦아 내고 다시 또 싸사삭 밀어내기를 반복했습니다. 의자를 일으켜 주곤 이내 부친의 뺨을 찰싹찰싹 쳐대며 스킨을 발라 주었습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레드썬', 아, 이 냄새였군요. 머스크 향 가득한 어른의 냄새, 아빠의 냄새, 그리운 냄새.
 
ⓒ envato ele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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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샵이라 쓰여있지만 이발소라 부르고 싶은 이곳에서의 서비스가 마무리되어 갑니다. 거울에 있는 중년의 남자를 눈여겨봅니다. 더벅 덥수룩하던 머리는 이대 팔 가르마로 정갈히 빗겨져 포마드 듬뿍 발라 넘겨져 있고, 귀밑 머리는 짧게 다듬어 모양이 제법입니다.

눈여겨 보다가 깜짝 놀랍니다. 한때 지갑에 지니고 다녔던 어느 중년의 흑백 증명사진과 닮아 있습니다. 아빠가 닮아 있다는 노래 가사처럼 꼭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냄새가 났습니다. 머스크 향 강한 기억 속 추억의 그 냄새 말이죠.

이발소에서, 그 냄새로 알았습니다. 이제야 겨우 그 어른의 냄새를 가졌다고, 어깨 무거운 가장의 냄새, 그리운 아빠의 냄새 말이지요. 아버지 말고 아빠의 냄새. 이제 겨우 쉰 하고 한 살에 말입니다.

나보다 일찍 어른이 되었던 그분이 참 그립습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동시 발행 예정입니다.


태그:#이발소, #어른, #추억, #그리움, #흑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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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IT컴퍼니(IBM, NTT)에서 비즈니스 디벨로퍼로 퇴직 ; 바람들어 사랑하는 아내 여니와 잘 늙어 가는 백수를 꿈꾸는 영화와 야구 좋아라하는 아저씨의 끄적임. 정치.경제.사회 그리고 일상에 대한 글을 나눕니다. <원순씨를 부탁해>의 저자. 다수의 독립잡지에 영화, 드라마 리뷰, 비평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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