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05 11:55최종 업데이트 23.12.0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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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유시태가 1952년 6월 25일 이승만을 뒤에서 저격하려는 당시 모습. ⓒ 자료사진


한국 독립운동은 1945년 8·15해방과 함께 제2라운드에 돌입했다. 일제 패망으로 한반도 주도권을 잡은 쪽이 한민족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이었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남한의 독립운동가들은 미군정과 친일세력을 상대로 친일청산과 분단반대 운동을 벌였다. 백범 김구가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것은 그가 제2라운드 대결의 선두에 섰기 때문이다.


김구가 흉탄을 맞고 쓰러진 뒤, 그 대열에서 불쑥 튀어나와 이승만에게 권총을 겨눈 독립투사가 있다. 국가보훈부가 해방 80년이 다 되도록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 의열단원 유시태(류시태·柳時泰)가 그 주인공이다.

부산이 임시수도가 된 것은 한국전쟁 중인 1950년 8월 18일이다. 인천상륙작전(9.15)과 서울 수복(9.28) 이후인 10월 2일에는 "대통령 각하를 위시하여 정부도 9월 29일 천도"했다는 전규홍 총무처장의 담화가 발표됐다(10월 4일 자 동아일보 2면). 그랬다가 중공군이 서울에 들어오기 이틀 전인 1951년 1월 3일 부산 재천도가 있었고, 휴전협정 이후인 1953년 8월 15일 서울 재환도가 있었다.

부산이 두 번째로 임시수도가 된 뒤인 1952년 6월 25일의 일이다. 이날 이승만은 부산 충무로광장에서 열린 '6·25사변 2주년 기념식' 때 '대통령 훈화'를 발표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1일(현지 시각) 미국 양원 합동 연설에서 "당신들의 돈은 자선이 아니라 국제 안보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자"라며 우크라이나가 아닌 세계를 위한 전쟁이라고 강조한 것처럼, 1952년 이날 이승만은 세계 각국이 한국을 지원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그해 6월 28일 자 <조선일보> '전쟁 완승을 확신, 이 대통령 6·25훈화'에 따르면, 그는 "모든 우방들이 우리나라에서 승전치 못하면 그 후에는 모든 자기 나라들이 이와 같은 화를 당할 것을 충분히 께다르므로 속히 성공하기를 결심하고 있는 터이니 이 전쟁은 성공으로 마칠 것을 우리는 조금도 염려치 않는 바이다"라고 연설했다.

이승만이 참전국들의 분발을 은근히 독려하고 있을 때인 그날 오전 10시 50분경이었다. 연설 중인 이승만의 등 뒤에서 총을 꺼내 드는 이가 있었다. 이승만의 3m 뒤 귀빈석에 앉아 있던 독립운동가 유시태였다.

독립운동가는 왜 이승만에게 총을 겨누었나
 

유시태 관련 조선일보 기사 ⓒ 김종훈

 
이 사건에 관한 공보처의 제2차 발표문을 수록한 그달 28일 자 <경향신문> 2면 우상단은 "대통령께서 훈화하시기 위하여 연단에 등단, 훈화 중 흉범 유시태는 배후 약 3메타 거리에서 저격코자 휴대한 권총의 방아쇠를 두 번이나 당겼으나 불발로 인하여 목적을 달하지 못하고 체포되었다"라고 보도했다.

공보처는 유시태에게 저격을 제의한 국회의원 김시현이 8회에 걸쳐 권총 사용법을 가르치고 의원 지위를 이용해 유시태를 귀빈석에 앉힌 사실을 발표문에 담았다. 김원봉의 의열단에서 활동했던 1890년생 유시태가 의열단 동지인 1883년생 김시현과 함께 뉴스의 초점으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이 사건으로 유시태는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김시현도 마찬가지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조선을 장악하기 4년 전에 태어난 유시태는 경북 안동 출신이다. 그가 독립운동가로 데뷔한 곳은 충청도였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29세 나이로 당진과 예산 등지에서 선전 활동을 수행했다.

의열단에 들어간 것은 1921년이다. 그로부터 2년 뒤에 독립운동자금을 확보하고자 서울 부호 이인희의 집을 3차례 방문했고, 이 일로 인해 그해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1949년 3월 19일 자 <조선일보> 2면 우중단은 이인희를 "경북 예천의 갑부이며 수전노로 유명한 자"라고 소개한다. 그런 뒤 "유시태 의사와 남정각 의사가 독립운동자금을 얻고자 찾어가자, 이(李)는 쾌히 이를 승락한 후 그 이튿날 오라고 하여 놓고 경찰에 연락하여, 또다시 찾어갔던 전기(前記) 양(兩) 의사를 체포케" 했다고 설명했다.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친일청산 기운이 왕성했던 1949년 3월 초에 이인희에 대한 영장을 발부했다. 자금 제공을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라, 준다고 해놓고 신고했기 때문이다. 영장이 발부되자 종적을 감춘 이인희는 그달 18일 반민특위에 나타나 자수했다.

