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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달토끼 일력
 2023년 달토끼 일력
ⓒ 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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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은 토끼해다. 날카로운 발톱도 치명적인 독도 가지지 못한 토끼. 그저 큰 귀를 가지고 있을 뿐. 공격보단 방어를 위한 장치다. 가만히 앉아 공기의 흐름을 듣다, 이상한 기류가 포착되면 겅중겅중 달아나버린다.

2023년은 아마 내게 그런 해가 되지 않을까. 취업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나날들을 잠시 멈추고, 그저 앉아 흐름에 귀 기울이는. 그래서 장만했다. 2023 달토끼 일력.

새롭게 돌아온 일력
 
하루 한 문장. 영어공부를 가볍게 하기에도 좋은 영어교재형 일력.
 하루 한 문장. 영어공부를 가볍게 하기에도 좋은 영어교재형 일력.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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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력의 존재를 안 건 올해 여름이었다. 친구 한 명이 SNS에 매일 일력에 코멘트를 달아 올렸다. 재밌는 건 날짜 밑에 쓰인 철학적 문제들이었다. 고장난 기차가 달리는 선로 위 왼쪽은 5명의 사람이, 오른쪽 선로엔 1명이 있다면 난 어떤 선로를 선택해야 하는가? 등의 유명한 '트롤리 딜레마'부터, 예술가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가? 등의 물음이었다.

매일 날짜가 바뀔 때마다 철학적 물음과 친구의 견해를 SNS로 보는 것이 제법 재밌었다. 나 말고도 많은 친구들이 그에게 물어본 듯했다. 그런 일력은 어디서 사냐고. 우리에게 일력은 세련된 복고 아이템이자 자기계발의 도구, 또는 SNS 소통 주제의 아이템으로 자리잡았다. 서점가에도 일력형 도서가 단연 인기다. 
 
일력
 일력
ⓒ 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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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일력은 생소하다. 달력이 숲이라면, 일력은 나무다. 뭉뚱그려 놓은 날들을 잘게 한 장 한 장 쪼개 표시해 놓은 것이다. 때문에 제법 두껍다. 최소 365일이니 365장이 필요하다.

내 것은 월 표지와 출처 표기까지 합하면 약 381장 정도 되는 듯하다. 두께가 보통이 아니니 고정 나사로 고정되어 있다. 부드러운 종이를 엮은 서늘한 쇠기둥의 조합이 꽤나 신선하다. 디지털 시대에 유행하는 일력의 아이러니한 조화처럼.

일력은 하루를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매 기념일마다 다른 문장이 써 있다. 5월 1일 근로자의 날에는 '크고 작기를 가릴 것 없이 스스로 갖은 힘을 다해 먹고 산다는 점에서 모든 일은 똑같다. - 심대윤 <소반을 만들며>',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어려서는 습관이 본성처럼 되게 하고 성장하면 이끌기만 하라. - <안씨가훈>' 등이 써 있다.

계절의 흐름도 담고 있다. 연초에는 다짐이나 도전을 응원하는 글이 많다면, 한여름인 7월은 '푸른 나무 짙은 그늘 아래 여름 해가 긴데, 높고 낮은 처마 그림자가 선방으로 들어오네. - 김시습 <매공의 방에 쓰다>' 라는 문장이 가슴을 더욱 시원하게 만든다.

한 해를 정리하는 연말이 되면 '사는 것이 소중한 일 못 된다면, 늙는 것이 어찌 슬퍼할 일이랴. 사는 것이 정녕 소중한 일이라면, 늙음은 곧 그만큼 오래 살았음일세. - 백거이 <거울 보고 늙음이 기뻐서>'라며 날 위로해준다. 일력은 1년을 함께 하는 페이스메이커다.

엄빠에겐 일력은 실용 그 자체
 
일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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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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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당당하게 일력을 올려놓았다. 집에 놀러 온 아버지가 보고 반가워한다. 갑자기 자기 추억담을 늘어 놓는다. 어릴 때 화장실을 가고 싶은데 휴지가 없을 때, 꼭 할머니가 급한 대로 찢어준 것이 일력이었단다.

엄마도 옆에서 거든다. 이삿날이 되면 꼭 일력을 찢어서 그릇을 감쌌단다. 그 속에 할머니가 써 놓은 메모가 있는데, 대부분 외상 내역이었단다. 이런. 휴지에, 장부에. 내게 일력은 세련된 인테리어 소품인데, 엄마아빠에겐 그야말로 실생활의 한 쪼가리다.

'2023년 1월 1일이 되면 근사한 명언으로 일력을 시작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며칠 뒤 일력을 뒤집어보니 처음 보는 메모가 있다. '근로자 햇살론 뱅크 1330' 이런! 엄마가 대출 상담을 받다가 내 일력을 메모장으로 써버렸다. 역시 엄마에게 이것은 멋도, 장식도 아닌 실용품 그 자체다.

그 밑에 달토끼의 문장이 압권이다. '혼자라 무서울 때면 지구에서 전해오는 문장들을 생각해. 우주는 넓고 고요하니 작고 푸른 별의 이야기를 들려줘.' 토끼에게 들려줄 첫 이야기가 대출이라니. 어쩐지 웃음이 나온다.

2023년 새해를 맞이해 멋들어진 문장을 쓰려던 내 첫 메모는 '근로자 햇살론 뱅크 1330'이 되어버렸다. 하긴, 신줏단지 모시듯 아끼면 뭐하나. 어차피 챕터는 또 넘어가는데. 기쁜 하루도, 슬픈 하루도, 심심한 하루도 휴지로 써버리면 그만이다. 아끼지 말자. 하루를 아끼지 말자.

태그:#일력, #민음사, #토끼해,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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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정누리입니다. snflsnfl8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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