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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기도 파주 교하신도시에 살고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운정신도시 교하지구. 원래는 그냥 교하신도시였는데, 운정 지역의 개발 구역이 넓어지며 최근 운정신도시로 편입됐다.

몇 달 전, 우연히 운정신도시 일부 주민들이 교하신도시가 운정에 편입되는 걸 반대했다는 얘길 들었다. 정확한 사실 확인은 해 보지 않았지만, 거기 사는 사람에게 전해 들은 얘기니, 아예 없던 말은 아닌 것 같다. 반대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집 값 차이?

'구축'이라는 프레임
 
숲과 공원, 도서관은 모두 길이 연결되어 있어, 어디에서 출발하든 원하는 장소에 닿을 수 있다.
 숲과 공원, 도서관은 모두 길이 연결되어 있어, 어디에서 출발하든 원하는 장소에 닿을 수 있다.
ⓒ 신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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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하신도시는 파주시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신도시다. 가장 먼저 조성된 신도시답게 파주 신도시 중 연식이 제일 오래됐다. 2005년과 2006년 사이에 지어진 아파트들과 전원주택, 타운하우스, 빌라들이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는, 도시보단 '동네'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작은 마을이다.

우리 가족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지어진 지 이제 겨우 16년 되었지만, 대한민국에선 15년만 넘으면 모두 구축아파트로 분류된다. 신축아파트라는 말은 너무 많이 들어서 익숙한데, 구축아파트라는 말은 작년에 우연히 인터넷 기사를 보고 알았다. 그때 본 뉴스 기사의 제목은 이랬다.

'GTX까지 뚫리는데 5억이 안 된다고? 이런 아파트, 이곳에 있습니다" 이 기사의 주요 내용은 주변 신축아파트들보다, 새로 생기는 전철역과 거리상 더 가깝지만, 구축아파트가 많기에 다른 지역보다 부동산 시세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이었다.

기사에서 의문형 문장까지 사용하며 놀랍게 싸다고 소개한 '이곳'이 내가 사는 우리 동네다. 5억이 싼 축에 속한다는 현실에 경악하고, 신축이 들어서니 금방 구축으로 분류되는 게 씁쓸했다.

'구축'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우리 동네를 보니 좀 튀긴 한다. 대체로 조용한 마을인 이곳이 이렇게 튀게 된 이유는 파주의 신도시 확장 때문이다. 교하지구 주변으로 유명 건설사 신축 브랜드 아파트들이 지어졌고, 지금도 열심히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원래 파주에는 군부대가 많아 고층건물을 짓지 못했다. 그래서 교하신도시에 있는 아파트들은 모두 15층 이하로 지어졌다. 그러나 높이에 대한 규제가 몇 년 전 없어진 뒤로는 주로 25층~29층의 고층아파트들이 세워지고 있다.

높은 아파트들이 대규모 단지를 이루어 지어진 모습은 마치 거대한 장벽을 연상케 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시야를 가리는 것 없이 멀리까지 보이던 풍경들을 이제 더는 볼 수 없다니, 뭔가 소중한 걸 잃은 기분이다.

그런데 풍경은 그렇다 치고, 아파트 매매가로 동네를 나누고 싸구려 취급하는 건 그저 소중한 걸 잃은 기분이 드는 정도가 아니라 아무 잘못 없이 모욕을 당한 기분이다. 집과 동네를 사람이 '사는(living) 곳'으로 보지 않고, 오직 '사는(buying) 상품'으로 보는 태도들이 한심하면서도, 나 역시 몇 년 뒤에는 신축아파트로 이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으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오래지 않아 사라진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면, 복잡하던 생각들이 금방 단순하게 정리된다.

프레임에서 벗어나면 보이는 것들

숲속길마을, 책향기로(도로명 주소). 우리 동네 이름이다. 이름답게 각각의 아파트단지에는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 있고, 마을의 중심에 도서관이 있다. 숲의 오른편엔 여러 나라의 정원을 재현한 공원이 있는데, 조성된 지 15년 이상 된 공원답게 제법 운치가 있다.

숲과 공원, 도서관은 모두 길이 연결되어 있어, 어디에서 출발하든 원하는 장소에 닿을 수 있다. 직장을 다닐 땐, 동네에 살고 있지만, 막상 동네에 대해 구석구석 알진 못했다. 인사하며 지내는 이웃도 거의 없었다. 아침 일찍 서울로 떠났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오고, 주말엔 아이를 데리고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느라 느긋하게 동네를 알아가며, 즐기지 못했다.