반민특위 특별검찰부 자료집인 <반민특위 조사기록>에 수록된 그해 4월 2일 자 이인희 신문조서에 따르면, 유시태는 이인희에게 '우리는 나랏일 하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3월 26일 자 조서에 의하면, 이인희는 자신이 이 말을 '독립운동가'로 알아듣지 않고 '강도'로 이해했다고 진술했다. 유시태가 독립운동가임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이라는 게 그의 항변이었다(4월 2일 조서). 그런 분들인 줄 몰랐다고 항변한 것이다.

경찰에 의한 반민특위 습격(1949.6.6) 등으로 친일청산의 동력이 현저히 떨어진 뒤인 그해 8월 30일, 반민특위 특별검찰부는 이인희에 대해 기소유예 결정을 내렸다. "독립운동자금 조달자를 강도로 인정하였다는 점에 관하여 범죄사실의 인식이 결여하였다는 것보다는 착오가 있었다고 보아 기소 수속을 유예"한다는 결정이다.

상대방이 독립운동가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다는 것이 검찰의 판단이다. 그런 이유로, 유죄이지만 기소를 유예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친일청산의 동력이 떨어지기 전이었다면, 특별검찰부가 이런 재량권을 행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인희의 '착각'으로 인해 1923년에 징역 7년을 선고받은 유시태는 1931년에 시국비방죄로 또다시 1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런 뒤인 1952년, 이승만의 등 뒤에서 나타나 세상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이다.

아직 이승만의 망령에 갇혀 있는 대한민국
 

의열단원 유시태의 묘. 경북 군위군 군위읍 야산에 자리해 있다. ⓒ 김종훈

 
유시태가 거사를 결심한 동기는 독립운동 및 친일청산 문제와 직결돼 있었다. 유시태의 행위 동기는 그에게 거사를 제안한 김시현의 행위 동기에 대한 학술 연구에서 확인된다.

2008년에 <한국인물사연구> 제10호에 게재된 허종 충남대 교수의 논문 '1945~1960년 김시현의 통일국가 수립운동과 이승만 대통령 저격 사건'은 증언과 보도를 기초로 "김시현은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강점기에 민족운동을 전개했던 인물들을 탄압하거나 멀리하고, 일부 민족운동가들을 단지 자신의 정치적 행동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고 인식"하였다며 "반면에 친일 행적이 있는 자들을 권력의 요직에 기용하는 등 친일세력과 손을 잡고 있는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기술한다.

이승만 정권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친일세력을 중용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거사의 주요 동기였다는 설명이다. 이런 동기가 유시태에게도 있었기에 유시태가 위험을 감수했으리라고 볼 수 있으며, 사실상 유시태와 김시현이 제2의 독립운동을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동기들에 더해 "무고한 국민이 희생된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양민학살과 당시 국방부장관으로서 책임을 지고 처벌이 되어야 할 신성모를 주일대사로 임명하는 등 정실인사를 단행"한 이승만에 대한 비판 의식도 작용했다고 논문은 말한다.

어느 체제에서건 민간인을 학살하고 국민을 학살하는 것만큼 정권의 정통성을 깎아내리는 일은 없다. 이승만 정권이 스스럼없이 자행한 양민 학살 역시 유시태와 김시현을 거사로 내몬 배경이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무능한 전쟁 수행과 장기집권 음모에 대한 불만 역시 작용했다고 논문은 덧붙인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이승만에 맞선 4·19 정신을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으로 선언함으로써 이승만을 '불의'와 등치시켰다. 그런데도 지금의 윤석열 정부는 광화문광장과 주미대사관 앞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고 청와대 동남편에 이승만기념관을 세우려 한다.

역대 보수정권에서도 부분적으로 나타난 이런 이승만 미화는 독립운동가 유시태의 명예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않는 것은 김원봉의 동지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승만에 정면으로 맞섰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의열단원 강인수가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데서도 확인되듯이, 의열단원이라고 해서 무조건 독립유공자 지정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니다. 징역형을 도합 8년이나 받은 유시태가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않는 것은 그의 '제2라운드 투쟁'과 무관치 않다고 볼 수 있다. 4·19로 이승만이 쫓겨난 지 63년이나 흘렀지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이승만의 망령에 갇혀 있다는 점이 이런 데서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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