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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천천히 읽어야 할 책이 있다. 성공회대 조효제 교수의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 지난 3월 나온 이 책을 두 군데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었다. 첫 모임에서는 절반 정도 밖에 읽지 못했고, 지난 7월 두 번째 모임에 가서야 다 읽을 수 있었다.

평소 메모를 하며 천천히 책을 읽는 습관이 몸에 밴 탓이긴 하나 이 책은 한 장 한 장을 좀 더 천천히 넘겨야 했다. 한 달 만에 이 책을 다시 펼쳐보는 이유는 500년 만의 가뭄으로 말라붙은 다뉴브 강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나치 군함의 잔해, 115년 만의 폭우가 쏟아진 지난 9일 새벽 서울 신림동 반지하 주택에서 목숨을 잃은 가족 3명의 죽음 때문이다.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 겉표지.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 겉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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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10여 년 전 기후위기가 인권의 최대 위협이라는 유엔의 발표를 듣고 이 분야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고민 끝에 2020년 말 <탄소 사회의 종말>이 나왔고, 이어서 펴낸 책이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다. 두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기후변화의 인간화", "사회학적 상상력으로 인권과 환경을 엮어보는 스토리텔링"이다.

기후위기가 자연과학적으로 '팩트'인 것은 분명하지만, 자연과학의 논리만으로 인간 사회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기후변화의 인간화'가 작동된다. 기후위기를 엘리트 과학자나 전문가의 논리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관점에서 제시하고 설명"할 때, 일반 대중들은 더 공감하고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다.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를 천천히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사회-생태 전환을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 하나하나에 대해 독자들 스스로 '사회학적 상상력'이라는 날개를 달아보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부터 기후위기와 인권의 문제를 연구해온 저자의 시각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터이지만, 내 나름대로 이 책을 많은 이들에게 추천하는 이유를 꼽아본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저자는 이 책에서 "인권과 환경을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 문제로 보는" 관점, 인권과 환경 사이에 칸막이가 존재해 온 현상을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가치에는 익숙하나, 생태와 환경의 문제는 부차적 문제로 보거나 인권과는 별개의 영역에서 논의해온 것이 사실이다. 얼마 전 쓴 글에서 내가 "최근까지도 '기후위기'는 잘 다가오지 않는 문제"였음을 고백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첨예한 인권쟁점이 된 차별금지, 혐오표현, 젠더 평등과 동일한 선상에서 환경문제가 '인권' 이슈로 인식되고 있는가?"라는 저자의 질문은 인권운동 영역에서 곰곰이 되새겨 보아야 할 문제이다. "기후·생태위기가 한쪽에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불평등, 인권박탈과 같은 사회적 문제가 함께 커지고 있다"는 사실, "에코사이드는 단순한 환경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문제의식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등장하여 최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기후소송은 이제 우리들에게도 낯선 사건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인권, 환경운동가들은 물론이고 장차 기후소송을 다루어야 할 법률가들이 꼼꼼히 읽어보아야 할 필독서이다.

둘째, 이 책은 에코사이드와 기후위기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설명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이기도 한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무차별적 고엽제 살포행위가 '생태 학살'이라는 '에코사이드' 개념을 낳았다는 사실, 최근의 기후변화를 보여주는 전 지구적인 이상 기후 현상과 에코사이드로 처벌되어야 하는 생태계 파괴 사례들, 인류세 시대의 새로운 권리로 논의되는 '자연의 권리' 개념은 그 자체로 개별적인 공부 대상이 될 수 있는 주제들이다.

저자는 기후위기의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탄소중립'과 같은 대책만으로는 부족하고, '성장의 한계'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성장을 지속하는 한 에너지를 아무리 효율적으로 쓰더라도 자원 소비를 절대적으로 줄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지속불가능한 성장주의-소비주의를 연착륙" 시킬 다양한 대안들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이 책은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가혹한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115년만의 폭우로 순식간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들이 반지하 주택에 거주하는 발달장애인 가족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떤 일로 피해를 당한 사람을 그 피해를 발생시켰던 기존의 불평등 구조 속으로 다시 회복시키는 것은 진정한 정의가 아니라는 '변혁적 정의'(transformative justice) 개념은 최근 폭우로 발생한 반지하 주택 침수 피해 대책과도 관련이 있다.

침수 피해자들의 주택을 원상 복구하는 비용을 지원하거나, 피해자들에게 일시적 주거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최근 곽재식의 책 <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었다.
 
"매년 여름 비가 많이 오면 흙탕물이 역류해서 집안으로 쏟아지는 반지하 집들이 있고, 앞으로 기후변화 때문에 비가 더 많이 올 거라고 모든 사람이 예상하고 있으며, 심지어 정부기관 스스로도 같은 예측을 발표하는데, 정부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되는가?"
 
최근 발생한 비극을 예견이라도 한 듯 곽재식은 "내일의 종말이 아닌 오늘의 반지하 침수를 걱정할 때 달라지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아마도 기후위기와 관련하여 요구되는 '사회학적 상상력'은 바로 이와 같은 질문들을 수 없이 던져보는 데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조효제 교수는 최근에 있었던 어느 북토크 행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은 착한 사람의 조바심 덕분에 천천히 변합니다. 절대로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좋은 일은 시간이 걸리거든요." 이 말은 바로 이 책을 읽는 방법에 대한 도움말이기도 하다.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 이 책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야 할 책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대전충남인권연대 뉴스레터에도 실립니다.


태그:#조효제,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 #기휘위기, #대전충남인권연대, #사회학적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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