직장을 그만둔 뒤부턴 매일같이 동네를 어슬렁거린다. 대낮에 별일 없이 동네를 걷는 일이 생각보다 좋다. 적성에 맞는다. 특히, 벚꽃이 피고 지던 봄엔 그저 걷기만 했는데도 행복지수가 마구 상승하는 호강을 누렸다. 더운 여름엔 밤 산책이 좋다.
 
교하지구 중앙공원 분수
 교하지구 중앙공원 분수
ⓒ 신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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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동네는 낮보다 밤이 한결 활기가 넘친다.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사람, 조깅하는 사람, 유아차를 끄는 젊은 부부, 자전거를 타는 노부부 등 많은 사람이 밤의 동네를 즐긴다. 또 하나 여름에만 만날 수 있는 우리 동네의 매력 포인트가 있는데, 그건 바로 분수다.

공원에는 이국적인 모양의 분수가 무려 5개나 있는데 오직 여름에만 가동된다.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벤치에 앉아 시원하게 쏟아지는 분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뉴욕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가 부럽지 않다(물론 센트럴 파크에도 가고 싶지만). 가을은 뭐 그냥 걷는 길이 다 예술이다. 몇 발자국 옮길 때마다 감탄이 쏟아진다. 겨울의 하이라이트는 함박눈이 내리는 날 공원에서 타는 썰매다.

남아도는 게 시간밖에 없는 요즘은 도서관 프로그램에도 자주 참여한다. 주로 책이나 글쓰기와 관련된 교육들인데, 생각보다 강의 내용이 알차고 수준도 높다. 이런 강의들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지. 직장을 다닐 땐 몰랐던 동네에서 사는 재미를 새록새록 경험하고 있다.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삽니다
 
이 길을 가을에 걸으면... 걷는 길이 다 예술이다. 몇 발자국 옮길 때마다 감탄이 쏟아진다.
 이 길을 가을에 걸으면... 걷는 길이 다 예술이다. 몇 발자국 옮길 때마다 감탄이 쏟아진다.
ⓒ 신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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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만족하며 살고 있는데 사람들은 너무 당연한 듯 말한다. 더 늦기 전에 신축으로 점프해야지. 아이 있는 집은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가 최고야. 아직도 지상에 자동차가 다니네? 아이를 위해서라도 안전한 새 아파트로 이사해야지. 아이를 위해서.

과연 그럴까. 굴곡 하나 없고, 매끈한 환경에서만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는 걸까. 울퉁불퉁한 길도 걸어보고, 6차선 도로도 혼자 건너봐야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5분 거리에 공원과 숲, 도서관이 있는 동네에 사는 것이 초품아 신축브랜드아파트에 사는 것보다 더 좋은 나 같은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아파트는 더 많아질 것이다. 비현실적으로 오른 집값으로 서울에서 대책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탈서울 하며 경기도 인구가 늘어나고 있고, 파주도 예외는 아니다. 분명한 건 신축도 언젠가 구축이 된다는 것, 고급 아파트에 산다고 그 속에 사는 사람이 자동으로 고급 인간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 

설거지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해가 물러나 더위가 한풀 꺾인 저녁의 동네는 걷기에 딱 좋다. 전원주택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과 마을 가운데 터줏대감처럼 자리하고 있는 오래된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발걸음을 경쾌하게 한다. 나오길 잘했다.

뭐든 돈으로 가치를 매기기 좋아하는 세상에서, 돈을 내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행복 지점이 많은 우리 동네가 더욱 특별하다. 정말이지 유독 튄다. 나는 호호 할머니가 되어서도 교하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싶고, 공원 벤치에 앉아 시원하게 쏟아지는 분수를 보고 싶다. 맞다. 나는 지금 살고 싶은 마을에서 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 본문 기사인용: “GTX까지 뚫리는데, 5억이 안 된다고? 이런 아파트, 이곳에 있습니다.” https://www.wikitree.co.kr/articles/681912
* 개인 브런치에도 게시된 글 입니다.


태그:#마을, #구축아파트, #교하신도시, #파주, #우리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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