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13 07:14최종 업데이트 24.03.18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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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25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차이나타운 대림중앙시장의 모습. ⓒ 이희훈


지난 기사에서는 호칭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우리의 차별의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속칭 '국뽕'과 오리엔탈리즘에 근거한 우리의 외국인 배타의식을 이야기해 보자. 다시 구로지역 택배의 기억을 소환해 본다. 구로동과 가리봉동 일대는 2000년대 초까지도 수출을 목적으로 설계된 구로공단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세계경제와 한국경제 구조의 변화와 맞물려 2000년대부터 새로운 디지털산업의 중심지로 빠르게 탈바꿈해 갔다.

당연히 그곳에 거주하고 드나드는 사람들도 변해갔다. 농촌에서 올라온 한국인 노동자들이 떠나간 자리에 디지털 기술에 익숙한 젊은 세대와 일자리를 찾아 한국에 온 중국의 노동자들이 채워갔다. 중국인과 한인교포는 주로 주변의 건축 및 소규모 공장에 출근하는 일용노동자들이 많다. 그래서 그 주변에는 인력사무소가 많다. 출퇴근 시간이 되면 이들을 실어나르는 승합차들이 바삐 돌아다닌다.


나 역시 주로 가리봉동 배송할 때는 이들을 많이 만났다. 한국인 주인집에 중국인 또는 교포 세입자가 사는 식이다. 처음에는 나도 이들과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일단 언어장벽이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이 택배를 시켰으니, 주소지가 엉뚱한 경우가 제법 있다. 전화를 해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고 주변을 돌며 수소문해도 모른단다.

나중에는 가리봉 시장에서 식료품 가게를 하는 중국 교포와 친해져서 그에게 대신 통화를 부탁하며 해결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잦아지니 어느새 나도 혼잣말로 중국 사람들을 비난하고 있었다. '왜 남의 나라 와서~.' '주소도 제대로 모르면서 택배는 왜 시켜?' 그런 말은 아침 물품 정리 시간에 택배기사들 사이에서 흔히 나오기도 한다.

함부로 외국인을 평가하는 사람들
 

2022년 3월 20일 오후 서울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2022 세계 인종차별 철폐의 날 기념대회에서 이주노동자 및 참석자들이 인종차별 근절과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러나 이는 단지 우리 같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겪는 불편의 투정만이 아니다. 실제 최근 수년 사이에 한국인들의 중국(인) 혐오의식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일상 대화의 자리는 물론 포털사이트와 영상에서도 중국인을 폄하하고 깎아내리는 내용이 제법 흔하다. '누가 누가 싫다'는 표현이 심심찮게 들려올 때는 개인의 잘못을 넘어서 이미 사회적 습관이 된 것이다. 일단 싫고, 거기에 이유를 갖다 붙이게 된다.

그것은 특정 나라 사람을 싫어하는 것도 유행을 탄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우리가 대체로 일본을 싫어하는 것은 역시 식민지 역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일본 사람은 크게 싫어하지 않는다. 내 생각은 이렇다. 중국인을 비롯한 동남아,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대개 우리나라에 돈을 벌기 위해 일하러 온다. 그래서 행색이 초라하고 표정이 무겁고 주로 현장 일터나 허름한 옛 동네 골목에서 쉽게 만난다. 우리도 생각 없이 함부로 대하게 된다.

반면, 일본 사람이나 서구인은 관광목적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물론 요즘은 중국인도 관광하러 오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가벼운 일상복을 입고 밝은 목소리로 떠들며 거리를 성큼성큼 지나다닌다. 특히 몸집 좋은 서구인들 앞에서는 우리가 마치 외부인인 것처럼 주눅 들어 하기도 한다. 지하철에서도 동남아 사람은 조용히 앉아 가지만, 서구인들은 자신감 있게 자기들끼리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을 자주 본다.

국제화 시대에 태어난 MZ 세대는 좀 다를지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기성세대는 우리가 가난한 나라 사람이라는 의식을 전해 들으며 자라서인지, 아무래도 나라의 살림살이 정도에 따라 외국인을 판단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지난해 가을 일행들과 네팔을 2주간 방문할 일이 있었다. 대개 나보다 조금씩 나이가 많은 분들이었는데, 공항에서 내리고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우리나라와 비교해서 얼마나 낙후되어 있는지가 주요 대화거리였다. 가는 곳마다 '여기는 우리나라 1970년대다', '우리나라 시골 어디에도 이런 곳은 없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그런 생각은 낯선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보다 경제적으로 못 한 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분들의 여행기 중 약방의 감초처럼 그런 폄하가 항상 끼어있다. 우리가 가난하게 살다 부자나라가 되니 이제는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못난 사람들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도 1960~80년대 외국에 돈 벌러 나간 분들은 외국에서 그런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코리아'가 어디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고, 아시아 사람들은 '더럽고, 거짓말하고, 시끄럽고, 믿지 못한다'고. 그런데 수십 년 지나 이제 우리가 먹고살 만해지니 또 다른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그렇게 취급하는 건 아닌지 싶다. 특히 우리 자신이 아시아인임에도 서구인을 같은 아시아 사람보다 더 존중하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인 것 같다.

