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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번잡하지 않은 충북 괴산 읍내를 벗어나자 길은 한결 한갓지다. 읍내에서 20여 리 떨어져 있는 김항묵 고택으로 가고 있다. 칠성면 율원리에 있다. 전국에 소문난 꽃담이 있다기에 찾아가기는 하는데 꽃담의 생김보다 꽃담이 이런 시골에 있는 연유가 더 궁금하다. 연풍에서 시작해 아직 풋내를 벗지 못한 쌍천(雙川)가에 얼굴 검은 돌비석이 칠성을 알린다.

일곱 개 별이 빛나는 칠성면

별이 일곱 개인 칠성면이다. 고졸한 멋은 없지만 층수 낮은 집들과 시멘트블록 담, 풍년방앗간, 괴산성당 칠성공소, 칠성 다방, 청인 약방으로 소읍이 풍기는 정다운 맛은 난다. 이름의 유래는 칠성면 면소재지 도정리에 있던 일곱 소나무와 칠성바위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칠성바위는 현재 청인약방 주변에 흩어져 있는 7기의 고인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약방의 낡은 함석지붕은 나이 들어 고개를 떨구지만 그마저 우리에게 위안이 된다. 사진 오른쪽 까만 바위가 7기의 고인돌 중의 하나다.
▲ 청인약방  느티나무 아래에서 약방의 낡은 함석지붕은 나이 들어 고개를 떨구지만 그마저 우리에게 위안이 된다. 사진 오른쪽 까만 바위가 7기의 고인돌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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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인 약방은 외진 소읍에서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아 존재 자체만으로 위안이 된다. 속도와 효율을 중요시하는 중심부의 담론으로는 벌써 사라져야 했을 약방이지만 1958년에 개업한 이래 면민들과 동고동락하며 63년간 버티었다. 지금은 제구실을 하고 있지 않지만 치료를 위해 명의를 찾듯 마음의 치유를 위해 외지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칠성면, 이름이 알려주듯 알 수 없는 정기(精氣)가 느껴진다. 괴산에서 살기 좋은 곳으로 연풍면, 청천면과 함께 칠성면을 꼽는다더니 헛소문이 아니었던 게다. 김항묵(1860-1937)은 일찌감치 이 기운을 느꼈던 것인지, 100여 년 전 칠성면을 점찍어 입촌하였다.

김항묵 문중의 괴산 입촌기

묘한 정기는 칠성면 율원리 성산마을에 모인 듯하다. 범눈썹 닮은 뒷동산이 병풍을 이루고 앞에는 너른 들판이 펼쳐진 곳이다. 칠성분지의 끝머리, 들판 너머에는 군자산이 우뚝 솟았다. 동산 아래 40여 집이 모여 있는데 마을 한가운데는 김항묵 고택이 차지하였다.
  
군자산의 기운에 맞서려는지 고택의 대문채 담은 두텁게 쌓았다. 산골 성산마을 한가운데에 만대의 번영을 기원하며 큰집을 지어놓았다.
▲ 김항묵고택 전경 군자산의 기운에 맞서려는지 고택의 대문채 담은 두텁게 쌓았다. 산골 성산마을 한가운데에 만대의 번영을 기원하며 큰집을 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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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는 1800년대 초반에, 사랑채, 중문채, 대문채, 곳간은 1910년 무렵에 지어졌다. 고종 때 참판직의 벼슬을 하던 김항묵이 안채만 있던 조별감의 집을 사들여 마름(지주를 대리하여 소작권을 관리하는 사람)이 사는 마름 집으로 사용하다가 1910년 국권 피탈이 되자 낙향하여 본래 있던 집을 증축, 지금과 같은 규모로 이루었다고 한다(답사여행의 길잡이 충북 편).

안동 김씨 대종회 김항묵 편에 위 내용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나온다.
 
"고종의 신임을 받아 가선대부 시종원 부경(참판급)에 이른 김항묵은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쇠하자 비분강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괴산군 칠성면 성산에 우거하면서 유명한 선비들과 시문으로 자적하였다."
 
김항묵의 행적보다 그가 괴산의 성산마을에까지 오게 된 연유가 더 궁금하다. 안동 김씨 대종회에 김항묵 선조가 괴산에 입촌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안동 김씨 괴산 입향조는 김석(1495-1534)이다. 서울에서 출생한 김석은 조광조의 문하생으로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화를 입자 외가인 의성김씨 집성촌인 괴산군 문광면 문법리로 피신하였다.

김석은 김시민 장군의 아버지 충갑을 비롯해 오남을 두었다. 아들 모두 급제하여 명문가 반열에 올라 대대손손 괴산에 세거하고 있다. 김항묵은 김석의 3자 우갑(1522-1581)의 11세손으로 직계 후손은 주로 소수면 수리(숫골)에 살고 있다. 김항묵이 칠성면에 큰 집을 짓고 낙향하게 된 충분한 근거가 된다. 아무 연고 없이 산골변방에 온 것은 아니었다.

