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12 11:25최종 업데이트 23.05.12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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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구민사 경내에 있는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상 ⓒ 박용규

 
동학농민군과 녹두장군 전봉준의 캐치 프레이즈는 반외세·반봉건이었다. 반봉건·반외세로 불리지 않고 반외세·반봉건으로 불리는 것은 이들의 투쟁 양상과 잘 맞는다.

동학혁명군이 주로 싸운 대상은 봉건체제가 아니라 외세였고, 이들이 도중에 타협한 대상은 외세가 아니라 봉건체제였다. 조선왕조 봉건체제와는 타협했어도 외세에 대해서는 끝까지 저항했던 것이다. 동학의 주적이 누구였는지는 이런 데서도 증명된다.


그래서 이들은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독립유공자법)'에 따른 예우 대상으로 적합하다. 독립유공자법 제1조는 "일제로부터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공헌한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에게 합당한 예우를" 하는 것이 법의 취지라고 선언한다.

동학군이 직접 부딪힌 외세는 청나라나 서양열강이 아니었다. 이들이 맞서 싸운 대상은 일본제국주의였다. 단순히 일본군대만 막으려 한 게 아니라 제국주의적 경제침략도 막으려 했다. "일제로부터 조국의 자주독립을" 군사적·경제적 측면에서 획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점을 봐도 동학군과 그 후손들을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으로 예우하는 것은 지당하다.

유사 이래 최대 병력으로 일본과 싸워 

5월 11일은 정부가 지정한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다. 보도에 따르면, 기념일 전날인 지난 10일 전북 전주 동학혁명기념관이 전봉준·김개남·손화중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국가보훈처에 또다시 신청했다. 129년 전인 1894년에 동학군이 항일투쟁을 개시한 사실을 감안하면 한참 뒤늦은 감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도 거듭거듭 신청해야 할 정도로 보훈처의 문턱은 한없이 높기만 하다.

동학군에 대한 예우를 격상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학술적 지지도 받고 있다. 2021년에 <역사학연구> 제84집에 수록된 유바다 고려대 교수의 논문 '동학농민군의 명예회복과 예우에 대한 법률적 검토'는 "동학농민혁명은 이미 2004년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통하여 '1894년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임을 국가적으로 공인받았다"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독립유공자로 간주해야 한다"고 논문은 강조한다.

2021년 7월 21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한 '반일항쟁을 지향한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와 농민군 서훈' 학술대회에 참가한 학자들도 똑같은 목소리를 냈다. 보도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예우 방안'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김양식 청주대 교수는 1895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활동한 인물들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는 현실을 거론하면서 "동학농민혁명은 1895년 직전에 일어났으므로 충분히 심사 대상에 들어갈 수 있다"는 관점을 밝혔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의 반일항쟁 성격'이라는 발표에서 "동학농민군은 일제의 침략행위를 강토 침략으로 인식하고 대적했다"며 "항일투쟁의 가치가 있다"고 평했다. '동학농민군 독립유공자 서훈의 정당성'을 발표한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는 고종이 일본군에 억압됐던 상황을 거론하면서 "국왕이 일제에 포로로 인신이 구속되는 등 1894년은 이미 국권이 탈취된 상태"라고 한 뒤 "동학농민군은 일본 세력의 축출을 목표로 전국에서 봉기했다"고 설명했다.

'역사교과서의 동학농민혁명 서술 검토'을 발표한 유바다 교수는 교과서에서 동학군을 반외세 투쟁세력으로 가르치고 있으므로 이들에 대한 유공자 서훈이 어려울 게 없다고 언급했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9종 전체를 살펴보면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반외세·반침략·항일구국투쟁 등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게 그의 검토 결과다. 학자들의 주장에 논리적 흠결이 없다는 점은 서훈의 당위성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동학군은 처음에는 조선왕조 정부군과 대결했다. 여기서 정부군을 압도했다. 이들이 호남 곡창지대 중심지인 전주성을 함락한 것과, 당황한 고종이 청나라에 파병을 구한 것 등은 조선 내에서는 이들의 맞수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고종이 초청한 것은 청나라 군대였는데 엉뚱하게 일본군이 덩달아 들어왔다. 고종이 '러브샷'을 해준 일이 없는데도 일본군은 한반도 유사시를 명분으로 자국민 보호를 표방하면서 밀고 들어왔다. 실질적인 침략이었다.