수많은 인종차별적 단어들... 혐오 정당화하면 안돼
 

정회옥 <한 번은 불러 보았다> 책 표지 ⓒ 위즈덤하우스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정회옥 교수가 쓴 <한 번은 불러 보았다>(위즈덤하우스, 2022년)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불러대는 이방인에 대한 호칭이 얼마나 깊은 차별적 고정관념에 물든 것인지 낱낱이 보여준다.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지 않고 주요 꼭지 제목만 살펴봐도 우리 속에 공유된 고정관념을 인정하게 된다.

'흑인보다 낫지만, 백인보다는 모자란' 자화상을 우리는 갖고 있다. 특히 미국(인)에 대한 특별의식은 세계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은 것 같다. 같은 아시아인이지만 일본도 개화기 때부터 자신들은 똑같은 아시아인이 아니라는 자부심이 많았다(탈아론<脫亞論>). 우리도 어느새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동남아는 물론 중국과 같은 아시아 나라가 아니다'라는 자존심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보면 지금 정부에서 목숨 걸고 추진하려는 '해양문명론-한미일 가치동맹'도 비슷한 생각의 정치판 버전인 것 같다.

2부 큰 제목이 <멸칭의 행간: 피부색, 민족, 경제력, 종교>이다. 우리는 '노란 피부 하얀 가면'을 쓰고 '백색 신화'에 빠져 있다. 그래서 '개인을 집단으로 뭉뚱그리는 반흑인성'을 가지고 피부가 검으면 그냥 '흑형'이라고 부른다. 10여 년 전쯤 어느 TV 프로그램을 본 장면이 생각난다. 아프리카 어느 원시 부족을 찾아가 촬영했다.

그런데 그 카메라 앵글은 원시 부족 앞의 문명인이라는 자부심 때문인지 정말 거침이 없었다. 특히 그곳 부인네들이 반나체로 다니는 모습을 모자이크 처리도 없이 내보냈다. 우리나라나 소위 문명사회라는 곳에서라면 그런 장면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결국 찍는 이나 보는 이나 창 들고 수렵 채집하는 아프리카 원시 부족은 사람(문명인)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비슷해서 더 싫다 - 짱깨'다. 우리에게 지금 익숙한 장면이다. 그리고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순수한 단일민족 신화에서 비롯된 혼혈인 배제의 호칭인 '튀기'가 있다. 내가 어린 시절 1970년대에 대표적인 혼혈 가수 둘이 생각난다. 나도 다른 이들처럼 '튀기'라고 불렀다. 그런데 같은 혼혈이라도 흑인 계통의 곱슬머리 가수는 무시당하거나 불쌍하게 여겨졌다면, 백인 혈통의 큰 키와 수려한 외모의 '윤수일'은 오히려 한국인도 갖지 못한 비주얼로 부러움을 샀다.

돈 벌러 와서 비닐하우스에서 사는 사람으로 상징되는 '똥남아' 이주노동자는 우리의 밥처럼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우리 같은 기독교인의 대표적 혐오와 차별 대상인 '개슬람'(이슬람)도 빠질 수 없다.

차라리 이러저러한 이유가 있어서 싫은 것은 덜 위험할 수도 있으나, '괜히 싫다'는 마음은 정말로 위험한 것이다. 괜히 싫은 마음에는 필요하면 무엇이든 얹어서 마음껏 혐오하고 미워해도 좋은 정당화가 되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그들의 외견만 보더라도 그들이 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고, 종종 유감스럽게도 눈을 감고 있어도 그걸 느낄 수 있다. (…) 냄새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 게다가 그들은 의복도 더러웠고 모습도 늠름하지 못했다."(나의 투쟁- 상권, 히틀러, 서석연 옮김, 범우사, 2001년, 99쪽)라고 썼다. 그리고 10여 년쯤 후에 실제로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세상에 그 누구도 편견과 잘못된 습관 없이 사람을 대하기는 어렵다. 항상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로 판단한다. 그러나 어떤 부류의 사람은 늘 그런 선입견으로 대하고, 이유 없이 싫어하는(좋아하는) 부류의 사람이 고정된다면 '나도 중증이구나' 생각하며 서둘러 고쳐야 할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대하는 똑같은 판단을 나도 받게 되어 있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야고보서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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