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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좋아한다. 언제부터인가 하면, 어렸을 적 TV로 시청하던 <명화극장>부터다. 내 연배(60년대 생)가 영화를 취미로 삼았다면 시작은 보통 이렇게 했을 것이다. 이후 영화 보기가 상영관을 찾는 식의 취미로 자리 잡았는가는 개인의 형편에 좌우되었을 것이다. 취향은 취미 이후의 문제일 것이고.

어렸을 적 <명화극장>으로 보던 영화의 대부분은 남자 영화였다. 남자들이 대거 등장하는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서부영화라 불리던 총잡이 영화가 안방극장의 대세였는데, '석양의 무법자'는 수십 번도 보았을 것이다. 이제는 그리 많이 봤던 그 영화의 장면들도 가물가물하지만, 당시엔 총잡이가 멋있다는 환상을 가졌었다.

지금은 당시 즐겨보던, 죽이고 죽던 서부영화 류를 좋아할 수 없지만, 얼마 전 상영됐던 <파워 오브 도그>같은 서부영화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서부영화는 '가오' 세우는 총잡이가 아니라, 남편 잃은 여자와 그 아들의 삶을 비추었다. 서부에 카우보이만 살았을 리 없지 않은가.

나는 이 영화에서 신산한 팔자를 지닌 모자에게 강하게 이입했지만, 다른 이입도 있을 것이다. 카우보이나, '과부'에게 순애보를 바치는 남자에게 동일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차이 나는 이입 또는 동일시가 각자가 처한 입장 혹은 위치성을 드러낸다. 

이렇게 시작하니 본격적으로 영화 <파워 오브 도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나 보나 짐작하겠지만 아니다. 나는 이 영화를 두 번 보았지만 아직 말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럼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냐, 책 얘기를 하려고 한다. 평화 연구자 정희진이 쓴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에 관해서다.
 
평화 연구자 정희진이 쓴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평화 연구자 정희진이 쓴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 교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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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호가인 정희진은 앞서도 영화에 관한 책 <혼자서 본 영화>를 썼다. 이 책을 읽은 어느 독자가 "영화 이야기인 줄 알고 샀는데, 읽다 보니 글쓰기에 관한 책이었어요"라고 했다는 것처럼, 영화를 모르더라도 상관없이 읽을 수 있는 독특하고 지적인 책이다.

보통 영화에 관한 책이라면, 영화를 세세히 다루며 평하던가(이런 경우 영화를 보지 않았으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영화의 미학을 전문적으로 다루든가 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 책은 다르다.
 
"나는 영화를 볼 때 특정 부분에 깊게 '꽂힌다'. 그리고 그 이유와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그 '꽂힌' 부분을 통해 나 자신을 알 수 있고, 그 부분에 나의 세계관이 압축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의 말대로 그가 '꽃힌' 부분에 자신의 세계관을 당사자성으로 개입시켜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맥락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영화를 쓰는 사람은 정희진밖에 없다.

예를 들어, 우주 공간에서 표류하는 영화 <그래비티>를 우울에 관한 영화라거나, 히틀러 치하에서 반란을 도모한 영화 <작전명 발키리>를 정상 국가성으로 표상되어야 하는 장애인의 몸 또는 부상당한 몸에 관한 영화라고, 그는 평한다. 한 장면에 꽂혀 그 장면으로 "'전체'를 해석하고 '확장'"하는 그의 방식은 낯설지만, 매우 효과적으로 영화를 보는 당사자성을 각인시킨다.

자신의 몸이 처한 개별성으로 자신의 입장에서 영화를 말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평가할 객관적 대상으로 두지 않고 자신의 몸으로 영화를 겪고 그 '부분적 관점'을 제시한다. "부분적 관점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배적인 객관성 개념에 나의 목소리를 보내고 조율하고 틈새를 내는,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중요한 실천이다."