김항묵 고택 마당과 꽃담

고택 안채는 'ㄷ'자 모양으로 제일 안쪽에 자리 잡고 바로 아래 일자형 광채가 있어 안채는 튼 'ㅁ'자를 이루고 있다. 안채 아래 동서쪽에 사랑채와 중문 행랑채가 있으며 그 아래에 바깥마당과 함께 대문채가 차례로 자리 잡아 전체적으로 '읍(邑)'자 모양을 하고 있다.
  
안채는 이집에서 제일 먼저 지어졌다. 안채 앞에 따로 떨어져 광채가 있어 전체적으로 튼 ‘ㅁ’자를 이룬다.
▲ 고택안채 마당 안채는 이집에서 제일 먼저 지어졌다. 안채 앞에 따로 떨어져 광채가 있어 전체적으로 튼 ‘ㅁ’자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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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을대문을 들어와 마주하는 너른 마당이 바깥마당이다. 사진 왼쪽이 가운데마당으로 들어가는 중문이다. 동쪽에 기단을 한 벌 높여 지은 사랑채가 있다.
▲ 고택 바깥마당 솟을대문을 들어와 마주하는 너른 마당이 바깥마당이다. 사진 왼쪽이 가운데마당으로 들어가는 중문이다. 동쪽에 기단을 한 벌 높여 지은 사랑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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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안채, 바깥 행랑채, 중문 행랑채, 광채로 인해 다섯 마당이 생긴다. 대문채의 바깥 마당과 중문과 안채 사이의 가운데 마당 그리고 안채와 사랑채 마당,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샛마당이다. 꽃담에서 돌담, 흙담까지 마당마다 다양한 담으로 구획된 점이 이 집의 특징이다.

먼저 바깥 행랑채를 둘러싸고 있는 'ㄴ'자 화방벽은 두툼하게 꽃담으로 쌓았다. 담 아래는 호박돌에 석회를 섞어 돌담을 쌓고 그 위는 수키와 두 개를 엇갈리게 하여 무늬를 내었는데 태극 무늬로 보인다. 무늬를 무한 반복하여 시각적으로 율동감 있게 연출하였다. 태극문 위에 두 줄 줄무늬를 낸 다음 전벽돌로 테두리를 두르고 그 안은 적벽돌로 채웠다.
  
눈에 잘 띄는 대문채화방벽에 꽃담을 연출하였다. 화방벽의 하이라이트는 태극문으로 보이는 가운데부분이다. 태극문은 음양이 조화를 이뤄 만물이 생성, 변화하고 발전과 번영을 이룬다는 뜻이 담겼다.
▲ 대문채 화방벽꽃담 눈에 잘 띄는 대문채화방벽에 꽃담을 연출하였다. 화방벽의 하이라이트는 태극문으로 보이는 가운데부분이다. 태극문은 음양이 조화를 이뤄 만물이 생성, 변화하고 발전과 번영을 이룬다는 뜻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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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채화방벽이 외부와 차단된 느낌이라면 후원의 흙담은 담 너머 자연과 소통하려는 듯 보인다. 여느 집과 다르게 사랑채 굴뚝이 크고 위압적인 반면 안채굴뚝은 작고 소박한 점 또한 인상적이다.
▲ 안채 후원과 담 대문채화방벽이 외부와 차단된 느낌이라면 후원의 흙담은 담 너머 자연과 소통하려는 듯 보인다. 여느 집과 다르게 사랑채 굴뚝이 크고 위압적인 반면 안채굴뚝은 작고 소박한 점 또한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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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화방담과 아주 대조적인 담은 안채 후원의 흙담이다. 안채 담 너머는 솔숲과 성산으로 이어지는 자연이다. 자연과 경계를 이루는 담을 자연에 가장 가까운 흙으로 쌓은 점이 인상적이다. 집 앞 군자산의 기를 바람 한 점 드나들 틈조차 없는 화방벽으로 누르려 했다면 눈썹같이 부드러운 뒷산에는 숨통을 열어 늘 자연과 호흡하려했다.

이 집에서 가장 사랑스런 공간은 가운데 마당이다. 대문에서 중문을 거쳐 안채로 들어가기 전에 마주하는 완충 공간, 외부와 안채를 이어주는 전이 공간이다. 사랑채가 있는 동쪽 담은 꽃담으로 쌓았다. 이곳은 여자 하인이 거주하는 여성 공간으로 꽃담으로 사랑채와 엄격히 분리했다. 태극문은 생략한 채 바깥화방담 꽃담 양식을 이 담에 그대로 적용하였다.
  