불청객이 들어오자 동학군은 정부군과 타협하고 전주성을 비워줬다. 결과적으로 패착이 됐지만, 이 선택은 동학군이 반외세라는 목표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증명한다. 세계사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외세보다 반봉건이 더 절실한 과제였겠지만, 봉건 군대보다 일본 군대가 더 무서운 당시의 현실 속에서 이들은 반외세를 우선시했다.

그런 동학군이 일본군과 정면 대결할 당시인 1894년 하반기에 이들의 병력은 약 20만 명이었다. 항일투쟁사에서 이만한 병력을 갖고 일제에 맞선 세력은 없었다. 항일 명장인 김원봉과 김좌진·홍범도의 부대도 그 정도 규모를 갖추지 못했다. 임진왜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한 병력이 단일 지휘체계하에 모이지는 못했다.

비록 화력에 밀려 일본군에 패하기는 했지만, 동학군처럼 대규모로 일제에 맞선 세력은 한국 근현대사에 없었다. 승패 여하를 떠나 이 정도의 항일투사들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지 않을 합당한 이유는 없을 것이다.

독립운동의 기점이 을미의병?

동학군의 독립유공자 지정을 가로막는 제도적 장애물이 있다. 조만간 국가보훈부로 승격될 국가보훈처의 내규다. 보훈처 내규는 동학군이 진압된 지 얼마 안 돼 궐기한 1895년 을미의병부터 독립유공자로 서훈한다는 방침을 담고 있다. 11일자 보도에 따르면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은 "국가보훈처 공적심사 내규의 '독립운동의 기점은 을미의병이다'로 정해놓은 것을 '독립운동의 기점은 동학의병이다'로 다시 정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1895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발발한 을미의병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이를 항일투쟁의 출발점으로 정한 보훈처 내규는 역사적 맥락을 도외시한 것이다.

일본은 1875년에 강화도 앞바다에서 함포 사격을 가해 조선을 굴복시켰다. 이듬해에는 강화도조약(한일수호조규)이라는 불평등조약을 강요해 조선시장을 개방시키고, 이를 발판으로 조선을 일본 경제의 하부 구조로 전락시켰다. 그런 상태에서 농민군 궐기를 빌미로 1894년 조선에 들어와 청나라군과 동학군을 연달아 제압하고 조선 국정을 장악했다.

그 뒤 고종이 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하자 1895년에 일본이 저지른 만행이 명성황후(민비) 시해다. 고종을 겁박하고자 벌인 이 사건 때문에 일어난 것이 을미의병이다.

그런 다음,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아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으로 인해 1896년부터 2년간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균형이 조성됐다가 1898년에 러시아가 조선을 포기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은 다시 일본의 단독 수중에 들어갔다가 이 상태에서 일본이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승리의 여세를 몰아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을 강제하는 일이 이어졌다.

이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도 나타나듯이, 을미의병을 독립운동의 출발점으로 설정할 합리적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동학군과 일본군의 충돌이라는 초대형 사건이 을미의병 직전에 있었다. 동학군을 놔두고 그 직후의 을미의병을 출발점으로 인정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을미의병의 주체는 양반 지주계급인 반면, 동학농민혁명의 주체는 당시의 가장 평균적 대중인 농민들이었다. 그동안 동학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막아온 것은 이들을 물리친 세력이 1945년까지 한국을 지배했고 이들이 일제에 맞선 최대 세력이었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이는 구한말과 일제하에서 동학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동시에, 주로 소작농인 이들에 대한 한국인 기득권층의 반감과 동학에 대한 왜곡된 평가와 무관치 않다. 일본군이 동학군을 진압할 때 일부 조선인 지주들은 민병대를 구성해 일본군 편에 가세했다.

이 같은 구한말판 극우세력의 태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한말 및 일제강점기의 한국인 기득권층도 동학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저해했다. 동학혁명 혹은 동학운동이 동학난으로 폄하된 데는 이런 요인도 컸다. 동학의 항일운동이 동학난으로 폄훼됐으니, 동학군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국가보훈처와 박민식 처장은 이승만 띄우기에 여념이 없다. 임시정부에 의해 탄핵된 이승만을 흠결없는 독립운동가로 포장하는 데 열의를 쏟아붓고 있다. 지금 보훈처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그런 것이 아니다. 동학혁명을 빼놓고 그 직후의 을미의병을 항일투쟁 출발점으로 간주하는 잘못된 내규부터 바꿔야 한다.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의 기원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 독립유공자 서훈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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