책을 읽으면 명징해진다. 아, 이 사람은 이런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있구나. 그는 자신의 '부분적 관점'으로 왜 이 영화를 이렇게 보는지 이야기의 맥락을 확보한다. 자기 이야기만큼 힘이 센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눈치를 보며 주류가 듣고 싶어 하는 말들을 골라내 쓴 글은 넘치지만(그러느라 내 생각 내 입장은 사라지고 없다), 주류에 질문하거나 도전함으로써 자기 입장을 선명히 드러내는 글은 드물다. "똑같은 목소리, 부담스럽지 않은 이야기 말고는 위험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수가 정의라 믿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이나 약자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 부정의와 불평등, 발전 지상주의를 비판하려면 큰 각오를 해야 한다. 미움 받을 용기 정도는 약과다.

그렇기에 그는 "필자의 사고방식을 독자가 파악할 수 있도록 쓰인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 당사자가 아니어도 당사자성을 가지고 자신의 입장을 표출하는 것이 좋은 글이라고 믿는다. 이런 "글쓰기는 인간을 정직하게 보는 윤리의식과 정의감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다."

책에 소개된 많은 영화 독후감 모두 뼈를 때리지만, 그중 나는 이길보라 감독의 다큐멘터리 <기억의 전쟁> 편이 특히 그랬다. 이 영화는 베트남 전에 참전했던 한국군이 벌인 학살과 전시 성폭행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나도 이 영화를 인상 깊게 보았는데 안타깝게도 많은 관객을 모으지는 못했다.

나는 이 영화보다 그가 앞서 만든 영화 <반짝이는 박수소리>를 시작으로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이 영화에서 농인 부모와 이들의 자식인 자신과 동생의 이야기를 '부분적 관점'으로 제시했다.

이길보라 감독은 <기억의 전쟁>에서 베트남 전에 참전했던 한국군의 학살로 피해를 입은 마을의 주민들을 만나 인터뷰한 장면들과 학살을 부정하는 참전 용사들의 면모를 동시에 드러냈다. 나는 이 영화의 한 농인 증인이 인상 깊었는데, 정희진은 다른 증인에 '꽂혔'고 그 이유를 사회 정치학으로 확장시켰다.

그는 자신이 꽂힌 그 장면을 통해 '피해를 말하기'가 청중이 원하는 바를 말하는 방식으로 고착되어서도, 단일한 이야기로 독점되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단일한 피해의 서사가 고정되어 힘을 얻으면 다른 피해나 담론은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획일화된 하나의 피해 서사만 존재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될 리 만무하다. 피해를 말하고 은폐된 진실을 밝히려는 "저항은 우리 자신의 변화와 성장을 위한 것이지, 피해자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을 읽고서야 나는 왜 농인 증인의 증언에 '꽂혔는지', 알 수 있었다. 네가 듣고 싶은 말을 그가 해 주지 않았느냐고, 내리치는 죽비가 일갈했다.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는 이 밖에도 많은 영화를 다룬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와 인류가 더 나은 공동체가 되기 위해 어떤 위치에서 누구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판단해야 하는지를 탈식민지, 생태주의, 페미니즘 관점으로 제시한다.

이런 관점은 "말하는 사람(주체)과 규정되는 대상(텍스트. 영화...) 간의 관계에서, 주체의 일방성을 성찰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입장을 선명히 하려는 노력, 나는 누구의 관점으로 어느 위치에서 영화를 바라보고 있는가, 또는 바라봐야 하는가가 영화를 대하는 자세여야 한다고, 그는 믿는다.

책은 좀 오래된 영화부터 최근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까지, 많은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영화의 수많은 인물들을 통해 우리는 내 삶을 통과했으나 잊었던 사람과 사건을 조우하게 되고, 결국 그 사람과 사건에 연루되었던 자신을 만나게 된다. 영화를 보지 않고도 영화를 얘기하는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책을 통해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 속해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는 감각이 새순처럼 자라난다면,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자. '꽃힌' 그 장면에 있던 나의 이야기를.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게시


태그:#<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정희진, #부분적 관점, #탈식민지, #몸의 개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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