바깥마당과 안채마당의 두 이질적인 공간을 연결하는 전이공간이다. 집주인은 예술성을 발휘해 꽃담을 쌓아 사랑스럽게 꾸몄다.
▲ 가운데마당과 꽃담 바깥마당과 안채마당의 두 이질적인 공간을 연결하는 전이공간이다. 집주인은 예술성을 발휘해 꽃담을 쌓아 사랑스럽게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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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마당에서만 정면으로 보여 마치 이 마당을 위한 합각으로 보인다. 만(卍)자를 연장하여 마치 비단 짜듯이 무늬를 이어나가 삼각형 안을 여백 없이 꽉 채워 장생불사, 다복을 표현했다.
▲ 사랑채 지붕의 합각 가운데마당에서만 정면으로 보여 마치 이 마당을 위한 합각으로 보인다. 만(卍)자를 연장하여 마치 비단 짜듯이 무늬를 이어나가 삼각형 안을 여백 없이 꽉 채워 장생불사, 다복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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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은 예술적 감성으로 안채문 앞에 양귀비와 작약을 심어 꽃밭을 조성하고 동쪽은 시들지 않은 꽃담을 구현해 놓았다. 사랑채 합각의 '만(卍)' 자 무늬 꽃담도 한몫해 이 공간은 사시사철 사랑스러운 공간이 된다. 안채로 들기 전에 이 마당에서 미적 체험을 하고 안주인의 미적 취향과 면모를 미리 살피게 된다.

고택의 상징, 샛마당 꽃담

안채보다 더 깊숙이 있고 아무나 접근 못하는 공간이 샛마당이다. 바로 사랑채 뒤, 안채에 딸린 광채의 후면에 숨어 있는 마당이다. 사랑채 뒷문이나 안채에서는 광채 옆에 숨어있는 문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다. 집안 사람들만 은밀히 오가는 통로요, 비밀 공간이다.

여기에 광채 뒷벽에 새긴 길상무늬 꽃담이 있다. 궁궐의 꽃담에 버금가는 꽃담이다. 오히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변방이니까 가능한, 오래된 마을의 집성촌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꽃담이다. 너무 과하다 싶었는지 사랑채 방문이나 툇마루에서만 감상이 가능하도록 꼭꼭 숨겼다.
  
안채에 딸린 광채 후면에 꽃담을 수놓아 협소하고 후미진 비밀공간을 길상의 기운이 만연한 은유의 공간으로 꾸몄다.
▲ 샛마당 꽃담 안채에 딸린 광채 후면에 꽃담을 수놓아 협소하고 후미진 비밀공간을 길상의 기운이 만연한 은유의 공간으로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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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담의 바탕부터 화사하다. 적벽돌로 테두리를 두르고 그 안은 전벽돌을 채웠다. 동서쪽 사각 안에는 수(壽)와 복(福)자를 단독으로 박았다. 이는 다른 길상 문양 중에서 수복의 의미와 상징성을 더 크게 부각한 것이다. 가운데 꽃담은 땅을 상징하는 사각 안에 하늘과 땅을 잇는 상징물인 팔각 두 개를 삽입, 기본 틀을 형성하였다. 팔각 사이에 회문(回紋)으로 아자문(亞字紋)을, 네 개의 모서리에는 박쥐와 당초 모양을 대각선으로 마주 보게 넣었다.

회문은 단독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주된 문양의 종속 문양으로 사용되어 이 꽃담 무늬의 중요 부위는 팔각 안에 새겨진 '팔각수(八角壽)' 자에 있다 하겠다. 수복문의 원래 모양을 재구성하여 조형성을 높였다. 이는 꽃담의 상징성에 벗어나 아름다움까지 추구한 것이다. 사각→박쥐, 당초문양→팔각→회문→팔각→수자 무늬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여백은 가급적 없애 질서정연한 소세계에 길상의 염원을 빼곡히 담아 놓았다.
   
팔각 안에 수자를 새겨 오복 중에 으뜸은 뭐니 해도 수(壽)임을 강조했다. 대개 하늘을 상징하는 원(圓) 안에 수를 새기는 원수자(圓壽字)가 많으나 보은 법주사 꽃담처럼 팔각수를 사용하였다.
▲ 샛마당 꽃담 팔각 안에 수자를 새겨 오복 중에 으뜸은 뭐니 해도 수(壽)임을 강조했다. 대개 하늘을 상징하는 원(圓) 안에 수를 새기는 원수자(圓壽字)가 많으나 보은 법주사 꽃담처럼 팔각수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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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주인은 이웃의 눈치를 보지 않고 거리낌 없이 대문채와 가운데 마당, 샛마당에 꽃담을 쌓아 온 집안을 길상의 기운이 만연한 은유의 공간, 상징 세계로 만들었다. 산골마을 변방에서 대대손손 가문의 번영을 기원하고 영세 세거지의 의지를 집안 곳곳에 펼쳐놓은 것이다.

태그:#김항묵 고택, #꽃담, #민가꽃담, #꽃담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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